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운명을 지킨 명장 월턴 H 워커 대장

최상진
전 삼성물산 임원, 본 협회 편집위원

급박한 전황

1950년 6월25일 일요일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은 오랜만에 경회루에 낚시를 계획하고 있었고 미국의 투르먼 대통령은 주말을 맞아 고향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력팽창으로 또 다른 전쟁의 조짐을 보인 가운데 (구)쏘련은 유럽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중공)은 아시아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의 총구는 중국 공산당과 타이완(대만)과의 전쟁에서 터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남북한은 역시 분단의 갈등을 겪고 있지만 군대의 수준이나 모든 상황이 전쟁을 일으킬 상황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전쟁 준비는 철저하고 집요했다.

개전당시 피아 전력을 보면 북한군은 20여만 명의 병력과 소련에서 지원받은 당시에는 최고 성능의 T-34 전차 242대, 구경이 큰 야포 172문, 야크전투기(YAK)를 포함한 211대의 항공기와 대소함정 100척 이상이었다. 여기에는 전술한 중공군에서 편입된 조선인 편성 4개 전투사단이 포함되었으며 이 전투사단들은 낙동강 선까지의 공격 전투에서 주력부대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 국군은 10만여 명의 병력이 소구경 야포로 무장하였으며, 탱크와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으며 특히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대전차 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국군에는 대부대 전투경험이 있는 부대가 하나도 없었으며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대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치명적인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다.

준비된 침공자와 준비되지 못한 자의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남침 6시간 후, 이 대통령이 보고 받은 시점인 10시 경에는 T-34 전차부대가 파죽지세로 의정부와 문산을 축선으로 서울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기고 이 대통령은 대전-목포-부산을 거쳐 7월 8일 대구에 임시 경무대를 설치하게 된다. 전황은 급속도로 나빠져 7월1일 미 8군 제 24사단 제 21연대가 주축이 된 스미스 특임부대(Task Force Smith)가 부산에 도착 7월4일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의 첫 교전을 벌렸으나 큰 희생을 내고 패배 하였으며, 이어 34연대가 경전차 부대와 19연대까지 투입된 금강 전투에서도 사정없이 패배하여 12일에는 금강너머로 후퇴해 있었다. 한국군 또한 뚜렷한 미군과의 연계도 없이 지리멸렬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워커장군이 초대 주한 8군사령관 겸 지상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튿날 대한민국 정부는 7월14일 “전쟁이 끝날 때 까지”의 단서조항으로 한국군 군사 작전권을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한다. 전선을 시찰한 워커 사령관은 모든 전략전술을 공세에서 사수, 지연 전략으로 바꾸고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방어선(Walker Line)을 구축한다. 8월5일 상황은 영덕, 포항, 대구, 진주를 잇는 600리 역기역자 형태의 전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그의 역할은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정상적 전투를 치를 수 있을 때까지 전장을 사수하고 최소한 지원군이 교두보를 설치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7월29일)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제 25보병 사단을 방문해 전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로 침울한 군대를 독려한다.

“우리에게는 덩케르크(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철수작전을 한 곳)도, 바탄(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철수한 곳)도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유례없는 대참극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 팀으로 싸운다. 물러서는 자는 전우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모든 장병들은 우리가 방어선을 지켜낼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Stand or die.”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I will stay here to protect Korea until my stay)” 그는 임전무퇴, 살신성인의 군인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이렇게 약 45일간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미군은 T34를 파괴할 수 있는 3.5인치 바주카포와 M4A3셔만 탱크가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대구의 8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항공지원 및 함포지원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어 9․15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9월18일 서울을 수복하였다.

워커 사령관 그는 누구인가?

월튼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 ~ 1950년 12월 23일)는 워커는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의 벨턴(Belton)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뉴욕 웨스트포인트의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한 계기로 장군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905년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입학, 브랜든 육사준비학교를 마친 후 1908년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2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시 제 5 보병사단 기관총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계기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때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조지 패튼이 지휘하던 제3야전군 산하의 20군단장으로 참전하였는데 빠른 기동성과 활약으로 그의 부대는 “유령 군단” 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프리카에서 롬멜 장군의 전차부대를 격파한 뒤 중장으로 승진한 월튼 워커장군은 1948년 9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전세가 어려워지자 곧바로 대구에 미 8군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7월 13일, 초대 주한 미 8군사령관 겸 지상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녀의 난중일기라고 일컫는 “Mrs. Rhee’s Diary”에서 “워커 장군은 앉은키와 선키가 거의 비슷해 보였으나 벌어진 가슴과 불독같이 생긴 깊이 패인 주름의 강인한 인상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라고 회고 하였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전선을 누비며 상황을 파악하고 소신을 분명히 하는 덕장이요 용장이라고 일컬어 졌는데 6․25 참전용사이자 역사저술가인 페렌바크(T. R. Fehrenbach)는 『한국전쟁』에서 “워커 장군의 용맹하고 솔직하면서도 고집이 센 성품이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3. 비운의 초대 8군 사령관 워커대장

워커 장군은 과거 유령부대의 사령관답게 쉬지 않고 전선을 누벼 평양 탈환이후 중공군의 3차 공격 시 까지 왕성한 활약으로 전장을 이끌어 갔고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시로 전황을 전달하고 긍정적 조언을 함으로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1950년 12월 23일 10시, 워커장군은 미 24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방문하고 아들인 샘 S.워크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기 위해 가던 중 의정부(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596-5자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가 타고 있던 지휘관 지프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보병 6사단 2연대 소속 한국군 스리쿼터 차량과 충돌하여 전복, 야전병원으로 긴급후송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다. 워커 장군의 유해는 미군 역사상 최초로 곧바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이때 맥아더 장군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귀국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이때 샘 심즈 워커 대위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 부대원들을 두고 혼자 만 떠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나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2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사후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워커 사령관의 애석한 사고사는 불법 남침한 북한을 좀 더 강하게 응징할 수 있는 장군을 잃었다는 것과 우리 병사의 부주의한 과실로 전쟁의 영웅이 순직하였다는 사실에 더욱 죄송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더하다. 아들 샘 워커는 1977년 미군 역사상 최연소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미 육군사상 처음으로 부자가 4성 장군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군인 전사자 기준 세계 7대 전쟁으로 간주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장성 아들들은 모두 142명인데 그 중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리지웨이 장군의 뒤를 이은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벤플리트 2세는 전투기 조종사(중위)로 출격하여 실종되었고, 제3대 UN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육군대위는 세 번이나 부상당하여 제대한 후 사망한 가슴 아픈 기록이 있다.

월턴 워커 사령관의 기념비를 찾아서

워커 장군은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하게 알려진 이름이다.

1963년 주한 미군 휴양지로 지금의 광진구에 건립된 위락시설이 워커장군의 이름을 따 워커힐로 명명되었고, 대구의 캠프 워커나 직접적인 관계는 불명확하나 군인들의 군화를 워커화로 불리는 등 우리가 많이 접하는 이름이 되었다.

워커힐 호텔 입구 작은 동산에 1987년 10월5일 한미친선 군민협의회가 건립한 워커장군 기념비가 30여년의 풍상을 견디며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한미동맹친선회가 용산 미군기지의 구 미8군사령부 영내에 건립한 워커장군 동상은 주한미군의 평택시대의 개막에 즈음하여 2017년 4월25일 평택 캠프험프리스로 이전되었다. 또한 워커장군 추모 기념사업회 김리진 회장은 40년간 사비를 드려 워커장군 전사지를 찾아 표지석을 설치하고 매년 추모제를 드리고 있다.

워커 장군은 2012년 12월 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6·25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 6월에는 부산의 유엔 평화 기념관 주관으로 워커장군 특별 인물전이 1년 동안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닌 명예로운 전쟁으로 회자되는 요즘 이 시기에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핵무장으로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북한의 헛된 망상을 버리게 해야 할 것이다.

