한반도 核시대, 한미동맹의 현주소와 미래비전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 통일연구원 초청위원

한반도 핵시대의 도래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 간에 재래식 전력으로 대치하던 ‘재래식 균형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7년 7월 ICBM 발사와 9월 수소탄 실험은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핵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북한이 美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핵미사일을 개발함으로써 한반도 유사시 한국을 지원하려는 미국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되었다. 냉전시대 서유럽의 NATO 국가들이 과연 미국이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소련의 핵공격을 무릅쓰고 파리와 함부르크를 방어할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했듯이, 이제 한국도 미국이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을 독점한 가운데 미국의 對韓 방위공약에 대한 신뢰문제까지 제기되면서 한미동맹은 창설 이후 최대의 도전에 직면해있다.

김정은이 핵포기를 약속했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믿지 않는 국민이 80%에 달한다. 여섯 차례의 남북 및 미북 정상회동에도 불구하고 북핵폐기에 진전이 없자 비핵화 협상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좌절감이 분출하고 있다. 1945년 지구상에서 핵시대가 열린 이래 핵개발 단계에 있던 나라들은 외부의 압박과 설득으로 핵을 포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핵을 완성한 나라의 핵포기는 체제변화를 통해 스스로 핵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사례뿐이다. 이라크와 시리아(군사공격), 이란(제재), 리비아(당근)는 전자에 해당하고, 남아공과 우크라이나는 후자에 해당된다 남아공은 흑백정권 교체기라는 내부 요인으로, 우크라이나는 공산주의 붕괴라는 외부 요인으로 체제가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핵을 포기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핵무력을 완성한 북한도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전에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북핵의 볼모가 된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먼저 핵무장을 포기하고 북한을 설득하는 소위 비핵화외교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비핵화외교는 처음에는 당근으로 핵포기를 설득하다가 1차 핵실험 후부터 채찍을 들고 압박했으나 북한의 핵보유를 막지 못했다. 트럼프의 최대압박 정책도 실패한 비핵화외교의 막바지 시도일 뿐이며, 미국 내에서도 비핵화협상에 대한 회의론이 팽배한 상황이다. 대북압박의 일환으로 제한적 군사옵션이 거론되었지만, 전면전이 아닌 한 북한의 핵포기를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상당기간 핵을 가진 북한과의 공존을 각오하고 북한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핵폐기를 실현하는 국가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한미동맹의 현주소

하와이와 괌은 물론 美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 외교,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김일성은 30년 전에 핵개발을 미끼로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어 직접대화를 성사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핵무력 완성을 토대로 선대의 숙원이었던 미북 정상회담까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될수록 북핵을 제거해야 한다는 미국의 강박관념이 커진 탓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제재를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안보우려를 해소한다는 구실로 연합훈련을 중단하는 등 한미동맹에 영향을 미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북핵이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미국에서 한미동맹의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미국우선주의를 앞세우고 국제질서와 동맹의 가치를 무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가 문제다. 그는 국제협약을 파기하는 것은 물론 오로지 돈을 잣대로 동맹의 가치를 재단하며 우방국들을 압박한다. 한미훈련을 값비싼 전쟁게임으로 비하하고,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한다며 훈련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도 트럼프다.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이자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도 미국에 대한 위협은 아니고 다른 나라도 하는 실험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북한의 핵, ICBM 시험 중단과 김정은과의 좋은 관계를 자랑하면서 서두르지 않겠다는 트럼프로 인해 북핵문제의 불확실성만 높아졌다. 그가 美본토를 위협하는 ICBM만 폐기하고 북한이 핵을 탑재한 단·중거리 미사일을 갖도록 용인하는 것은 아닌지, 내년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한반도를 국지전으로 몰아가지는 않을지 많은 국민이 불안해한다.

미국의 군과 관료집단의 태도도 문제다. 과거에는 대통령의 비합리적인 정책이 이들의 저항으로 무산되는 경우가 있었다.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시도가 좌절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재 트럼프 행정부에는 미국의 국익을 폭넓게 조망하며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신뢰할 만 한 참모가 없다. 카터의 철군에 반대해서 옷을 벗은 싱글러브 소장과 같은 용기 있는 군인도 찾기 어렵다. 매티스 국방장관, 틸러슨 국무장관, 코트 국가정보국장과 같은 정직한 인사들이 줄줄이 떠나고, 그 자리를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는 예스맨들이 채우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정치적 야심이 큰 것으로 알려진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다. 그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역대 美정부가 제공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는 ‘전례 없는’(unique) 안전보장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안전보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미국의 對韓 안보 공약과 충돌하는 것은 아닌지, 한미동맹을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는지 대해 우리국민은 아는 바가 없다. 미국의 고위관료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신양명을 위해 북핵문제를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많다.

강대국 경쟁시대에 북한 핵문제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공동번영을 추구했던 탈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힘을 바탕으로 패권을 추구하며 국익을 위해 이합집산 하는 경쟁시대가 도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 중국, 이란과 북한을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고 서방주도의 질서에 도전하는 현상변경세력으로 규정했다. 이 세력의 특징은 미국과의 전쟁은 피하면서도 공격적인 외교, 대담한 군사행동, 우호세력을 활용한 대리전을 배합해서 미국 영향권의 주변부를 공략하고 동맹을 위협하는 소위, ‘간보기’(probing)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유권 확보, 이란의 시리아 아사드 정권 지원,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공격적인 반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한 핵문제는 중국과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북한을 대리인으로 삼고 미국의 동맹보호 의지를 시험하는 간보기 전략의 장이자 미・중, 미・러 경쟁의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안보우려도 해소되어야 한다며 ‘쌍중단’과 ‘쌍괘병행’을 주장하는 중국이나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한미훈련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러시아 모두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북한 핵문제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양국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북핵폐기를 위한 가시적인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대북제재 완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도 전략적으로 미·중, 미·러의 경쟁관계를 잘 이용해왔다.

북핵문제가 강대국 경쟁의 대리전으로 부상할수록 북핵폐기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북한 핵문제를 러시아의 지원 하에 동북아 질서를 자국 주도의 새로운 질서로 재편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핵보유를 일정부분 용인하면서 장기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부담을 주는 지정학적 게임을 펼칠 것이며, 그 만큼 북핵문제의 장기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한반도 핵시대, 동맹의 미래비전

한반도 핵시대에 한미동맹은 유럽의 NATO처럼 핵동맹이어야 한다. 핵에는 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핵시대의 냉엄한 교훈이다.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한 경쟁국들은 모두 상대방의 핵개발에 자체 핵개발로 응수했다. 적대세력의 핵에 핵으로 맞대응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재래식 무기와 비교할 수 없는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다. 한 국가의 재래식 전력을 모두 쏟아 부어도 상대방의 수소탄 한 발을 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핵을 보유한 핵국과 그렇지 않은 비핵국 사이의 관계에서, 핵무기는 비핵국으로서는 완벽한 방어가 불가능한 핵국의 절대무기인 것이다.

이런 제반 상황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이 재래식 전력으로 대치하며 비핵화외교를 하던 기존의 한반도 안보패러다임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핵보유를 실체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우리도 핵으로 맞대응하면서 북한의 핵사용을 억지하고 방어하는 구도로 안보의 틀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북핵폐기 목표를 단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력을 모아야 할 초점을 단기간의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당면한 북핵위협에 대한 대응, 즉 억지와 방어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핵을 독점한 북한이 가하는 정치·외교·군사적 위협과 이로 인해 우리가 겪게 될 사회·심리적 압박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에 기대를 걸며 유지해왔던 재래식 대결구도가 북한의 핵독점으로 와해되었음을 자각하고 비핵화외교를 고수하던 북핵정책을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의 일방적인 핵보유로 조성된 전략적 불균형을 우리가 핵옵션을 행사해서 한반도에서 ‘핵 對 핵’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핵의 균형에 입각한 새로운 한반도 핵시대를 열어야 한다. 핵균형 시대에는 전략적 취약성이 전략적 안정성으로, 공포의 불균형이 공포의 균형으로 대체됨으로써 과거 냉전시대의 미∙소, 미∙중 관계와 같이 안정적으로 남북관계를 관리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동맹의 대북 억지태세도 핵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현재 동맹의 대북 억지태세는 북한의 재래도발에 대한 ‘재래억지’(conventional deterrence)와 핵도발에 대응한 ‘핵억지’(nuclear deterrence) 사이에 괴리가 있는 불합리한 구조이다. 재래억지는 휴전 이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여 한미동맹의 병력과 화력을 전진 배치하는 태세를 유지했다. 북한의 도발이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공하지 못하도록 군사력을 전진 배치해서 애당초 도발을 생각하지도 못하도록 한 것이다. 휴전 이후 1·21 사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비정규전 성격의 도발은 있었지만 국지전이나 전면전 등 대규모 도발은 전진배치에 기반 한 억지태세를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막아왔다.

그러나 동맹의 핵억지는 재래억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다. 한국은 자체 핵무장을 포기한 채 핵억지를 미국의 핵자산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핵우산은 한반도 에 핵무기를 전진 배치한 것이 아니라 ICBM, SLBM, 중거리폭격기 등 역외에 배치된 핵투발 수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태이다. 만약 북한이 핵으로 도발하는 경우 역외의 전략핵자산으로 북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 트럼프 행정부의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따르면 핵을 사용한 김정은이 살아남을 시나리오가 없다고 할 정도의 보복위협을 통해 북한을 억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진배치가 생략된 채 역외 핵자산에 의존하는 억지태세는 북한에 핵이 없던 시대에나 통용되던 구시대의 유물일 뿐,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오늘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아울러 러시아의 핵위협에 대응해서 지금도 미국이 소규모의 전술핵을 전진 배치하고 있는 NATO와 비교해도 타당하지 않다.

결론

한국은 ‘북한에 의한 핵독점’이라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안보위기에 처해있다. 핵시대가 열린 이래 군사적으로 대치한 당사국 간에 어느 한쪽의 핵보유를 일방적으로 허용한 사례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국민을 북핵의 볼모로 만든 오늘의 현실은 노태우 정부 이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가 고수했던 비핵화외교의 실패가 자초한 뼈아픈 대가이다. 훗날 역사는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이 추진했던 비핵화외교를 ‘서희 담판’과 대비하여 건국 이후 최대의 외교참사이자 되풀이해선 안 될 안보참사로 기록할 것이다.

북한은 전술적 차원에서 수용한 비핵화란 용어를 공세적으로 역이용해서 한미를 기만하여 시간을 벌고 보상을 챙기면서 핵개발에 성공했다. 겉으로는 핵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비핵화외교의 장막 뒤에서 핵개발에 전력하면서 주한미군 축출과 한미동맹 와해를 포기한 적이 없다. 반면에 한미는 북한의 비핵화가 남북한의 핵포기일 것으로 믿고 경제・외교・안보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북한을 설득했고, 이제는 북한의 장거리 핵미사일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전개 중단 등 군사적 인센티브까지 제공하는 실정이다.

한미동맹은 현재는 물론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 번영과 평화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고 대등한 동맹을 만들기 위해 한국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상식적인 발언을 일삼는 트럼프에게 맞서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하는 책임 있는 목소리를 찾기 어려운 게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미국의 입장을 무조건 따라가는 게 능사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동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도 적절히 분담해야 당당해질 수 있다. 세상이 달라졌고 국민의식도 바뀌었다. 우리 국민은 나라의 자존과 국격을 지키며 의견대립과 마찰도 불사하는 치열하고 주체적인 대미외교를 원한다. 정부와 국민 모두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결의와 동맹도 국익을 위해 활용한다는 용미(用美)의 자세로 무장해야 한다.

한일 역사 갈등의 고양과 한미동맹에 대한 함의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에서는 한일관계와 한미동맹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 냉전시대에는 소련, 중국, 북한이라는 사회주의권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안보동맹으로서의 남방 삼각관계로서의 한미일 협력이 강조되어 한국과 미국 일본을 하나로 엮어서 생각하는 방식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북방으로부터의 연합된 공통의 위협이 약화된 사회주의권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한미일의 협력 필요성은 예전에 비해 약화된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안보 면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희박해져갔다. 또한,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민주화되면서 일본과 점차 대등한 관계를 가지게 됨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동등한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한일이 일체화된 그룹에 속한다는 의식은 약화되었다. 양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동질성이 깊어지면서 오히려 한국과 일본이 같은 진영에 속하고 협력적 기운이 고양되는 것이 당연시될 줄로 알았지만, 한일 양국관계는 그다지 순탄하지 않은 발전 경로를 밟아왔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반부터 한일 양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적인 역사 수정주의의 움직임이 가속화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억압되었던 진보적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표면에 등장하였고, 이들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완전하게 청산되어 있지 않았던 미완의 과제들을 정면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충격적인 경험의 고백이 있은 직후부터 위안부 문제는 정치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한국이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상대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한국에서 일본에 대해 숨겨진 이슈들을 정면으로 제기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일본이 식민지 시대의 ‘가혹한 가해자’였음을 상기시킨 것이었으며, 일본에서는 일본사회당이나 자민당 내의 비둘기파들을 중심으로 한 리버럴한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설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1993년 고노담화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은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냉전 후 한일 양국의 ‘역사화해’를 통해 새로운 동아시아의 협력 분위기를 고양하려던 지역협력의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사회에서도 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한 반동적 역사관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93년 자민당 비둘기파에 의한 역사 반성과 사죄에 제동을 걸면서 자긍심을 가진 역사관, 사죄와 반성보다는 일본의 자존심을 높이는 ‘국민의 역사’ 재구성 움직임이 가속화된 것이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였다. 현재 아베정권의 지지부대의 모태가 되는 우익세력 ‘일본회의’가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의 민족주의적 세력의 조직화는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흐름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인 동시에, 한일 양국 간의 ‘자극과 반응’의 흐름 속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는 한일관계가 미국의 조정이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길항관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사태의 전개였다. 사실상 미국도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개입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국의 식민지 시대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처리에 임하지 않은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평화헌법 제정 등을 통해 ‘징벌적 평화(punitive peace)’를 요구하였다는 측면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두려워한 측면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역사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일의 협력적 움직임이 지속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 첫째, 일본 내에 전전의 경험을 공유하고 식민지와 전쟁에 대해 회한의 심정을 가진 진보적이거나 리버럴한 정치세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유럽에서의 지역통합의 전개를 보면서 동아시아에서도 다자간 협력의 제도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정치지도자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동아시아 협력 구상’이라든가 ‘한중일 협력’의 기운이 고양되면서 한일은 지역의 일원으로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셋째, 1989년부터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한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미사일 개발은 한일 양국으로 하여금 소련과 중국에 대신하는 ‘새로운 위협요소’로 자리 잡았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 한일이 공동 대처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의 재발을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한일 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의 하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초강국인 미국의 일극체제(Unipolar system)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인 존재감이나 한미동맹, 미일동맹의 유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2001년 9.11사태의 발발로 인해 세계가 테러집단에 의한 대량살상무기의 획득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상당 기간 미국은 자국에 도전하는 잠재적 위협에 대한 대처를 뒤로 하고 북한, 이란, 이라크 등 ‘악의 축’의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이 연계하여 미국과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이같은 움직임에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면서 점차적으로 미일동맹을 글로벌화 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반면 중국의 부상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중국의 성장을 과실을 공유하려는 움직임도 동시에 가속화되어 한국은 중국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통상무역을 통해 단기적이 이익을 많이 축적해 나갔다.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보면,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자연스런 공동 대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피해자로서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한중 양국의 공통성 때문이었으며, 중국이 아직은 개발도상국으로서 지역 및 세계질서를 교란하지 않는다는 온화한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수행하는 데 대해, 일본은 국제적인 지원을 통해 국제안보와 일본의 국가안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점차 정착되어 갔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능력이 향상되면서 한국은 북한문제의 처리에 골머리를 썩여야했다. 진보정권하에서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화해협력정책’이, 보수정권하에서는 ‘압박과 제재’ 정책이 번갈아 시행되었지만, 북한의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싶다는 심정에서는 공통된 접근법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대북 견제와 억지전략으로서의 기본 성격에 의문을 가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미국과의 동맹이 한국과 일본의 협력의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다.