워커힐 호텔에 위치한 워커장군 기념비

험프리 기지로 이전한 워커장군 동상앞에서

 

100세 인생 생활의 힌트 (11)

이성원
한국청소년도서재단 이사장
본 협회 부회장, 편집위원

동호인 끼리 한 달에 한번 「몽테뉴수상록」 교실을 엽니다. 지난달엔 “대화”에 대한 장을 공부하였습니다. 2세들에게 전해줄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2세들에게

지금은 「대화」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만인에 개방된 ‘소통의 장’이 되었다.
16세기 몽테뉴 시절엔 대화는 소수의 지식계급 귀족간의 ‘토론의 장’이었다. 테마도 달랐다.
지금의 대화론은 비즈니스를 위한 「교제술」의 테크니크 얘기지만, 몽테뉴 때는 「인생철학」을 논의하는 ‘지적 광장’의 자리였다.

사회적 성공에 지능지수 IQ가 7%를 받치고, 감정지수 EQ가 93%를 받친다 한다. 「지적 대화」의 대가가 몽테뉴라면, 「교제술」의 대가는 데일 카네기가 아닌가 싶다.

■ 몽테뉴의 대화론:
철학 논쟁으로서의 대화론이다.
논쟁은 승부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프로세스다.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견에 대해서는 감정 개입 없이 토론하고,
비판에 대해서는 내 오류가 확인되면 지체 없이 “흔쾌히” 인정하여야 한다.
논쟁의 모든 절차는 ‘진리’ 앞에서는 무조건 항복한다는 마음가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 카네기의 대화론:
교제술로서의 대화다.
핵심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성경의 황금률이고,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는 것은 논어의 황금률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수준급 인물’로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
상대방 의견에 경의를 표하고, 얘기를 경청하고, 상대방의 관심사에 공감을 표시하라는 것이다.
(원저 “How to Win Friends & Influence People” 번역본 「인간관계론」)

카네기의 논저에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부부간 대화」편이 있다.

■ 부부간 대화론:
인생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대화는 부부간 대화다. 100세 인생에선 더욱 그렇다.

“부부간 대화”의 7가지 비결:

i. 잔소리를 하지말자
ⅱ. 장점을 알아주자
ⅲ. 흠잡기를 말자
ⅳ. 칭찬을 하자
ⅴ. 작은 정표 프레젠트를 잊지 말자
ⅵ. 부부간에도 예의를 지키자
ⅶ. 바른 성지식을 갖자

부록1. 남편의 7가지 체크포인트:

①기념일 선물, 즐거운 깜짝쇼 벌리기

②남 앞에서 잔소리 않기

③피로해 신경 곤두선 아내 위로하기

④어머니나 남의 부인 살림살이 비교 않기

⑤아내 활동에 깊은 관심 표하기

⑥아내를 거리낌 없이 칭찬하기

⑦나를 위해 한 일에 감사 표하기

 

부록2. 아내의 7가지 체크포인트:

①남편의 바깥일에 비평 안하기

②가정을 재미있고 즐겁게 최대 노력

③남편을 기쁘게 할 상차림 연구

④시어머니, 시누이와 사이좋게 지내기

⑤옷차림을 남편 취미에 맞추기

⑥이견 불구 가정의 원만 위해 타협하기

⑦남편과 대화 나눌 교양 쌓기

 

대화가 감정지수의 중심을 차지하고, 감정지수가 사회적 성공과 가정의 행복에 93%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처럼 살아요

지은경

 

우리 물처럼 살아요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물처럼 살아요

황무지도 옥토로 만들어 주는

물은 생명의 젖줄이에요

 

우리 너무 오래 끊어진 물이었어요

옹졸한 마음이 절벽을 만들어 외로웠어요

이제부터라도 한발짝 한발짝 다가가

천길 낭떠러지 두려워 않는 물의 용기로 살아요

높고 낮음이 없는 물은 평등의 어머니예요

실천을 보여주는 물은 열정의 아버지예요

물줄기들은 치열한 논쟁을 하다가도 서로서로

안아주며 격려하는 그런 물처럼 살아요

 

하나로 모여 더 큰 하나가 된 물은

바다에서 통일의 노래를 합창해요

오! 드디어 천지를 물들이는 장엄한 아침이 와요

우리 매일매일 해를 낳는 저 물처럼 살아요

 

  • 약력
    시인 ․ 평론가 ․ 문학박사. 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한국비평가협회 이사, 아태문인협회 명예이사장, 한국신문예문학회 명예회장, 월간신문예 발행인.
    2004년 황진이문학상대상 ․ 2017년 국회사무총장상 외 다수,
    시집『숲의 침묵 읽기』등 12권, 평론집『의식의 흐름과 그 모순의 해법』칼럼집『알고 계십니까』외 저서 30여권.

6.25전쟁 69주년에 보는‘기로에 선 한미동맹’
– 한미동맹을 통한 강력한 대북 제재만이 비핵화 이끌 유일 수단이자 대안 –

서 옥 식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전 한국언론재단 상임이사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분연히 나섰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전쟁 1950-1953년”(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Korean War 1950-1953)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전몰용사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의 한국전 참전비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참전비에는 사망, 실종, 포로 및 부상자의 수효를 미군, 그리고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을 구분해 아래와 같이 명확히 적어놓았다.

구 분 Dead

(사망)

Missing

(실종)

Captured

(포로)

Wounded

(부상)

U.S.A. 54,246 8,177 7,140 103,284
U.N. 628,833 470,267 92,970 1,064,453

또한 공원 벽면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많은 한국 관광객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지만 ‘영원한 불꽃’(eternal flame)이 타오르고 있는 고(故) 케네디 대통령 묘소만 대부분 참배할 뿐 한국전 참전비를 둘러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이제 6.25전쟁 69돌을 맞는다. 금년은 또한 1953년 휴전과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출범한 한미동맹 66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9월 8일 2차대전에서 승리한 맥아더장군 휘하의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에 상륙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한미동맹의 핵심인 주한미군의 역사는 74년에 달한다. 국제정치상 하나의 동맹이 70년 이상 존속하면서 동맹국 군대가 상대방의 영토에 주둔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점에서 한미동맹은 세계 동맹사상 가장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3자가 공조해 공산주의 영향력을 동북아에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남침전쟁이자 자유‧공산 양대 세력의 국제전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은 우리의 핵심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야 한다는 한국민과 미국 등 자유세계 국가들의 결의와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25전쟁은 호국전쟁이자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체제수호전쟁이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남북한을 통틀어 5백여만의 사상자와 1천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다. 그 경제적 손실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대한민국은 가히 계수로 판단하기 어려운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미군은 1950년 7월 4일 스미스 대대가 참전하면서부터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간 연인원 175만 명의 장병이 참전, 5만 4천 246명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10만 3천 284명이 부상했으며, 아직도 8천여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다시는 이러한 식의 전쟁은 치르지 않겠다는 뜻의 ‘Never again Korea’를 토로했으며 휴전 후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달래기 위해 한국전을 아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까지 불렀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남북한은 지금도 전쟁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있는 상황 즉, ‘기술적으로 전쟁상태(technically at a state of war)’에 있다.