2010년을 전후 하에 한일 간의 갈등의 역학은 변화의 조짐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민주당 정권이 탄생한 이후 하토야마 정권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공동체’라는 유화적 동아시아 정책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9월 이른바 ‘센카쿠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점차 중국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급선회에 나섰다. 2012년 정권을 다시 잡은 아베는 중국에 대한 경계감을 숨기지 않고 내세우면서, 중국을 포위하고 해양진출을 억제하려는 미-일-호-인도 4개국에 의한 ‘다이아몬드 안보구상’을 내놓았고, 나중에 이 개념은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재 명명되면서 일본의 외교안보전략의 중추적인 요소를 형성하게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미국도 이 전략에 동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견제전략은 더욱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외교안보전략의 요체가 바로 인접국인 한반도의 한국과 북한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질서의 도전자인 중국으로 이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부상에 정면 대응하는 글로벌 차원의 파트너로서 점점 협력의 날실을 촘촘하게 짜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북한은 김정일 말기와 김정은 초기에 핵과 미사일 능력을 급격하게 발전시켜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동아시아 지역, 나아가 하와이와 괌을 타격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 데 이어, 2016년 즈음이 되면 미국 본토를 겨냥할 수 있는 미사일 타격능력의 개발에까지 나섰다. 이에 대응하여 한국은 북한을 최대 압박을 통해 공세적 움직임을 제어하려는 욕구와 더불어, 중국 등 주변국가와의 협력을 통하여 북한의 불안정성을 강화함으로써 통일을 촉진하겠다는 구상인 ‘통일대박론’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도움을 바란 점에서 박근혜정권은 새로운 대북접근법을 시도한 것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움직임은 일본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정도의 불신을 자아내게 했다. 첫째는, 중국군 창설 70주년에 북경 천안문 망루에 푸틴 및 시진핑과 함께 서게 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이 ‘탈일본’하여 중국에 다가서고 있다는 깊은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둘째, 한국과 중국이 피해자의식이 공유를 기초로 하여 일본에 대한 역사문제 공략을 함께 시도함으로써 일본의 우익세력의 발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일본 언론에서는 ‘중한’이라는 단어를 활용함으로써 중국과 한국이 전략적으로 한 바구니에 있으며, 이들 두 나라가 역사문제를 내세워 일본을 괴롭힌다는 인상을 확산시켜나갔다. 당시 오바마정권 하에서의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접근법을 통해 북한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접근법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안부 합의’를 종용하는 한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통해 북한의 위협에 공동 대처할 것을 주문하였다.

문재인 정권에 들어 한국은 일본을 향해 두 가지의 도전을 설정하였다. 하나는 ‘위안부 합의의 형해화’ 및 강제징용피해자들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였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1965년 청구권조약에 의해 징용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일본과의 정면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한에 대한 전향적인 관여정책’이었다. 북핵 능력의 고도화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에서의 또 다른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신한반도 평화구상을 내놓으면서 북핵문제에 대한 강한 압박과 제재를 선호하는 일본과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문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징용문제가 완결되었다는 일본이 한국 정부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거듭 요구하고 협의와 중재를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무반응, 무대책, 무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한국의 대응에 대한 불만감으로 표시로 사실상 경제보복에 해당하는 ‘수출규제 조치’와 화이트리스트 국가로부터의 배제‘를 선언하였다. 특히 전자는 수출관리의 불비를 이유로 하였으나, 후자와 관련해서는 ’안전보장상의 이유‘를 내걸었던 관계로 한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치 한국이 북한과의 연루 속에 비우호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한국의 기간산업에 대한 재량적 자의적 규제조치를 취하고, 한국만을 쏙 빼내어 비우호국 취급을 함으로써, 외교 갈등은 본격적으로 경제 분쟁으로 비화하였다, 한국은 이에 대항하여 민간차원에서는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일본 여행 자제운동을 벌이는 한편, 정부차원에서는 일본에 의존하는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동시에 안전보장을 이유로 했다는 점을 틀어 안보협력의 상징이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연장을 사실상 중단하는 결정을 8월 22일에 내림으로써 경제 분쟁을 안보협력의 거부라는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한일 간의 고질적인 역사분쟁은 언제고 미국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역사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개입을 늘 회피해왔다. 자국도 역사의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이전 행정부였다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설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겠지만, 현재의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통상과 무역을 ‘무기화’하는 전략을 상시적으로 구사하는 관계도 있고 해서 굳이 한일 간의 경제 분쟁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 중단을 선언하고 나자 ‘우려를 넘어 실망하였다’는 논평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있다. 이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이 상존하는 상태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공동 대처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조치들에 대한 대항조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국이 중국의 공세적 대외정책에 대응하여 한미일 협력 체제를 공고화하려는 상징적 의미도 가진 것이어서 다지 한일관계의 유동화에 그치지 않고 한미관계의 본질적 수정 내기 미국의 권위와 설득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이 지소미아의 연장 중단을 일본에 통보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지소미아의 자동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소미아는 11월 23일까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일본과의 협의 여하에 따라서는 막판에라도 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다. 한일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관리 가능한 관계 재수립을 위해서는 한국이 11월 23일 이전에 이를 번복할 수 있는 정책적 재량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이에 상응하는 우호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한국을 다시 화이트리스트에 복귀시켜 우호국으로 대우한다는 외교적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일 양국이 한걸음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고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한일 갈등은 서로가 예상하지 못한 양상으로 걷잡을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한일 간의 장기적인 갈등이 자국의 이해에 반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대화의 촉진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일 간의 갈등은 결국 양자에게는 손해를 가져올 뿐이고, 북한에게는 직접적인 수혜를 안겨줄 뿐이며 중국이 어부지리를 얻게 한다는 점에서 하수중의 하수의 결정이다. 양국의 지도자의 냉정하고 현명한 사태의 관리과 관계 회복이 더욱 중요해 지는 시점이다.

바람직한 한미동맹과 6.25 참전 미국용사를 바라보며

윤영선/본 협회 뉴욕지회장

과거의 한미관계는 정치, 군사, 문화 등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특히 대외관계에 있어서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경재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마찬가지로 경제관계는 안보관계로 규정되게 되기 마련이다. 한미관계도 마찬가지다. 과거는 안보를 축으로 하는 한국과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관계가 경제마찰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한국 전쟁이후 미국이 한국의 전후복구를 경제원조 등으로 지원하여 준 것이나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구제 금융을 통하여 필요한 외환을 긴급 지원하여 한국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끔 도와준 것도 군사・안보적인 관계가 경제관계로 규정한 사례로 이해할 수가 있다.

현재 문재인정부와 미국과 한미동맹관계의 변화에 따른 안보위험의 증가와 해외투자자의 동요는 간접적인 경로로 한국경제를 불안하게 만들고 한미동맹과 경제관계를 후퇴시킬 수 있다.

현 자본시장의 전면개방으로 외국자본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된 상황에서 북한의 비핵화 방향의 처리 및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친북한 정책으로 인하여 한미관계의 변화가 한국안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시장분위기가 형성된다면 한국 경제는 상당한 영향과 혼란에 빠질 수가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 안보에도 상당한 충격이 초래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행태가 그러하고 일본의 일방적인 행동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이러한 행태들은 문재인정부의 일방적인 친북정책 추진을 기회로 삼아 한미동맹의 균열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관계의 균열과 불안이 심화되는 경우에는 한국 국가신용 등급의 하락과 외국자본의 증시이탈, 이에 따른 주가하락, 한국발행 채권의 연장애로 등 금융 외환 시장까지도 크게 흔들릴 것이다. 이 경우 현재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위축된 국내 및 중소기업의 소비투자 심리가 더욱 위축되어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도 축소되거나 중단되는 상태가 되어 실물경제에까지 큰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다. 이것은 제2의 외환위기도 올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앞으로 발전적인 한미 경제관계 및 한미동맹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첫째, 한국인의 안보불안감을 해소하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 한국정부를 시험할 수 없게끔 한미관계를 더욱더 강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한국정부가 지금까지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어중간한 정책이나 행동을 계속 취해나간다면 한국의 안보는 더욱더 불안한 형국이 조성될 것이고, 결국 이는 한미동맹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정부는 한미동맹의 강화는 한미 간의 안보・군사적 협력뿐만 아니라 양국 간의 경제협력도 강화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한미 양국 간 경제마찰과 긴장 해소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안보 불안이 경제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한미 안보협력 및 동맹관계를 확고하게 하면서 자주국방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할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을 북한에 던진다 해도 북한은 그들의 핵무기 일부를 폐기할지는 모르나 절대로 핵무기 전체를 폐기하는 협상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현재의 핵은 그대로 보유한 채 단지 더 이상의 핵실험을 중지하는 것으로 하고 이후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우리는 북핵폐기와 관련하여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지라도 한미동맹을 더욱더 굳건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이처럼 소중한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그동안 한미우호협회 미국 뉴욕지회는 지난 9년간 매년 6월 25일경을 전후하여 6.25 참전 미국 용사를 위한 보은행사를 해오고 있다. 이 행사를 2010년에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행사시 300여명의 참전용사와 뉴저지 주(NJ) 주지사를 포함한 30여명의 미 주류사회의 인사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6.25 참전용사들이 점점 줄어감에 따라 9년이 지난 올해 행사에는 참석인원이 25% 정도 줄었다. 미연방센서국이 최근 6.25휴전 66주년(7월 27일) 자료에 의하면 2019년 미국 전지역 6.25 참전미군의 생존자는 93만 2,700명 정도로 2010년의 300여만 명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숫자는 6.25전쟁 참전미군과 휴전이 끝날 때까지의 미 참전용사의 숫자를 집계한 것으로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뉴욕지회의 보은행사는 앞으로 2-3년 정도 지나면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런 이유로 미주 지회는 2년 전부터 6.25 참전 보은행사에 돌아가신 한국전 참전용사의 가족이나 손자들도 초대하여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으며 행사시마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축사를 계속하고 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여러분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라고.

한미동맹은 한국의 유일무이한 대(對)북한 비대칭전력

여 명
서울시의원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일.”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비난하는 북한의 논평이화제다. 한국에서는 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삶은 소대가리’ 표현이 김정은이 발작하듯 쏘아 올려대는 미사일 발사체보다 ‘핫한’ 반응이다. 아마 저 논평을 쓴 북한 당국자도 한국의 반응을 보며 내심 흐뭇했을 것이다. 북한의 이런 격한 반응은 우리 대통령에 대한 근본적 무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무시의 근거는 아마도 균열이 커지고 있는 한미동맹일 테다.

올해로 69주년을 맞은 한미동맹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첫 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는 체제동맹이다. 이 토대에 기반해서 한국이 미국을 비롯한 민주국가들의 배려와 지원으로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었다.

둘째로는 북·중·러의 대륙세력, 즉 공산전체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연대에 맞선 한미일 해양 자유국가의 삼각편대 구축이다. 이 삼각편대가 공고할수록 동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이 유지된다.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은 각국의 정치·경제 안정성으로도 이어진다.

셋째, 한미동맹은 우리 국방안보의 핵심축이다. 1953년 전쟁 중인 이승만은 기습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다. 그의 명분은 미국과 북한의 휴전협상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이 아니면 안 된다’ 이었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무리수는 그야말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멱살을 잡다시피 끌고 와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으로 하여금 최빈국 대한민국과 동등한 위치의 ‘군사동맹’을 맺게 한다. 그 이후로 (몇 차례의 위기가 있긴 했지만) 한미동맹은 우리 안보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 핵무기에 맞선 대한민국의 비대칭전력이다. 비대칭전력이란 전차나 야포 등의 재래식 무기가 아닌 특수전력을 가리키는 군사용어로서, 적에 비해 월등히 앞서는 전략무기를 지칭한다. 주로 핵무기다.

그리고 한국의 비대칭전력은 한미군사동맹이다. 전술했듯 한미동맹이 갖고 있는 함의인 1. 자유민주주의 체제 우월성 2. 세계최강국과의 ‘혈맹’ 이라는 군사력의 우월성 3.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패권 우월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비대칭전력에 균열이 가고 있다. 2019년에도 여전히 80년대식 반미주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그 일당들 때문이다. 이들은 정권을 잡기 전부터 북한 핵미사일을 최소한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사드 미사일 배치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마치 미국에 나라를 팔아넘기기라도 하는 양 반대하더니, 군통수권을 가진 지금은 김정은의 눈치를 보느라 한미군사훈련 마저 도둑 장가가듯 ‘몰래’ 진행하고 있다. (이마저도 북한으로부터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일이라는 조롱이나 당하고 있는 실정)

‘이 정권의 핵심 세력이 북한 정권에 부역하는 세력이라 그렇다’ 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통일에 대한 이상과 방향이 일반적인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와는 별개로 국가경영에는 원칙이 있다. 국가의 핵심이익인 영토주권과 국민 안전에 대한 사항은 양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실주의 정치학을 처음 주창함으로써 근대 정치사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신생약소국의 생존에 대해 몇 가지 전략을 남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은 ‘동맹’ 에 관한 부분이다. 국가는 자신의 동맹국이 자신보다 힘이 셀 때, 다른 국가가 그 동맹을 파기하라고 협박하거나 회유해도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설사 동맹국의 편들 들어서 적대국가와의 전쟁에서 진다하더라도, 동맹국과의 신의를 지킨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맹을 파기할 경우, 회유한 국가조차 이용가치가 다하면 기회주의 국가로 분류할 것이므로 위험하며, 과거의 동맹국을 적으로 돌리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당장 최근의 한국 안보현실을 살펴보더라도 마키아벨리의 말이 그대로 증명된다. 박근혜 정부가 친중정책으로 기울 때 한미동맹은 균열이 생겼었고, 시진핑은 박 대통령이 칭화대에서 중국어로 인사말을 한 직후 우리 방공식별구역 KADIZ 침범으로 화답했다. 내놓고 반미친중(북)을 하는 문재인 정부 등장 이후 균열은 크레바스가 됐다. 이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문 대통령과 한미동맹을 조롱한다. (참고로,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정치 사상가는 마키아벨리라고 한다.) 북한은 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소리’ 라느니, 자신들이 핵미사일을 쏘면 ‘똥오줌을 갈긴다’ 느니 하며 구애 수준으로 애북愛北적 발언을 이어가는 문 대통령에게 인격적 모독을 가하고 있다.

한미동맹이 굳건할 때라야 중국도, 북한도 우리를 쉽게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비대칭전력이며, 그래야 동아시아의 군사 강대국들 틈에서 중재자 역할이나마 할 수 있다. 진짜 중간자가 되려 하면 한국은 길을 잃고 만다.