유엔은 6.25전쟁에 대해 안보리 결의를 통해 ‘내전(civil war/internal war)’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북한군에 의한 대한민국 무력공격(the armed attack on the Republic of Korea by forces from North Korea)’, ‘평화 파괴 행위(a breach of the peace)’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감상적인 민족공조’를 표방하는 우리 사회의 종북좌파 진영에서는 6.25전쟁을 ‘내전’, ‘조국해방전쟁’,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간의 통일전쟁’ 운운(云云)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킨 세력을 민족반역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린 우방국들을 내전에 개입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날뛰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종북좌파세력이 외치는 반미의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맥아더 장군에 대한 증오가 서려있다. 맥아더가 38선 분단의 집달리였으며 6.25전쟁에 개입함으로써 김일성으로의 통일을 방해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 동상 방화파과기도사건이 거의 연례행사처럼 일어나고 있으며, 서울 광화문광장의 미대사관 부근에서는 ‘주한미군 물러가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가운 데 거의 매일 반미 집회가 열리고 있다. 종북좌파세력들은 맥아더를 ‘침략과 학살의 원흉’,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쟁 미치광이’, ‘민족의 철천지원수’, ‘분단 고착의 근원’이며 주한미군을 ‘침략-전쟁-살육-약탈’을 감행한 ‘만악의 근원’ 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반미투쟁이 미국의 군사적 강점(强占)과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의 자주권 쟁취를 위한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북한의 남침 억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확산 방지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는 한미동맹이 지금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과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 및 시각차가 주원인이다. 현재 한미동맹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들었다는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미동맹이 위기에 놓인 본질적인 이유는 한미간에 공통의 적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한미간의 인식차가 한미동맹을 삐걱이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1980년대 소위 3김(金) 시대를 거치면서 ‘반제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NLPD)’에서 연원(淵源)한 ‘왜곡된 민주화’ 격랑 속에 미제(美帝) 점령 지배하에 있는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론과 해방신학 등의 영향으로 ‘반미기운’이 극대화 되는 계기를 맞았다. 더구나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못하다”고 한 김영삼의 얼치기 민족주의, 미전향장기수를 ‘통일운동가’라 칭송하면서 무더기로 북송해준 김대중과 “반미면 어떠냐?”며 노골적인 반미성향을 드러낸 노무현이 이석기를 포함한 간첩 및 국가보안법위반 반역세력을 3천 538명이나 대거 석방, 사면복권 시켜줌으로서 우리 사회를 벌겋게 물들게 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반미는 단순한 반미를 넘어 미국에 대한 적개심 그 자체였다. 예컨대 ▴용산 미군기지는 침략의 상징이다(2004년 3월 1일 제85주년 삼일절 기념사)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다. 한반도 문제를 가로막 있는 제일 큰 문제는 제국주의 미국이며 남한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더니 평화를 해롭게 할 국가 1순위는 미국으로 나왔다. 나는 북한의 대변인, 변호인이었다(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가진 남북정상회담)▴아시아의 최대 안보위협 국가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2007년 11월 7일 청와대를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에게 한 말) ▴북핵 제거를 위한 미국의 대북군사행동에 반대한다(2006년 8월 18일 청와대 발언) ▴남북대화 시대에 한미동맹 강조하는 것 좋지 않다.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공조 체제는 실용주의가 아니다. 미국 주도의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와 MD(미사일방어)시스템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은 좋은 전략 아니다. 북한을 생각해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하면 안 된다(2008년 10월 1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개최된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 학술회의’ 격려사) ▴핵문제 해결방안으로 유엔을 통한 대북제재에 반대한다(2003년 1월 30일 당선자 자격으로 일본 NHK-TV와 가진 회견) ▴북한이 6자회담에서 핵물질을 신고하기로 하면서 미국측에 무기화된 정형(定形)만큼은 신고안하기로 한 것은 현명하고 잘한 일이다(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가진 남북정상회담)는 그의 발언들은 대통령 스스로 한미동맹을 균열시키는 언행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현 문재인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보시절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를 의미하는 남북 연방제(또는 연합제)의 조기 실시를 주장하고 북한이 주적이 아니라면서 사드(THAAD)배치 반대를 외쳤던 문 대통령은 2017년 9월 21일 제72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6.25를 내전으로 언급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유엔이 공산화 패망직전의 한국을 살린 데 감사하기는 커녕 괜히 한국의 집안싸움에 개입해 피해만 커지고 전쟁도 길어졌으며 결과적으로 통일이 되지않았다는 국내 좌파세력과 북한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또 “북한은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했다”(2018년 9월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 연설)고 말해 한미동맹에 엇박자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한미간에는 전시 작작권 이양, 방위비 분담금 증액, 무역 불균형 시정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가장 시급한 현안 1순위는 역시 북한 비핵화다.

북한은 금년 들어서만도 김정은의 신년사(1월 1일), 하노이 미북정상회담(2월 27-28일),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4월 12일)에서 미국 등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는 커녕 이보다 한 단계 낮은 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최종적이고 충분히 검증된 비핵화)라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정은은 특히 신년사에서 기존 보유핵은 그대로 둔 채 향후 핵무기 제조‧시험‧전파‧사용은 하지않겠다는 소위 ‘4불(不)’ 입장을 천명함으써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대내외에 선언하고 앞으로 핵동결과 함께 미국과 동등한 핵보유국 지위에서 1대1 군축회담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의 이같은 신년사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정은은 4.27 판문점 남북공동선언과 6.12 싱가포르 미북공동선언, 9.19 평양 남북공동선언에서 ‘북한 비핵화’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일관되게 ‘한반도의 비핵화’만을 강조했다.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의 비핵화’란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유사시 미국 핵전략자산의 한반도로의 이동 금지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미국 핵우산 제공 금지는 물론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와 연결되는 개념이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말 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 우리민족끼리, 메아리 등 관영매체를 총동원해 판문점선언 싱가포르선언 평양선언 어느 구절에 눈을 씻고 봐도 ‘한반도의 비핵화’란 말만 있지 ‘북한비핵화’란 말은 없다며 보유핵 폐기 의사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고 한국과 미국을 조롱까지 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적극 지지한다며 이것이 국제사회가 말하는 CVID와 다르지 않은 개념이란 ‘엉뚱한’ 해석을 내려왔다.

문재인 정부가 중재안으로 내놓은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이란 해리 해리스(Harry Harris) 주한 미 대사의 지적처럼 개념이 불분명하고 모호하단 지적이 있지만 일단 미‧북이 ‘포괄적 비핵화’ 방안에 합의한 뒤 북한이 영변핵시설과 일부 핵심시설을 폐기하면 미국도 그에 상응하는 제재 완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굿 이너프 딜’은 그의 ‘조기 수확론(early harvest)’과 함께 이제 설 자리가 없게 됐다. 이러한 중재안은 북한이 그동안 고집해 온 것과 유사한 것으로서 북의 단계적 ‘행동 대 행동’ 방식이다. 이 ‘행동 대 행동’ 방식은 과거 부시, 오바마 대통령 시절 수차례나 미‧북 간에 합의됐던 것으로 북의 핵개발을 위한 자금과 시간만 벌어준 결과밖에 안됐다. 그래서 트럼프는 과거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겠다며 문 대통령의 단계적 ‘행동 대 행동’ 방식에 제동을 건 것이다.

1994년 미북 제네바 핵합의의 주역이었던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2016년 사망)은 2006년 11월 22일 베이징에서 미국 등의 핵개발 프로그램 폐기 요구에 대한 북한 측 입장이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핵을 어떻게 포기합니까…포기하려고 핵을 만들어 놓았나요”라고 반문하며 다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북한이 핵 포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말이다. 실제 핵실험을 한 나라 중 역사적으로 핵을 포기한 경우는 하나도 없다.

북한의 핵무기는 크게 체제수호와 대남적화통일용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시나리오는 ①핵이 없어도 될 만큼 체제와 정권의 안전 및 경제적 급부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동시에 북한이 바라는 적화통일이 달성(통일전선전략의 대성공으로) 되는 경우, ②핵보유가 체제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국제사회의 제재‧압박으로 오히려 체제붕괴 위협을 받는 경우, ③북한 내부 문제로 체제나 지도부가 바뀌는 경우로 국한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는 핵포기로 얻을 수 있는 국가적 이익이 훨씬 클 때이다.

하지만 체제보장이란 수령독재와 인권탄압 실상이 지속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더구나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문제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것은 북한 내부의 문제이고 북한 인민과 정권간의 문제다. 만약 북한 내부에 민주화가 진행되어 인민들이 일어나 “김정은 정권은 안된다”며 저항할 때는 국제사회 어느 나라도 그러한 인민들의 저항을 도외시하고 김정은 정권을 지지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권이나 체제는 외부에서 보장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북핵에 대응하는 길은 ①전쟁의 위협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북핵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서든지, ②미국의 핵우산에 다시 의존하던지, ③아니면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스스로 핵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북(對北) 견제수단으로 거론되는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나 독자적 핵무장은 둘 다 가능성이 어려운 이야기다. 전술핵 재배치는 한국과 미국내 정치상황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간의 전술핵 폐기협상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 독자적인 핵무장을 한다면 북한이 지난 30여년간 겪은 국제사회의 제재 과정을 똑같이 겪어야 하는데, 우리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선 상상도 못 한다.