한일 GSOMIA 파기가 부르게 될 나비효과

김건호
고등학교 역사교사

2019년 8월 22일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협정의 종료를 공식 발표함에 따라 동북아의 평화를 지탱하고 있었던 한미일 간 안보협력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하게 되었다. 해당 문제는 과거사 논란,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를 포함하여 역사·경제·정치 등의 다양한 이슈가 엮여 있지만 이번 기고문에서는 한일 GSOMIA의 파기가 부르게 될 나비효과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GSOMIA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한일 GSOMIA의 파기가 가져올 것으로 생각되는 결과들에 대해 다뤄본 뒤에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GSOMIA는 “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의 약자로 한국어로는 “군사정보협정”이라 명명한다. GSOMIA가 체결되면 협정국 사이에 군사 기밀을 서로 공유할 수 있게 되는데 다만 협정을 체결한다고 해서 모든 정보가 상대국에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며,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사안별로 검토해 선별적인 정보 교환이 이뤄진다. 현재(2019.08.25.)기준으로 한국은 34개국 및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GSOMIA를 체결한 상태이며 참고로 협정국 34개국 안에는 한국과 같은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국가로 비춰지는 러시아와 베트남도 포함되어있다. 그 중 한일 GSOMIA는 2016년 11월 23일 33번째로 체결되었는데 다른 국가들과 체결한 GSOMIA의 경우 유효기간을 따로 정하지 않거나 5년을 설정하였지만 유독 일본과의 GSOMIA의 유효기간은 1년으로 설정했었다. 이는 체결 당시 국민적 반발이 심각했었기 때문에 고려되었던 방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한일 간 반목으로 인하여 한일 GSOMIA는 종료하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이러한 결정은 한국에 나비효과를 부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한일 GSOMIA가 체결될 당시 아시아 일대의 안보환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자신이 처음으로 총리가 된 2006년부터 착실하게 새로운 안보 구상을 준비하였는데 그가 마련한 안보시스템은 미국-일본-인도-호주를 묶어 “Asia’s Democratic Security Diamond”였다. 굳이 안보동맹에 ‘민주적’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은 非민주적 국가를 겨냥한 것으로 노골적인 대중국 봉쇄망을 형성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2007년 9월에 사임함에 따라 이러한 구상은 흐지부지 되는 듯 했는데 2012년 12월에 다시 총리에 취임하면서 그의 민주적 안보동맹 구상은 부활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 구상에 포함되어있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다만 오바마 행정부에서 한미동맹은 린치핀(Linchpin), 미일동맹은 코너스톤(Cornerstone)에 비유하며 한미일 동맹의 결속을 강조함에 따라 해당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일을 동시에 묶을 수 있는 안보협력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기제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체결된 것인 바로 한일 GSOMIA였던 것이다. 한일 GSOMIA가 체결됨에 따라 한국은 아시아에 형성되고 있는 대중국 포위망에 동참하여 자유민주국가의 대열에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간과한 채 단순히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일 GSOMIA를 파기하자고 주장하거나 정책 입안을 한 사람이 있다면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며 장래 국가안보에 끼치게 될 해악은 전부 책임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일 GSOMIA의 파기는 한미동맹의 균열을 가져오고 한미일 간 안보협력체제의 근간을 흔들게 될 것이다. 현재 미국이 20세기 동북아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었던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시스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새로운 안보시스템을 거부하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이에 더하여 미국이 중국의 패권경쟁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고 확실하게 억제하여 동북아의 평화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반발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오히려 아시아의 안보구상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려 하고 미일동맹이 갖는 무게감을 훨씬 키우기 위해 노력한 일본 입장에서는 한일 GSOMIA의 파기는 새로운 기회처럼 여겨질 가능성조차 있고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1965년부터 지속되어 왔었던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의 근간을 완전하게 흔들거나 심한 경우에는 붕괴시키는 파국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결과물은 더 큰 나비 효과를 부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바로 한국의 대외 신인도 문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일 GSOMIA는 한미일 안보협력의 중요한 축인 동시에 아시아에서 非민주적 국가인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형성하는 안보시스템의 한 일환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한국이 탈피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대중국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더군다나 중국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방위선인 ‘도련선’(島鍊線)을 선포하고 그 중에서도 핵심으로 강조하는 제1도련선에 한반도 전체를 포함시켜놓은 상황 속에서 아시아의 새로운 안보체제에서 탈피하는 행위는 중국이 앞으로 행할 수 있는 국익침해 행위를 묵과하는 상황을 초래할 때 전 세계 어느 국가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한일 GSOMIA파기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최선이라면 한일 간 갈등 국면이 완화되면서 완전히 종료될 것으로 예정되는 11월 23일 이전에 해당 발표가 취소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10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는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은 한일 갈등의 해소를 위한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로 판단된다. KBS에서 한국리서치에 의뢰하여 최근 8월22일-23일 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7%가 일왕 즉위식에 축하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고려 가능한 사안이라고 답했던 점을 한국 정부에서도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예정대로 오는 11월에 한일 GSOMIA가 파기된다면 한미동맹의 균열을 최소화하고 새롭게 재편되어가는 아시아의 새로운 안보질서에 어떤 방식으로 합류할 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일본-인도-호주로 형성된 ‘민주적 안보동맹’ 국가들은 2016년 1월부터 매년 인도 뉴델리에서 회의를 개최하며 4자 동맹의 형태를 지향해가고 있고 지난 5월에는 미국-일본-호주-프랑스가 인도양에서 첫 합동훈련을 가지며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힌 상태다.

이처럼 동북아의 안보질서가 對중국 포위망의 형태로 구상을 마치고 현실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일본과의 안보협력을 중단하는 결과가 새로운 시스템에 참여하는 국가들에게 정확하고 충실한 설명이 보충되지 않는다면 한국이 한-미-일 협력체와 민주적 안보 동맹에서 탈피하여 북한과 중국이 중심이 되는 질서에 편입하려는 것 아니냐는 매우 잘못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될 수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개별적인 연합 훈련조차 완전히 참여가 배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한미 동맹은 약화 내지 해체의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는 한국의 장래에도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이다. 이처럼 한일 GSOMIA의 파기는 상상할 수 없는 나비효과를 부를 것으로 예상되며 다시 한 번 종료조치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긍정심리학: 가장 미국적인 행복론

이동준
㈜두산 전략팀장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은 실용적이고 긍정적인 미국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매우 미국적인 학문분야입니다.

1998년 미국심리학회 회장 마틴 셀리그먼은 보통사람들의 행복추구를 위한 새로운 심리학을 주창합니다 .이는 심리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존 심리학과는 차별화되는 내용이었으며, 고도화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신적 공허함을 느끼던 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일반적인 인문학 분야들의 오랜 역사를 생각하면 상당히 젊은 학문인 셈입니다.

긍정심리학의 가치

긍정심리학은 더 행복해 지기 위한 세가지 Path를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Pleasant life, Engaging life, Meaningful life가 그 내용입니다.

Pleasant life는 말 그대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역의 약 50%는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행복감도 타고난다’ 는 이야기가 실제 근거가 있는 셈이지요. 긍정심리학에선 이 영역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테크닉들을 개발하여 제시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합니다. (10~15% 개선) Engaging life는 심리학자 칙센트 미하이가 정립한 개념으로, ‘몰입(flow)’ 에 해당합니다. 적절한 정도로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할 때 느끼는, 시간이 멈춘 듯한 집중상태지요. 그 극치가‘무아지경’ 이 될테구요. Meaningful life는 ‘소명의식(calling)’을 지칭합니다. 많은 경우, 사회, 국가, 종교, 학문 등 자아보다 더 큰 대상에 대한 헌신을 의미하며, 삶의 목적이 되겠지요.

다양한 연구결과는, ‘몰입’과 ‘소명의식’이 ‘즐거움 추구’와 비교할 때, 행복에 기여하는 정도와 지속성에서 훨씬 우세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타고난 행복감이 부족한 사람도 몰입과 소명 영역의 개척 정도에 따라 충분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지요.

세 영역 각각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에는 정답이 없으며, 각자의 기질과 성향에 맞게 개발해야 합니다. 다만 더 행복해 지기 위해서, 이런 체계와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즐거움만 추구하는 것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이지요.

한국사회 적용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행복을 유예하는데 익숙한 한국사회에, ‘더 행복하면 더 나은 성과를 낸다’는 메시지는 신선합니다. ‘내가 행복해야 남을 더 잘 도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자신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기초적인 사회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거나, 빈곤문제가 심각한 국가에서 긍정심리학은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긍정심리학이 자랄 토대가 마련된 사회입니다.

긍정심리학의 한계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할 것도 없이, 행복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라는 건 우리모두 직관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 역사상 수많은 논의와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긍정심리학은 이러한 인류의 행복추구 이론들을 폭넓게 검토했고, 신약인증 과정처럼 엄격한 검증방법을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중 하나의 방법론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긍정심리학이 모든 사람에게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긍정심리학은 학문의 영역입니다. 행복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이론과 공식에 천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공식에 맞게 하루를 보냈나?, 다섯 가지 원칙이 적용되었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정작 행복한 순간들을 놓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지요.

결어

소크라테스는 근엄한 표정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밝고 명랑한 꼿꼿함’(몽테뉴, 수상록)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저 또한 밝고 긍정적인 삶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나만의 Pleasure, Flow, Meaning 을 파악하고 정교화하기 위해 내면을 열심히 탐구합니다. 평생 지속할 즐거운 과제입니다.

같이 갑시다 : Go Together

♣ 평택 미군기지에 한미 동맹 조형물 들어섰다

평택 미군기지(캠프 험프리스)에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됐다. 가로·세로 각각 15m, 높이 5m인 이 조형물은 ‘함께하는 내일, 아름다운 동행’을 주제로 한미 장병이 협력해 역경을 극복해온 모습을 형상화했다.

조형물 제막식이 10일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박한기 합참의장,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가운데 탑모양 조형물은 인천상륙작전에서 한미 양국 군인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험난한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을, 주변에 원형으로 설치된 ‘역사의 벽’은 6·25전쟁 이후 한미동맹의 발전 과정을 각각 담았다. 바닥에는 북한의 남침과 정전협정 조인, 한미연합사령부 창설과 주한미군사령부 평택 이전 등 한미동맹의 주요 역사를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시계’와 6·25전쟁의 주요 전투 등을 표시한 ‘한반도 조형’이 설치됐다. 원 바깥쪽에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 상징물 아래 각 군의 특징과 한미 양국군의 창설이 기록돼 있다.

정 장관은 축사를 통해 “이 조형물은 한미동맹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영광스러운 기록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가는 지금, 한미동맹은 강력한 힘으로 변화를 뒷받침하면서 위대한 동맹의 역사와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도 “우리의 동맹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으며, 절대 변치 않을 것”이라며 “이 조형물은 우리의 공동의 과거의 기록이자, 우리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며, 밝은 미래를 향한 등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미동맹 상징조형물은 한미 기업 간 협력을 지원하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에서 미국 육군성에 기부한 것이다.

♣ 美국방부 “한·미·일 정보공유는 안보 핵심”… 지소미아 파기 우회 경고
    [지소미아 파기] 일부 “한·미 관계 문제 생길 수도”

미 국방부는 22일(현지 시각) 청와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종료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정보 공유는 (한·미·일) 공동 안보 정책과 전략을 개발하는 핵심”이라고 밝혔다. 지소미아 파기가 지역 안보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데이브 이스트번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지소미아 폐기에 대한 본지 질의에 “한국과 일본이 입장 차를 해소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권고한다”며 “신속히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또 “미국과 일본, 한국이 우애와 결속을 통해 협력할 때 우리는 더욱 강하고 동북아시아는 더 안전하다”고 했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지난 9일 한국을 방문해 정경두 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지소미아는 한·미·일 안보 협력에 상당히 기여한다”며 유지를 요청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지소미아 파기 결정을 전하면서 “이번 결정은 (한·일 간) 역사와 무역에 대한 논쟁을 더욱 증폭시키고 북한에 대한 안보 협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했다. 조시 스미스 로이터통신 기자는 트위터에 “이번 결정은 한·일 안보 협력 약화를 우려하는 미국을 경악하게 할 것”이라고 썼다.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이 (미국의 반대에도) 일본과의 군사정보 공유를 포기하기로 한 것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존재감이 감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고, 워싱턴포스트(WP)도 “이번 결정은 미국의 우려를 자아낼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 매슈 하 민주주의수호재단 연구원은 본지에 “이건 미국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간 것”이라며 “북한이 지속적으로 미사일 실험을 하는 가운데 한국이 미국과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이렇게 가면 미국과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청와대가 ‘미국과 소통했고, 미국은 이해하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 “한국의 낮 시간은 미국의 새벽으로 국무부와 백악관에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며 “일방적인 통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대북 제재 전문가인 조슈아 스탠턴 변호사는 트위터에서 “솔직히 나는 최근에 현 한국 정부와 민감한 정보·기술을 교환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19년 8월 23일 기사)

언론속의 한미관계

♣ “한국, 중국과의 3不 깨고 미국 MD 참여해야”

미사일 전문가 윌리엄스
이 최근 쏜 단거리 미사일, 한국 레이더로는 포착 어려워방어체계와 통합해야 요격

북한이 최근 잇따라 발사한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위해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MD)에 참여해야 한다는 미국 전문가들의 주장이 제기됐다. 최근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 발언에 이어 미국발 ‘안보 청구서’가 민관 등 각 분야에서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17년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하자 ‘미국의 MD 체계 참여,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동맹’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3불(不)’ 입장을 표명했었다.

미사일 전문가인 이언 윌리엄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은 12일(현지 시각) 북한이 최근 발사한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관련해 “비행고도가 50㎞ 미만으로 낮게 비행하기 때문에 (한국의) 레이더로 포착하기 어려워 패트리엇 미사일로 요격하기 힘들다”며 “북한 미사일 발사를 조기에 정확히 찾아낼 수 있도록 레이더 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능한 한 많은 레이더로 북한 미사일을 탐지해 요격미사일을 발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2017년에 중국과 한 (3불) 약속을 파기하고 미국 MD 체계에 참여해야 한다”며 “미국 MD 체계에는 북한 단거리 미사일의 발사와 비행을 감지할 수 있는 자산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MD망 참여로) 한국에 배치된 사드와 패트리엇 미사일, 한국 밖의 사드 및 패트리엇 미사일 부대와 레이더 기능이 통합되면 강력한 탐지 기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리 시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도 이날 RFA(자유아시아방송)에 “미국은 한국과 주한 미군을 위협하는 북한의 새로운 단거리 미사일 개발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한국의 미국 MD 합류가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력을 향상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MD에 합류하게 되면 미국 전체 미사일 방어망에 연동해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한 군 관계자는 “현재 우리 군은 MD에 편입돼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MD에 편입된 것과 비슷하다”면서도 “하지만 명목적으로 MD에 편입되면 패트리엇 등 추가 요격 자산이 증강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중국의 반발이다. 우리 정부는 사드 마찰 이후 ‘3불 정책’을 고수해왔는데 MD 편입이 정책적으로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중국의 반발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북한과 대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MD 가입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며 “MD는 북핵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쓸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로 현재로서는 ‘모호성 전략’을 취하는 게 낫다”고 했다. 다만, MD 편입으로 인해 최근과 같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방위비 분담금 압박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군 관계자는 “MD에 편입되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탄도미사일 초기 궤적을 포착할 수 있고 결국엔 미국에 엄청난 이득”이라며 “우리도 미국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지게 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MD 편입은 없다”고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우리 정부는 MD에 편입하지 않음을 천명해왔고, 독자적으로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19년 8월 14일 기사)

♣ 美국방장관, ‘한미동맹 강조’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마크 에스퍼 미국 신임 국방부 장관은 9일 “한미동맹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의 핵심축(linch pin)”이라고 강조했다.

에스퍼 장관은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한미 국방장관 회담 모두발언에서 “저는 오늘 한미동맹은 철통(Iron clad) 같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미 양국은 전쟁 속에서 형성된 유대 관계를 갖고 있다”며 “우리는 평화로운 한반도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비전을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에스퍼 장관은 대북 문제에서 “우리는 역내 우방국들과 함께 북한이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비핵화(CVID)에 참여하기 전까지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단호하게 집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외교적 해결 노력도 강조했다.

는 미국은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모든 약속에 대한 진전을 이룩하기 위해 북한과 외교적으로 접촉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한미 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문제에 대해서는 “조건을 기초로 미군 사령관이 가진 전작권을 한국군 사령관에게 넘기는 문제에서 진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는 우리가 동맹으로서 갖는 신뢰의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자 그 어떤 상대도 필적할 수 없는 전략적 이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출처 : 매일경제 2019년 8월 9일 기사)

피의능선 전투 전적비를 찾아서

최상진
수필가 / 본 협회 편집위원

휴전선 아래 우리 마을 양구

내가 사는 마을은/대안산 아래 작은 마을/저 너머 북녘하늘 바라보며/

소리쳐 부르면

이산가족 달려 나와/손짓 할 것 같은데/아무리 불러 봐도/대답이 없어요.

가칠봉 정상에 올라/산 아래 북녘 땅 바라보며/소리쳐 부르면

북한 친구 달려 나와/뛰어놀 것 같은데/아무리 불러 봐도/메아리만 대답해요. (중략)

 

1977년 6.25전쟁 47주년을 맞아 경찰청이 주관한 제 1회 전국 학생 백일장 아래 우리 마을”이란 작품이다. 양구의 어린 소녀의 시에서 우리민족의 참담하고 불행한 전쟁의 양상을 떠 올리고 인류 역사상 어디서도 전례가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성과 그 결과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 바닥에는 동판으로 “You want peace, remember war!!”, 즉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문구가 새삼 가슴깊이 와 닿는다.