결국 자체적인 핵개발도, 유사시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폐기하도록 하거나 북핵 아래서 굴종적인 노예생활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가 해외 유력 언론의 지적처럼 세계 가는 곳마다 대북 제재완화를 호소하고 다니는 등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 역할만 한다면 북한 비핵화는 요원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 스스로 그들의 핵보유가 생존과 체제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주지, 각성시켜야한다. 옛 소련은 냉전시절 1만 6천기의 핵무기를 보유했지만 체제수호에 실패, 스스로 몰락의 길을 맞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강력한 대북제재 등 국제공조 외에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다. 대북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유일한 수단이라면 우리가 희망을 품을 소지는 아직 남아있다.

<안보전문가 4인 공동칼럼>
무책임한 ‘평화팔이’가 전쟁을 부른다

맹목적 평화 주장이 오히려 전쟁 유발
북한은 철저한 기회주의 국가미군 개입의지 약화 추세
평화팔이 인사들을 보면서 김정은 무슨 생각을 할까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본 협회편집위원장) /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장 / 신원식 전 합참 작전본부장

(주기) 본 글은 현재의 한국은 심각한 안보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18년 6월에 모임을 결성한 위 4인 안보전문가들이 지난 5월 24일 인터넷 신문인 ‘데일리안’에 공동으로 기고하여 게재된 글을 이분들의 협의를 거쳐 본 협회지에 다시 게재한 글이다.

어느 집에서 금덩이를 마당에 쌓아 놓은 채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지키는 사람도 없다고 하자. 지나가던 사람이 훔치고 싶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6.25 전쟁을 반성 차원에서 회고해 볼 때 우리 선조들의 안일한 안보의식 및 불실한 전쟁대비가 침략을 유발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고사에 정(鄭)나라 이야기가 있다. 이 나라는 이웃 국가를 공격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공주를 시집보내어 관계를 개선하고 공격하자는 의견을 낸 신하를 처형하면서까지 상대의 경계심을 낮춘 후 상대의 방심을 확인하자 곧 바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여러분이 적화통일의 선대유훈을 물려받은 상태에서 핵무기까지 보유한 채 경계심은 전혀 갖고 있지 않는 남한을 바라보면 공격하여 탈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맹목적 평화 주장이 오히려 전쟁 유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정치학 교수 스타인(Arthur Stein)은 침략을 호시탐탐 노리는 국가를 ‘기회주의 국가(opportunist)’로 명명하면서 이 국가는 다른 국가가 협력적이라고 판단될 때, 즉 상대가 전쟁보다는 협상을 선호한다고 생각할 때 공격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독일의 경우 1938년 뮌헨조약을 통하여 영국이 평화에 집착한다는 것을 파악하자 이듬해에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도 기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남한의 태세와 대응 의지가 미흡한 것을 알고 도발한 것이고,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던 사태도 케네디 행정부가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개인의 경우에도 나의 유순함이 못된 친구를 오판하게 만들어 싸움을 초래하듯 평화 애호국일수록 단호하지 못하여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의 침략 의도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독일이 전쟁을 시작했을까? 남한이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어서 엄청난 피해를 각오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면 북한이 6.25 전쟁을 자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현재 한국에는 막연한 평화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북핵에 철저히 대비하자고 하면 그들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면서 남북관계 개선, 군비의 축소, 평화구호만을 강조한다. 스타인 교수의 분석처럼 북한은 공격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할 것이고, 어느 순간 나쁜 결정을 할지도 모른다. 남한 지도자들의 안일과 남한군의 불비가 오히려 전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하라.” 로마시대의 격언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철저한 기회주의 국가

일부 좌파인사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자신들의 체제보전을 위한 수세적인 목적이라고 대변하고, 북한도 남북한의 평화를 바라기에 대화를 통해 평화공존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한이 선의로 대하면 북한도 결국은 선의로 보답할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념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려는 공산주의의 속성이나 지금까지 북한이 남한에 대하여 끊임없이 가해온 도발의 역사를 고려할 때 북한은 철저한 기회주의 국가로서, 1950년에 6.25 전쟁을 통해 남한을 군사력으로 점령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기회를 탐색하고있는 중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좌파 인사들이 모르는지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지는 모르지만, 북은 적화통일 야욕을 버린 적이 없다. 이것은 상식이다. 김정은은 2018년 8월 25일 서해에서 훈련을 참관한 후 “인민군대는 서울을 단숨에 타고 앉으며 남반부를 평정할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김정은은 한국에 정말로 핵을 쓸 수 있다…2013년 채택한 핵·경제 병진노선은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한국이라는 실체 자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한국군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맥매스터(H.R. McMaster) 중장은 2019년 5월 5일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목적은 한미동맹을 파괴해 무력으로 남북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2010년 개정된 노동당 규약 서문을 통하여 “조선노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김일성이 1965년을 남침 시점으로 잡고 1962년부터 준비했으며, 1975년 4월 중국을 방문하여 남침문제를 협의했다는 주장도 있다. 6.25 전쟁 때도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과 깊게 상의했던 핵심내용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과 남한의 저항 수준이었다. 지금도 이 두 요소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전쟁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북한이 아니겠는가?

미군 개입의지 약화 추세

미국은 핵우산(nuclear umbrella)을 포함하여 유사시 한국을 확실하게 방어해 주겠다고 말로는 약속하고 있지만, 말과 실천은 다를 수밖에 없고, 자신이 위협받으면서까지 한국을 방어해줄 것인지를 불확실하다. 북한은 2016년과 2017년 동안에 ‘화성-12형’ ‘화성-14’형의 미사일을 수차례 시험 발사하여 괌, 알래스카(평양으로부터 6,000km), 하와이(7,300km)에 대한 공격능력을 과시하였고, 2017년 11월 29일 ‘화성-15형’을 발사함으로써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했다. 북한이 자신의 초토화를 각오하면서까지 미국의 1-2개 도시를 핵무기로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면 미국의 핵우산을 이행되지 않을 것이고, 김정은이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와 문재인 정부 간의 신뢰가 높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은 더욱 높다.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는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의 핵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위에 항상 놓여있다”며 미국을 위협함으로써 그의 핵무기 개발 의도가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임을 분명히 노출했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 미국은 선제타격을 포함하는 공세적 수단을 적극 거론했지만,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이후에는 경제제재와 압박만 거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최악의 경우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 위협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최근 이란에 대해서는 군사적 행동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피력하는 이유 중에는 이란이 아직 핵보유국이 아니라는 사실도 포함될 것이다. 1970년대 미국의 베트남 철수를 주도했던 키신저(Henry Kissinger) 전 국무장관이 주한미군 철수를 북한 비핵화를 위한 카드로 사용할 것을 주문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탄이나 잠수함발사 탄도탄 등으로 미 본토에 대한 더욱 확실한 핵공격 능력을 구비할 경우 북한은 미국의 개입이 불가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미국의 불개입을 담보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국의 대응태세는 침략을 유도하는 수준

북한의 입장에서 한국을 보면 공격하면 바로 승리할 것으로 판단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답답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북핵 포기를 끌어낼 수 있다면서 핵사용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 이전 정부는 핵대비 차원에서 선제타격, 미사일방어, 재래식 응징보복 등으로 구성되는 “3축 체계”를 구축해왔지만, 문재인 정부는 평화주의 정책을 앞세우고 기존 안보역량들을 파괴 또는 불능화시키고 있다. 적지 않은 국민도 이미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고 있고, “백두칭송위원회” “위인맞이 환영단” 등이 결성되는 것에서 보듯 김정은을 적의 수장으로 보지 않고 있다. 기회주의로 호시탐탐 호기를 노리고 있는 북한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이 침략의 호기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2018년 9월 19일 체결한 남북군사분야합의로 북한은 기습공격의 성공에 필요한 요건을 구비했다. 남한의 감시초소는 줄었고, 군사분계선 10-40km에서 항공기, 헬기, 무인기의 운항이 금지됨으로써 남한의 감시·정찰은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해상에서의 즉각대응 태세도 약화되었다. 철원 근처의 비무장지대의 지뢰가 제거되었고 폭 12m의 도로도 연결되었다. 북한은 김포반도에서도 도하(渡河)에 필요한 정보도 확보했다. 북한의 주된 공격로가 모두 개방되어 있는 셈이다. 대문을 활짝 열고 있는 남한에게 기습전격전을 결행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 않겠는가?