이번에 답사한 양구 지역은 우리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6.25전쟁 시 군사 요충지로 격전의 현장이었다. 6.25전쟁이 만 1년을 경과한 시점(1951년 7월)에서 펼쳐진 양구지역 전투는 전쟁 당사국과 지원 강대국들의 지루한 협상과 치열한 고지전의 공방속에서 피아 장병들의 막대한 희생과국토의 파괴 등 목적과 결과에 비해 과정상 너무나 큰 희생을 낳았고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던 전투이었다. 이 땅에 그러한 전쟁의 참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68년전 이곳 양구에서 있었던 치열했던 전투를 회고해 본다.

1951년 양구 전선

전쟁의 피로감은 고조되고

1951년 4월 지평리 전투를 기점으로 6.25 한국전쟁은 양상은 전면전에서 휴전을 염두에 둔 국지전, 고지전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양구와 철원지역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직결된 곳으로 1953년 7월 27일 협상이 종료 될 때까지 쌍방이 협상 주도권과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행해진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쟁 2년차인 1951년 6월의 전황은 피아간 극심한 피해로 전쟁의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각자의 정치상황에 따른 대안, 즉 휴전에 관한 논의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 5차 공세의 실패로 인한 10만의 병력의 손실과 소련이 약속한 60개 사단규모의 전투장비 및 전쟁물자 지원이 지연됨으로 1주일 이상의 전투를 수행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북한은 더 이상의 폭격 목표물이 없을 정로 철저히 파괴되어 김일성 체제 유지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7만 8,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힘에 의한 승리는 힘들다는 결론과 압록강을 넘어 중국과 확전, 궁극적으로 대치하게 될 소련과의 마찰로 야기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중공군의 인해(人海)전술과 미국의 화해(火海)전술은 현대전의 전술로는 너무나 무식하고 비인간적 살상의 형태였다.

억지와 이기적인 지루한 휴전 협상

미국과 중국의 소비적 전투로 힘이 약화되기를 내심 희망한 소련은 공산 3국(소련, 중국, 북한)의 대표 격으로 1951년 6월23일 소련 유엔 대표 말리크가 휴전 제의를 발표하고 1주일 후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정식 제안하고 중국의 팽더화이(彭德懷)와 북한의 김일성에게 수락함으로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은 처음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어 7월 26일에는 의제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후 일차적인 어려움은 양군의 경계선의 책정문제였다. 이미 38도선을 넘어서 진출하고 있던 미국은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공산측은 38도선의 원상회복을 고집함과 동시 한반도로부터 외국군(특히 미군)의 철수를 고수하여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8월 22일에 공산측이 회담의 중단성명을 냄으로써 회담은 정지되었다. 회담은 시작은 순탄해 보였으나 설전(舌戰)이 혈전(血戰)으로 이어지며 2년 간 죽음의 시간이 흘러갔다.

– 19517월 전선(戰線)의 난기류

여전히 전투는 미국과 중국의 주도로 치러지고 있었지만 국군의 경우 군 체제의 정비와 훈련으로 점차 일선 전투부대의 역할이 커졌다. 미군은 여전히 막강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전장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지상전투에서는 기계화 부대의 기동능력을 극대화해 나갔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하자 휴전과 정전을 염두에 둔 전략이 구사되어 무리한 남하, 북진의 완승개념의 전투가 아닌 휴전 또는 전쟁 재발 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 즉 전면전에서 고지전, 산악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전투의 양상이 바뀌면서 공중폭격이나 첨단병기의 운용이 제한적이었고 재래식 무기와 병력이 우선되는 뺏고 빼앗기는 살상의 소모전이 지속되었고 승자도 패자로 가릴 수 없는 혼돈의 시간에서 참전국의 정치적 입장은 어떤 목적이던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든 방향으로 기울어져 미국과 중국은 휴전협상의 조급증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7월 이후의 전투들에서 치열했던 전투상황 속에서 전쟁 영웅담들이 전쟁으로 야기된 비극적인 모습과 처절함이 전적비와 추모비에 새겨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서글픔에 가슴을 여민다.

양구지역 9대 전투

양구 전쟁기념관에는 야외에 9개의 기둥에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양구에서 일어난 전투 양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투명 기간(1951년) 참전 부대
도솔산 전투 6.4–6.20 미 해병 제1사단 외. 국군 해병 1연대
대우산 전투 7.8 -7.31 미 제 2사단. 네델란드 대대. 국군 해병
피의능선 전투 8.18-9.5 미 제10군단. 미 제2사단. 국군 3,5,7,8사단
백석산 전투 8.18-10.28 국군 제7,8사단. 미 제96야전 포병대대
펀치볼 전투 8.31-9.20 미 해병 1사단, 국군 제 1 해병연대
가칠봉 전투 9.4 -10.14 국군 제 5사단
단장의 능선 전투 9.13-10.13 미 제 10군단, 제 2사단. 프랑스/네델란드 대대
949고지 전투 11.17-11.18 국군 제6사단, 제 8사단
X마스 고지 전투 12.25-12.28 국군 제 7사단

당시 양구지역은 6개월 동안 사상최대의 폭격이 가해지고 피해규모도 엄청나 피아간에 사상자가 아군은 전사 2,797명, 부상 외 13,801명, 적군은 전사 25,422명, 포로 2,015명이 발생하였다.

산하(山河)를 붉게 물든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는 중공군 6차 공세(2차 춘계 공세)의 하반기에 해당한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1951년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한 유엔군은 향후 전황을 전쟁 이전상태로 회귀해 휴전으로 종결하고 최종 목표인 통일국가는 유엔 기구를 통해 계속 추구하기로 내부방침을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의 1차 저지선을 임진강-영천-화천저수지-양양으로 설정하고(서부전선에서는 38선에서 3-9km 정도, 동부전선에서는 16km 북쪽의 산과 고지를 연결하는 선) 이를 캔사스 선이라 명명했다. 예상보다 쉽게 캔사스 선을 확보한 유엔군은 캔사스 선의 북방 10-20km 내에 방어선을 설치하여 최종 방어에 주력하게 되었는데 이 선이 유엔군이 주장한 휴전회담 당시의 군사접촉선으로 휴전선의 기초가 되었다.

양구지역 전투의 또 다른 특징은 공산군의 불성실한 회담(전황이 불리한 경우 갖은 핑계로 회담 불참, 중지)태도에 유엔군은 강력한 군사적 압력으로 그들을 회담장으로 불러낸다는 전략이었다. 피의 능선 전투를 비롯한 양구지역 전투는 당시 공산군의 동북부 주요 보급기지인 해안분지(亥安盆地)를 확보와 캔사스선 고수를 위한 전투로 휴전 초기 최대의 격전지로 손꼽히고 있다.

1951년 휴전회담 기간 중 북한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주요 고지대를 요새화하여 미군과 국군에게 큰 난제였다. “피의 능선”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수리봉 983 고지를 중심으로 940, 773 고지는 현재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 이 지역에 배치된 북한군 제 12 보병사단과 제 27 보병사단은 북쪽의 문등리 계곡과 사태리 계곡 일대, 아군의 후방지역인 인제 일대까지 관측하며 주저항선과 주보급로는 물론 화력지원과 병력 이동상황 등 모든 군사행동을 제어하고 있었다.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7일 아침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8월 25일 10여 일에 달하는 공격으로 능선을 점령했으나 다음날에 탈취당하고 말았다. 이때 한국군 제36연대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 뒤 미군은 제24사단의 4개 포병대대, 중형포 2개 대대, 1개의 105㎜ 대대 , 2개의 중박격포대대, 2개의 연대 전차중대, 그리고 중형 전차대대 1개 중대 등을 투입하여 피의 능선에 공격을 감행했다. 8월 27일, 940고지에 있던 미 제9연대 제2대대가 983고지를 공격하였고, 28일에는 제3대대가 동쪽에서 긴 능선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8월 30일에는 제1대대 및 제2대대가 북쪽 940고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능선 정상의 수백 미터 전방까지 진출했다가 적의 사격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후 9월 3일까지 제1대대는 포병 및 공중의 지원을 받으며 이 능선을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결국 견고히 구축된 적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러, 3주일 동안 지속된 한·미 양군의 공격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투 결과 북한군 제6 보병사단 13 보병연대, 제12 보병사단, 제27 보병사단은 1,250명이 사살되는 등 총 15,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해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한국군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와 미 제2 보병사단 역시 전사 326명, 부상 2,032명에 실종 414명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한·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하여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하였다. 하루 평균 3만-5만 여발, 총 42만 여발의 포탄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2천 여발의 대인지뢰가 터지는 가운데 수많은 장병들이 발목이 절단되는 부상자를 감수해가며 끝내 고지를 탈취하는 모습을 미국 기자가 ‘Bloody Ridge Line’이라는 제목으로 격전 상황을 보도하면서 ‘피의 능선’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국군 제21 보병사단 “백두산 부대”가 수비하고 있으며 당시 격전지에는 1980년 11월11일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기타 양구지역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솔산 전투

도솔산(해발 1,148)은 해안분지를 감제관측 할 수 있는 요충지로 미 8군으로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 제 5해병연대와 교대해 도솔산 탈환을 명령 받은 국군 제 1해병연대는 악전고투 끝에 야간기습으로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국군 해병대 5대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도솔산 전투로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의 휘호를 하사하고 해병대를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펀치볼 전투

“펀치볼을 공격해 공산군의 요충지를 탈취하고 아군의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확보 한다”는 전략은 휴전회담 이전에 세운 아군의 작전개념 이었다. 와이오밍선의 구축과 공산 측을 적극적으로 회담에 임하게 할 목적으로 행해진 이 작전에서 미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 제 1연대는 탈환 고지 명을 적개심 고취 차원에서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로 명명하여 북한군 제 3군단 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펀치 볼을 확보했다.

가칠봉 전투

펀치 볼 전투에서 전세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작전지역의 중앙인 가칠봉 일대에 국군 제 5사단을 투입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차후 작전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1,122고지(가칠봉 전방 500m)를 점령하기 위해 40일 동안 고지쟁탈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국군은 여섯 번의 쟁탈전을 거치며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하며 펀치볼 지역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

남으로 처져있던 주저항선을 정리하기 위하여 양구 북방의 931고지(일명 단장의 능선)를 1개월에 걸친 공격 끝에 점령한 전투이다. 미 2사단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단장의 능선을 공격했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잔여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전차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 부대로 적의 후방을 강타하면서 이 능선을 확보하였다.

양구지역 전적 비 방문을 마치며

아직 무언가 어색한 기운이 돌지만 오늘의 양구는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곳이다. 펀치 볼이 상표가 되어 펀치 볼 시래기가 특산품으로 팔리고 70년 전 피에 젖은 전쟁 상처가 상품이 되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미 제 2 보병사단 과 국군 제 5사단 36연대가 주축이 되어 피로서 지킨 현장에서 산화한 국군용사와 혈맹으로 이 나라를 지켜준 미군 장병들에게 감사의 묵념을 드린다. 굳건한 한미동맹만이 이 나라를 지켜왔고 또 지켜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깊어지는 여행이었다. 동행해 주신 협회 채연석 사무국장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한미우호협회가 한미동맹의 영원한 기축이 되기를 기원한다.

양구지구 9대 전투기념물
(양구 전쟁기념관)

도솔산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
(양구 전쟁기념관)

 

100세 인생 생활의 힌트 (12)

이성원
한국청소년도서재단이사장, 본 협회 부회장

방학이 되어 3세 손자들이 자주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옵니다. 중1, 중2, 고1들입니다. 우리 세대는 고맘때 6.25를 당했지요. 중4를 마치고 한 달도 안돼서였습니다. 80평생 가운데 전쟁 전 그 4년간의 중학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떠오릅니다. 그때 공부하던 옛날 얘기를 3세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중고 기초공부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단다.

중고 3세들에게

앞으로 모든 지식의 기계적 작업은 다 AI 인공지능이 가져간다. 그러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만은 끝까지 우리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중고 시절에 「영어」, 「수학」, 「독서」, 이 3가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

A. 수학공부 이야기:

수학은 숫자 공부를 넘어서 차분히 이치를 따지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훈련이다.
학원에서 가르치듯 정답만 빨리 내는 기계적 학습은 절대 안 된다. 사고력을 죽인단다.

1. 계산의 기본원리: “=” 등호 이야기:

“=”를 건너가면 (+)는 (-)가 되고, (x)는 (÷)가 된다. 이런 학원식 공부는 절대 하지마라.
“=”는 「좌변」과 「우변」이 똑같다는 기호다. 그러니,
양변에 똑같이 (+),(-),(x),(÷)를 해야 한다. 양변에서 똑같이 (+)를 빼주니까, 좌변에선 (+)가
없어지고, 우변에선 (-)가 생기는 것이다.
양변을 똑같이 (÷)를 해주니까, 좌변에선 (x)가 없어지고, 우변은 (÷)를 해주게 된다.

2. 응용문제 풀이: 우선 「답」을 “x”라 해놓고 생각해라.

(문제) 닭과 개가 합해서 5마리가 있다. 다리는 합해서 14개다. 몇 마리씩이냐?
(답) 먼저 닭은 x마리, 개는 y마리라 해놓고 생각하여라.
x+y=5마리…①
닭다리는 ‘2 x (x)’개, 개다리는 ‘4 x (y)’개다.
2x+4y=14개…②
풀면, 닭x=3마리, 개y=2마리가 된다.

3. 문제 만들기:
‘닭 4마리, 개 2마리’가 답이 되는 문제를 만들어 보아라.

B. 외국어공부 이야기

나의 경험 얘기다. 초등학교 때 배운 일본말로 그 후 계속 책을 읽은 덕분에 일생 일에도 써 먹고, 교양과 지식도 많이 얻었다. 영어는 중고 6년, 대학 4년, 10년 동안 공부했어도 책 한권 제대로 읽지 못한다. 외국어는 계속 읽지 않으면 결국 장식품에 그치고 만다.

한 가지 뜻밖에 덕을 본 것이 있다. 50이 넘어 「Word Power Made Easy」를 공부한 일이다. 유명 영어교수의 권유로 중2, 고1, 고3 세 아이들과 부모 다섯이서 공부를 했다. 단어공부는 물론, 독해력과 회화까지 놀랍게 향상되었다. 2년이 지나니 TIME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너희들도 고교, 대학시절에 이 책으로 공부해 봐라. 교과서 단어 8천개에 1만 단어가 추가되더구나. 미국 대학생 수준 실력이다.

C. 국어(독서)공부 이야기:

외국어를 아무리 잘해도 생각은 누구나 제나라 말로 하게 된다. 아는 낱말 수가 「사고」의 수준을 결정한다. 모르는 말로 생각을 할 수는 없으니까.
독서는 어려서부터의 청소년기 습관이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서양인들은 대개 책을 읽고 있다. 초중고 때 의무적으로 책을 읽게 한 것이 버릇이 된 것이다.

D. 나에겐 한 가지 한이 있다. 전쟁 중에 학창생활을 보낸 탓에 예술에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음악이나 미술 작품에 흥을 못 느낀다. 정서적 불구자가 된 셈이지. 학생 때 되도록 많은 예술작품을 접하도록 해라. 물론 문학작품도 매한가지다.

E. 끝으로, 학교 성적에 대한 자세다.

시험성적에 구애하지 말고 올바른 공부법을 따라야 한다. 느려도 괜찮으니 “하나하나 이치를 따져보고 생각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 시간과 함께 확고한 실력이 쌓이고 공부에 자신이 생긴다. 학기말 시험은 2주 정도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성적은 신경 쓰지 말아라. 평상시의 올바른 공부법이 차츰 내신 성적도 힘차게 밀어 올리고 대학 입시 때도 원하는 진로를 자유로 선택할 수 있게 만든다. 중고시절의 기초 공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