한국에는 아직 주한미군이 있고 한미동맹도 유지되고 있다. 한국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에서도 상당한 질적 우세를 유지하고 있고, 특히 해·공군력이 북한을 압도하기에 6.25 전쟁과 같은 전면전은 쉽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기습 전격전으로 서울을 점령한 후 협상을 통해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는 정도의 방안은 충분히 성공할 것으로 오판할 수 있다. 서울은 가깝고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일단 북한군이 돌파에 성공하여 도심으로 잠입하여 한국 국민과 뒤섞이면 한국 공군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진다. 김정은은 집권 후 ‘7일 전쟁 계획,’ ‘3일 전쟁 계획,’ 등을 만들었다.

평화팔이 인사들을 보면서 김정은은 무슨 생각을 할까

헌법 제66조 2항은 대통령과 정부에게 “국가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않는 데는 신경을 쓰면서, 국가안보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정부의 이런 태도야말로 북한의 침략을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그러한 임무를 명시한 것을 그것이 대통령이 담당해야할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한국군에게 촉구하고자 한다. 군대는 언제나 최악 상황을 상정하여 대비하는 집단이다. 정부와 국민 모두가 ‘평화’를 말하더라도 군대는 ‘전쟁대비’에 전념해야 한다. 북핵이 실제로 사라지기 전까지 군대는 북핵으로부터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전쟁방지를 연구해야 하는 기관이서 ‘평화체제 구축’을 토의하고 전 국방장관이 북핵 대비의 필요성을 부정하면서 군사합의서 이행만을 강조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군 간부들은 진급에만 치중하여 국방의 엄중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군 민주화나 장병 병영생활의 자율화에만 몰두하는 현상도 없어져야 한다.

군대가 전쟁대비를 등한시하는 만큼 김정은이 남침을 결심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 순간 김정은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핵폐기의 대가를 많이 챙겨서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을까? 그랬다면 벌써 핵합의에 이르렀을 것이다. 맥매스터 장군이 말했듯이 핵능력을 더욱 발전시켜 미군을 철수시킨 후 무력통일을 이루겠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미 방커에서 남침 작전계획을 갖고, 군 수뇌부와 토론하고 있지 않을까? 한국으로서는 일단 후자를 상정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것이 안보의 정석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없다.” “북한은 동일민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게 잘해주면 결국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 말이 틀려서 우리가 북한의 공격을 받고 북한에게 정복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원상회복을 할 수 있는 신통력이 있는가? 미안하다고 말할 것인가?

더욱 참담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김정은은 한국에서 평화팔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한편으로는 고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경멸하고 있지 않을까?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정복한 이후 남베트남에서 협력했던 인사들을 가장 먼저 처형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용주의에 근거한 청년들의 한미동맹 인식

유재영
경희대 국제학과, 본 협회 대학생 위원장

“Idealism without realism is impotent.”
– 리처드 닉슨 대통령 –

“쓸모 있는 진리가 참이다”라고 요약되는 실용주의가 청년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20, 30대는 전통 또는 명분보다 합당한 결과를 중시한다. 정부 정책 평가에 있어서 이념적 노선을 지키는 것은 청년들의 관심사 밖이다.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일자리가 감소한 사실에 대해서는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청년수당 등 젊은 층을 겨냥한 복지정책은 야권지지층까지 환영하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의 이권을 최우선시하고 시대변화에 수시로 반응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청년들의 한미동맹 인식행태도 마찬가지다. 이들 사이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논할 때 한국과 미국은 ‘전통적 우호관계’라는 논거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6.25 전쟁, 월남전, 이라크전 등에서 같이 싸워 다져진 혈맹이라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강력한 한미동맹의 이점과 준비 안된 자주국방의 위험성이 더 큰 설득력을 지닌다는 대목에서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한미동맹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한국의 미래 세대가 전쟁 속에서 피를 흘리며 맺어진 우호관계를 단순히 필요에 의한 전략적 이해관계로 재편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처럼 이해 타산적인 신(新)세대적 접근방식은 때로 왜곡된 민족주의에서 비롯되는 반미(反美)사상만큼이나 한미동맹을 위협할 수 있다. 마치 사람과의 관계처럼 외교에서도 모든 것을 재기 시작할 경우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요구하기가 어려지고 국가 간 깊은 신뢰를 쌓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가장 난처하고 힘든 순간에서 벗의 도움을 은혜로 간직하는 특정 이해관계가 아닌 긴밀함에서 비롯되는 진실한 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기 이전 시대에 살던 부모세대와 달리 지금의 청년들은 관광, 그리고 교환학생을 통해서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많아졌다. 여기에 한류 및 SNS에 힘을 입어 현지 사람들과의 문화적 유대감도 깊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민간교류가 활성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는 이전 세대만큼 견고하지가 않다. 이제는 민간교류 활성화라는 간접적인 측면서의 한미관계 제고 방안은 다소 한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직접적이면서도 현재 청년들의 사고에 부합하는 수준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 개선안들이 적극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다행히 실용주의적 청년들 사이에서도 강력한 한미동맹이 핵무기를 가진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중국의 급부상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한미동맹 인식 제고를 위해서는 우선 이 같은 국제 현실정치 상황을 계속 직시할 수 있게 지속적인 여론 환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관련 활동으로는 유튜브 채널 운영, 안보칼럼 집필, 각종 한미우호 기념행사 기획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韓·美 간 동맹유지에 있어 비대칭성도 인정하고 때로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 등을 수용해나가야 한다. 물론 한국은 동북아에서 미군 전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중요한 안보 파트너가 맞다. 하지만 현재 국가안보에 있어 한미동맹에 더 의존적인 쪽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청년층이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한미 간 공조방안들을 강구하는 데 이런 현실적인 부분이 고려되어야만 오히려 국격과 국익을 지켜나가면서 미국과의 건실한 동맹을 유지할 수 있다. 마치 정확하고 냉정한 문제 진단 없이는 적절한 문제해결책이 제시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청년층이 신념보다 이권에 의해 움직이는 것에 대해 기성세대들은 여러모로 아쉬울 수 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연대 및 희생의식을 발휘해 대한민국을 최대 빈민국에서 동북아의 강국(强國)으로 성장시킨 세대와는 환경적으로나 가치관에 있어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필자도 청년이지만 이 같은 사고방식이 장기적으로 국익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는 때보다도 더 빠른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유연하게 처신하는 지금의 청년들이 어는 정도 이해는 된다. 여하튼 앞으로 한미동맹을 가꾸어갈 당사자들은 유대관계보다는 합리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지닌 청년들이다. 이는 기존 한미동맹에 도전과제를 시사하며 양국이 한미관계를 조정해 나가는 데 있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지평리 전투의 영웅들

최상진
전 삼성물산 임원,본 협회 편집위원

6.25 한국전쟁에서 지평리 전투는 연합군이 중공군과 대치한 이래 최초의 승리였으며 그 승리를 발판으로 상대에 대한 전략과 허실을 완전히 파악하여 전쟁을 일단 종식시키는(휴전) 계기가 되었다. 지난 호 “지평리를 사수하라”에 이어 지평리 전투에서 영웅담을 기록한 지휘관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결과론적으로 6.25 전쟁은 남북 민족상잔의 비극적 슬픈 사실이지만 양상은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과 중공군의 대리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중공군)의 참전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 국공내전과 빈약한 재정으로 전쟁수행을 어려우며 설령 참전한다 하드라도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오판하였다. 전쟁 수행능력을 첨단무기와 훈련으로 조직화된 병력, 군수지원으로 크게 판단한다면 당시 중공군의 위상이란 그렇게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산인해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은 무서웠고 위기상황이 연출되면서 유엔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지나간 전쟁의 결과를 손무의 손자병법에 비추어 보면 전쟁의 원칙은 동서고금을 통해 동일하게 적용되나 전략, 전술을 운용하는 지휘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중공군의 개입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명분으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1950년 10월19일 경으로 짐작되어 진다. 중공군이 은밀하게 전개한 첫 번째 전략은 병법 시계(始計)의 궤도(詭道) 즉 속임수로 시작하였다. “兵者, 詭道也, 故 能而示之不用, 用而示之不用, 近而視之遠, 遠而視之近” – 용병이란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어도 없는 듯 하고, 용병을 하면서도 용병하지 않는 듯 하며,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하고,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척 하여야 한다 –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가 시작되기 전까지 13개 병단 26만명이 평북 적유령 산맥 깊숙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대규모 병력으로 매복, 기습을 일삼는 중공군은 유령부대로 일컬어져 산악전과 살인적인 한파에 적응하지 못한 유엔군에게는 그들의 소리공격(함성,꾕과리,나팔 등)마저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모공(謀攻)편의 공격방법의 적용이다. “故 用兵之法 十則圍之, 五則攻之, 培則分之, 敵則能戰之, 少則能逃之, 不若則能避之, 故 小敵之堅, 大敵之擒也” – 고로 전쟁하는 방법은 적보다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 이상이면 공격하고, 두 배 이면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고, 비슷하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적보다 병력이 적으면 도망치고, 승산이 없으면 피해야 한다. 소수의 병력으로 무리하게 싸우면 강대한 적의 포로가 될 따름이다 –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중공군의 주 전략은 유엔군과 국군의 진지를 겹겹이 둘러싸고 보급선과 퇴로를 차단하여 일시에 공격하는 포위섬멸 작전이었다. 1.4후퇴까지 유사한 전략으로 일관해온 중공군의 최대 약점은 소련의 지원을 얻지 못해 제공권이 거의 제로였고 갑작스런 대규모 병력운용에 따른 지휘계통의 혼선, 통신 불비에 따른 명령, 지시의 오류, 무기와 화력의 절대부족, 전장이 길어짐에 따른 식량을 포함한 제한된 보급능력, 도보부대의 한계등 문제점이 점차 현실적으로 노출되었다. 중공군은 51년 2월초 4차 공세부터 유엔군의 극심한 공중폭격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특히 야간에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병사들은 폐렴과 소화기 질환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1950년 12월 26일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에 전격취임 한 리지웨이(Gen Mathew B Rigeway)중장의 급선무는 청천강 전투 이래 팽배해져 있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적의 실체를 파악한 후 고지 점령에 앞서 적을 유인하고 막대한 인명타격을 줌으로서 사기진작과 군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후퇴를 쉽게 허락하지 않으며 솔선수범하여 전선을 누비고 예하 지휘관을 설득하여 반격작전을 관철하는 용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군복에 두 개의 수류탄을 달고 다닌다. 트레이드 마크 이기도 한 수류탄 장착은 2차 세계대전 시 미 82 공수사단장 이래 착용한 낙하산 공격부대의 전투복장 이었다고 한다.

미국이 선정한 6.25 한국전쟁의 4대 영웅(맥아더 장군, 리지웨이 장군, 백선엽 장군, 북파 공작원의 대부 김동석 대령)의 한 시람 이기도 한 리지웨이 사령관은 6.25 한국전쟁 중에도 다수의 한국군 청년장교를 선발해 6개월씩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유학을 보내는 미래지향적 리더십을 보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51년 맥아더 장군의 해임과 동시 대장으로 승진, 유엔군령관으로 취임하였으며 공산군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한 중국의 펑더후이(彭德懷)와 김일성에게 휴전안 동의를 얻어냈다. 리지웨이 대장은 1952년 5월12일 나토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후 1993년 7월 26일 타계하였는데 군 후배들로부터 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사려 깊은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전설적인 프랑스의 영웅 몽끌레아 중장

프랑스는 유엔 안보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에 포함되어 있다. 이사회의 역할은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 조사할 권한과 평화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권한과 의무를 수행한다. 6.25 한국전쟁 발발 시 프랑스는 상임이사국으로 일정규모 이상의 군대를 파견해야 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미온적인 태도를 일관하다가 대대급 외인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몽끌레아(본명, 마그랭 버르너르·Magrin Vernery)는 당시 59세의 육군 중장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22세에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임관 후 37년간 전장을 누빈 몽끌레아는 불굴의 군인정신으로 정부의 책임감 없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며 자원하게 된다. 대대장 직책에 중장 계급이 합당하지 않다는 르죈느 국방차관의 염려에 그는 육군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강등하여 유엔군 프랑스 대대 초대 지휘관(1959.11.29 – 1951.11.30)이 되었고 참전 동기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그가 최초로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대대는 미 제 23연대에 소속으로 그 안에는 80명의 한국군 카투사와 100명의 일반 병 도합 180여명의 한국군 병사가 있었다. 당시 대대원으로 복무한 임응상 옹(이정환 저, 지평리를 사수하라 참조)은 외인부대를 용감무쌍하여 패배을 용납하지 않고 군인으로서 당당했으며 외인부대의 긍지와 자신감 넘치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빨간 머플러와 베레모, 지휘봉을 든 백전노장의 몽끌레아 중령은 지평리 전투 첫날인 1951년 2월 13일 밤 어둠 속을 공격해 오는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20야드 앞까지 왔을 때 대대장의 사격명령이 떨어졌고 마지막에는 백병전을 벌리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 전투가 지평리 전투의 첫 개가였고 23연대 사기진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대대는 약 천 명의 규모로 연합대대의 일원으로 쌍굴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7차의 치명적 戰傷으로 90% 장애 등급자인 그는 1년 후 정년으로 귀국,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64년 6월 3일 72세로 파리에서 작고하였다. 프랑스의 국민영웅으로 칭송되는 몽끌레아는 국가를 대변하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투철한 군인정신을 보여준 진정한 영웅이었다.

기적을 만든 23연대장 폴 프리맨 대령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 2사단 23연대의 역할과 전적은 지난 호에서 소상히 설명한바 있어 이번에는 연대장 폴 L 프리맨(Paul L Freeman) 대령 개인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는 1907년 필리핀에서 출생하였고 1929년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 후 미 제 9 보병사단에 배속된다. 1936년 중국 천진의 제 15 보병연대로 전출되었으며 주중 미국대사관 부 무관 보좌관으로 근무하는 동시 중국어 연수과정을 수료해 중국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의 23연대는 1950년 7월 31일 부산에 도착, 8월 19일 다부동 전투에 참가하여 인민군 14연대를 격파하는 전적을 올린다.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제 2사단 본대는 약 5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단장까지 산으로 탈출하는 상황에서 프리맨은 기동로를 바꾸는 기지를 발휘, 12월 1일 집결지인 개성에 도착하게 된다. 그 후 23연대는 원주전투를 거쳐 쌍굴터널 전투에서 중공군 제 125사단에 승리를 거둔 후 1951년 2월 3일 지평리 방어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智將(지장)이요 德將(덕장)으로 참호와 참호를 오가며 부하를 따뜻하게 다독거리고 격려하였으며 전투 대비를 철저히 하여 부하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된 2월 13일 자정 무렵 그는 박격포 파편에 종아리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다. 사단장의 즉시후송 명령을 완곡히 거부하며 ”나는 23연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여기 왔다. 그러기에 나는 23연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승리한 다음 나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부하들에게 전하며 2만 명의 중공군을 퇴치 할 수 있었다. 군인이 전쟁터로 출발할 때 가족에게 남기는 말은 자기를 지켜온 마지막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고향에 남은 아내에게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 지역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어떤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소“ 라고 편지를 보냈다. 항상 자신의 수련과 내공을 바탕으로 먼저 시범을 보이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은 뒤 지휘권을 행사함으로서 실패없이 부대를 이끌어 나간 프리맨 대령은 기적에 가까운 분투로 지평리를 사수하였고 1955년 미 제 2사단장, 1962년 육군대장으로 승진, 미국 대륙간 육군사령관을 역임 후 1967년에 은퇴하였으며 1988년 캘리포니아에서 타계하였다.

달리면서 사격하라, 마셜 G 크롬베즈 대령

2월13일 밤부터 세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육탄전도 불사하며 잘 사수해 왔지만 중공군은 15일 대공세를 준비하여 포위망을 더 압축해 오고 있었다. 프리맨 연대장이 중상을 입은 가운데 자력으로 포위망을 풀고 적을 퇴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유일한 해결책으로 미 제1기갑사단 제 5기갑 연대에게 15일 저녁까지 지평리에 도착하여 현장 지원토록 명령했다. 연대장 크롬베즈는 즉시 특임 팀(Task force Crombez)를 구성, 지평리로 곧장 진격을 시작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엄호‧지원 병력을 탱크 갑판에 탑승시킨 채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야 했고 적의 맹렬한 저지에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명령은 오직 하나 “정지하면 안 된다. 달리면서 사격하라” 였다. 죽음의 死線(사선)을 돌파해 17시 15분 크롬베즈 연대는 지평리에 도착했고 프랑스대대를 포함한 23연대원들은 탱크에 눈물의 키스를 퍼부었다. 크롬베즈는 1900년 10월3일 벨기에 태생으로 1925년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하였으며 준장으로 예편한 뒤 1982년 81세로 산타클라라 카운티에서 타계하였다.

이름 없이 산화한 빛난 영웅들에게 감사를
이렇게 지평리 전투는 막을 내리고 휴전의 수순을 밟게 된다.
살상을 전제로 한 전쟁은 승리와 패배를 떠나 인류역사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참전비나 전적비를 취재 시 마다 느끼는 사항이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이름 없이 산화한 수많은 젊은 영웅들에게 깊은 감사와 애도를 표하고 남의 땅, 남의 하늘 아래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동맹국 장병들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수호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할 것을 다짐하면서··‧

100세 인생 생활의 힌트(10)

이성원
한국청소년도서재단이사장, 본 협회 부회장, 편집위원

100세시대로 가는 길은 아직 오솔길도 나지 않았습니다. 더듬거리는 80대의 심경을 전해보려 합니다.

2세들에게
16세기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몽테뉴는 삶의 목적을 오직 한가지 “행복의 추구”에 두었다.
‘나는 왜 행복감을 못느끼는 것일까’ 늘 그런 콤플렉스를 지녔던 나는 그가 보통 사람의 2배 행복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o 몽테뉴 행복법 1: 몽테뉴는 육체와 정신 두 갈래로 행복을 추구했지만, 육체의 쾌락에 더 비중을 두었다. 식욕과 성욕에서 오는 행복을 남들보다 2배 즐긴 비결은 육체가 느끼는 쾌락에 정신을 끌어들여 함께 즐기게 했기 때문이라 했다. (「몽테뉴수상록」에는 정신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o 이쓰끼 행복노트: 이쓰끼(五木寬之)는 87세의 일본 모럴리스트 작가다. 몽테뉴는 59세에 돌아갔다. 80대가 되면 식욕, 성욕 등 본능적인 욕망이 잦아붙는다. 일상 생활 속에서 행복의 씨앗을 찾아야 한다.
하루, 하루 그날 일어난 일 가운데 행복했던 일, 즐거웠던 일, 기뻤던 일을 ‘행복노트’에 기록하고, 수시로 꺼내 되씹고 즐기며 습관화하면 노후에도 조촐한 행복에 젖을 수 있다는 것.
앗, 이것이 즐거운 일에 정신을 끌어들여 함께 즐기는 방법이 되겠구나!

o 몽테뉴 행복법 2: 정신면의 행복을 몽테뉴는 타고난 재능 발휘에서 찾았다. 그는 공부(Learning)와 문필(Literature)에 소질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의 모든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인성 연구’에 몰두했다. 「몽테뉴 수상록」은 그가 20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룩한 “인성 연구”의 금자탑이다. 인류문화사의 빛나는 한 장을 장식했다.

o 나의 「五木 행복노트」: 현재 이런 사례들이 올라와 있다.

■ 오늘 변비가 텄다. 속이 시원하고 덩달아 입맛도 난다. 상쾌하다.
■ 마감 임박해 끙끙거리던 컬럼 글이 술술 풀렸다. 어깨가 가볍다.
■ 「문예춘추」지에 ‘교양부활론’이 나왔다. 국민의 교양이 높아져야 교양있는 지도자가 뽑힌다는 것. 맞는 말이다.
■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공원에서 차가 못 들어오게 된 광장에 들어와 후진하다 나를 밀쳤다. 노인 내외다. 자칫 악셀이라도 잘못 밟았더라면 나를 깔고 넘어갈 뻔했다. 생사의 갈림길이 이렇게 단순하고 순간적이로구나! 다행이다.
■ 딸애가 도쿄의사회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고야 근처 우리 거처에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갔다. ‘서울 가면 금세 또 만날텐데 뭘…’하고 생각했는데, 그 몇 시간이 딸애와 지낸 지난 50년 중에서 가장 즐겁고 흐뭇한 시간이 되었다. 이런 얘기를 계속 「五木 행복노트」에 올려 까물까물하는 행복의 불씨를 보존해 봐야겠다.

o 「空공」의 세계: 80을 넘으니 종교철학서가 몸 가까이 느껴진다.
「전도서」는 “공의 공, 일체 공”이라 했고, 「반야심경」도 “오온개공 五蘊皆空”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다 공)이라 했다.
몽테뉴는 “삶은 그 자체가 목표요, 그 자체가 목적이다. Life is an aim unto itself and a purpose unto itself.”라 했고, 현대 서구철학의 새 조류를 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곤충잡이 병에 갇힌 파리에게 거기서 탈출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 하는 것“이라 했고, “철학하는 사람은 병에 갇혀 나갈 길을 못 찾고 팔딱이고 있는 파리”라 했다.

이런 인생살이의 헛되고 덧없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세상의 참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 종교철학서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因緣說인연설

성기조

 

어둠이 밀려올 때

눈이 사락사락 내릴 때

바람이 불어올 때

매서운 추위가 몰려올 때

木花목화같은 다사로움으로

바위 같은 沈黙침묵으로

풀꽃같은 香氣향기로

무르익은 果肉과육으로

開化개화하는 꽃잎의 부드러운

눈짓으로

눈 오는 밤 당신이

내게 들려주는

사랑의 말씀

 

대북한 정책: 기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부교수
본 협회 편집위원장

출퇴근을 하다가 심각한 교통체증에 빠지게 되면 빠른 우회길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정체되어 있는 내 차선 옆 텅빈 차선을 보면 누구나 그곳으로 달리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 쪽으로 차선을 바꿔서 달리면 처음 얼마간은 정말 신이 난다. 잠시 동안은 차가 쭉쭉 빠지고,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해서 곧 더욱 심한 정체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그 정체를 극복해도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바보라서 정체되어 있는 차선에서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결국은 그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고, 정체되어 있는 그 구역만 극복하면 많이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대북 또는 대북핵 정책이 텅빈 차선으로 바꾼 위 이야기에서의 차와 같지 않을까? 북한이 핵무기 폐기를 제대로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으로 생각 및 홍보하고, “한번도에서 전쟁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보수 정부가 취해온 신중한 압박 위지의 대북 정책을 경멸하기라도 하듯이 숨가쁘게 남북관계를 진행했다. 세차례에 걸쳐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이 싱가포르에서 만나도록 만들었다. 정말 잠시 신이 났다.

그러나 싱가포르 회담에서부터 기대와 달리 아무런 의미없는 합의가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채 노력했으나 결국 2019년 2월 28일 하노이에서의 미북 정상회담은 결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협상과 대화의 창구가 의미없도록 만들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와 함께 생·화학무기까지 폐기하기를 요구하고 있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 정도만 폐기하는 조건으로 경제제재의 대부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잠시 순항하다가 더 극심한 정체에 직면한 위 이야기의 운전자처럼 현재의 남한 정부는 오던 길을 계속 갈 수도 없고, 새롭게 바꿀 길도 없으며, 되돌아오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다소 힘들고 답답했더라도 1년 전에 차선을 바꾸지 말고, 힘들지만 조금씩 전진했으면 어떠했을까? 미국과 함께 북한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더라면, 북한이 핵무기 폐기에 관한 확답은 물론이고, 그 로드맵까지 제시하였을 수도 있다. 이미 북한의 핵무기가 해외에 반출되어 해체되고 있을 수도 있다. 답답한 마음에 4월 11일 2시간을 위하여 10여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방문하였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으로부터는 “오지랖 넓게” 행동하지 말고, “제정신을 갖고” 처신하라는 충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서 텅빈 길로 잠시 신나게 달리다가더욱 극심한 정체에 진퇴양난에 빠진 운전자와 너무나 유사하지 않는가?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원래도 되돌아와야

길을 잘못 들었다고 판단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그 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가급적이면 조금이라도 더 빠른 길을 또 찾고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버둥되다가 또다시 더욱 극심한 정체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수를 만회하고자 발버둥칠수록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로 인하여 2시간 걸릴 길을 5시간, 어떤 경우는 10시간을 걸려 도척하기도 하는 것이다. 비록 그 동안의 시행착오가 뼈저리게 후회되고, 그 동안 낭비한 시간이 아깝지만, 다시 원래의 정상적인 길로 돌아와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잠시 막힌 것과 되돌아오는 시간만 손해본 후 3시간 정도에 목적지에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쉽지 않지만 이제 정부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최우선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고, 그 이후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였지만, ‘완전한 비핵화’는커녕 부분적인 비핵화를 위한 진전도 없었다. 오히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철폐를 통하여 미국의 핵우산을 제거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1970년대부터 주장해온 ‘조선반도 비핵화’에 합의하였을 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이제 북한은 적반하장으로 미국에게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증거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유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는 이러한 냉정한 현실 인식 하에서 기존의 북핵 접근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한 후 180도 방향을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에게 잘해주면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할 것이라는 생각은 유아적일 정도로 어리석은 것이고, 핵위협의 처리에 관한 어떠한 교과서에도 추천되지 않는 방식이다. 1년 동안의 실험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않았는가? 인간도 그러하지만, 상대국이 선의로 대해준다고 하여 자국이 소중하게 아끼는 것을 포기할 국가는 없다. 포기하지 않을 경우 생존을 도모할 수 없다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야 마지못해 내어놓을 것이다. 정부는 이제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의 교과서로 되돌아가서 미국과 함께 북한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이로써 북한에게 핵무기 보유는 자신과 체제를 백천간두에 서게 만들 수 있다고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긴장이 고조되더라도 장기적으로 핵무기를 폐기할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둘러싼 국론분열에 대해서도 반성하면서 전향적인 개선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국민과 국론을 통합할 책임은 정부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신중하면서도 차근차근한 접근을 요구하는 여론은 무조건 배척하였고, 정부의 노선을 지지하는 인사들의 말만 들음으로써 현재와 같은 비참한 결과를 자초하였다. 비록 시간이 걸리지만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대북 또는 대북핵 전략을 수립하고, 그 결과로써 남한 국민들의 일치단결된 확고한 입장을 북한에게 과시해야 한다. 친북인사들을 제외하는 대신에 북핵 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중용하고, 야당 지도자, 보수적인 외교 및 안보전문가들의 의견을 널리 수렴해야 한다. 각계 전문가들을 망라하여 북한 비핵화에 관한 범정부조직을 구성하고, 이들에게 합리적인 북한 핵무기 폐기 전략을 개발하도록 요청한 뒤, 총력적인 차원에서 추진해 나가야할 것이다.

실질적인 북핵 억제 및 방어책 강구

이제 정부는 유사시 북핵으로부터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포괄적이면서 실질적인 대책도 강구해 나가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 사용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과업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과도하다고 싶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대비하는데, 한국은 유독 최상의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만 인식하면서 태평이다. 국민이 그러하더라도 정부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야할 것인데, 한국은 오히려 반대이다. 국민들이 불안하다고 아우성이고, 정부와 여당은 태평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말이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계승되어오고 있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당연히 핵우산(nuclear umbrella)을 포함한 미국의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가 실제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한미 양국군 간의 협의와 절차훈련을 강화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미국 정부와 모든 대북한 또는 대북핵 정책을 협의해야할 것이고, 한미연합사를 중심으로 “4D” 즉 “탐지(Detect), 와해(Disrupt), 파괴(Destroy), 방어(Defend)”를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능력과 체제를 구비해 나가야 한다. 현 상황이라면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에 관한 모든 협의를 중지시키거나, 미국의 전술핵무기 재배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위협할 경우에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국가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과 대책을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이를 위한 정부와 군의 전략을 개발하며, 그 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태세를 강구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 ‘3축 체계’로 추진했으나 현 정부 들어서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선제타격(Kill Chain), 탄도미사일방어(Ballistic Missile Defense), 대규모 응징보복(KMPR: Korea Massive Punishment and Retaliation) 등의 개념을 재활성화하고, 그를 위한 군사역량 확충에 매진해야 한다.

‘9·19 군사분야 합의’에 관한 재검토도 미룰 수는 없다. 서울은 휴전선에서 40km밖에 되지 않아서 기습공격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 합의를 준수하고 있는 지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그에 맞도록 우리의 준수 수준을 조정해야 한다. 북한이 지키지 않는 부분은 우리도 지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설정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북한에게 알려야 한다. 전방지역 부대 이외에는 훈련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전방 지역도 북한의 상응한 조치에 맞춰서 훈련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할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겠다는 전제 하에 합의한 사항이니만큼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다면 합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미동맹의 복원 필요

그 동안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폐기에 치중한 나머지 한미동맹이 약화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였고, 필요한 처방을 강구하지도 못하였다. 주변에서 아무리 한미동맹이 불안해지고 있다고 해도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한미동맹은 확고하다고 강변할 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재의 한미동맹은 매우 취약해진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지난 방위비분담의 협성과정, 이번 4월 12일 한미 정상회담, 그리고 한미 실무자들 간의 접촉 빈도를 보면 한미동맹은 빠른 속도로 형해화(形骸化)되고 있다.

우선 정부는 핵무기 억제 및 방어의 교과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로 북한의 핵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북한에게 알리고, 미국이 시행하고 있는 경제제재 조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공해상에서 북한이 석탄이나 석유를 환적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이를 위하여 미국 및 일본을 비롯한 동맹 및 우방국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조치가 단기적으로는 북한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고, 남북관계에도 긴장을 조성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핵무기를 폐기하여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민족공영을 보장하게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과의 연합훈련도 재개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매년 봄에 실시하던 ‘키 리졸브’와 ‘폴 이글’ 연합훈련은 ‘동맹-1’이라는 컴퓨터 모의 연습으로 대체되었고, 여름에 실시되던 ‘을지-프리덤가디언’ 연합훈련도 지난해 취소된 데 이어 ‘동맹-2’라는 컴퓨터 모의 연습으로 대체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훈련에는 ‘반격’ 단계가 포함되지 않아서 미 증원군의 전개에 관한 사항을 제대로 점검할 수 없다. 당연히 컴퓨터 모의로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여 훈련할 수 없다. 이외에도 과거 연합 차원에서 실시하던 각군의 훈련들이 한국군 단독훈련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제 한국 정부는 이러한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군에게 강한 훈련을 실시하도록 강조하면서 미국에게도 과거의 한미연합훈련을 복원시키는 방향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

한미동맹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는 것은 북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최선의 대책이기도 하지만, 북핵 폐기의 유일한 실질적인 길일 수도 있다. 한미동맹이 강화될수록 중국은 불안하게 생각할 것이고, 결국 북한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경우 중국은 전략적으로 봉쇄된다고 인식하여 사전에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동맹이 북중동맹을 압도하는 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설득의 대상은 북한, 주제는 핵무기 폐기

문 대통령은 4월 15일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북한의 형편이 되는 대로 장소와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남과 북이 마주앉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넘어서는 진전될 결실을 맺을 방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 논의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도대체 현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북한 또는 북핵과 관련하여 어떤 전략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할까? 북한은 “오지랖”과 “제정신”의 용어를 사용하여 한국을 무시하고 있고, 한국과 대화할 생각 자체가 없다. 이렇게 안보를 어렵게 만든 것을 앞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제 정부는 성과없는 북한 설득에 올인할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침묵함으로써 국격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정부가 모욕당하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모욕당하는 것이고, 우리가 북한에게 모욕당할 이유는 없다. 이 대한민국은 문대통령과 현 정부인사들의 나라가 아니고, 현재를 사는 모든 국민, 과거의 선조들, 그리고 미래의 후손들이 공유하는 나라이다. 잠시 국정을 맡은 기회에 후손들이 살 국가의 모습을 함부로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텅빈 차선을 선택하여 잠시 달리다가 정체되면서 실수한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차를 정지시키고, 현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북한이나 북한 핵무기에 대한 접근방법이 잘못되었음을 확실하게 깨닫기만 한다면 1년 동안의 실험이나 시행착오는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반성없이 잘못된 길을 계속한다면 정말 문제이다. “국가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 계속성과 헌법의 수호”라는 헌법 제66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책무를 엄중하게 이행할 것을 촉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