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의 위기와 대응

이용준 전 외교부 차관보, 북핵담당대사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말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한미동맹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동안 한미관계는 한국의 민주화 문제, 인권문제, 주한미군 철수문제, 통상문제 등을 둘러싸고 가끔 큰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한미동맹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당시 민주화와 인권 문제로 한미관계가 큰 홍역을 치를 때에도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입장은 확고했다. 주한미군 전면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등장했던 카터 행정부도 의회의 반대에 밀려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미관계의 통상적 갈등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한미동맹 위기설이 워싱턴과 서울에서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고, 이런 기류는 유럽 국가들에까지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동맹에 대한 경시 풍조가 심각한 수준인 데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 역시 노골적인 친중, 친북 정책으로 미국을 격분시키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고 한미동맹의 위기를 해소하는 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어, 향후 이러한 양국관계 위기의 파장이 어디에까지 미치게 될지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급기야 최악의 경우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와해가 현실화 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미 동맹관계 위기의 연원

과거 한미 관계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한국 정부의 친북성향 국내외정책으로 인해 한미관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갈등의 소재는 주로 대북한 경제원조,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대북한 정책을 둘러싼 이견들이었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사이의 최초 정상회담에서 시작된 양국 간의 파열음은 그 후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끝날 때까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미국의 실체에 대한 이해가 깊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미 경외심으로 인해, 대북정책 관련 한미 간 불협화음이 양국관계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고 한미 안보협력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이었다.

한국 정부의 이념적 편향으로 인해 한미동맹 자체가 위기를 겪기 시작한 시기는 노무현 정부 5년간이었다. 그 기간 중 한미관계를 포함한 외교안보정책 전반이 철저히 남북한 관계의 종속변수가 되었다. 외교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은 자기부처 현안업무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채널조차 없어, 외교안보 전반을 총괄하던 통일부총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두 부처가 남북관계 개선에 조금이라도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북한 핵문제 역시 그러한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된 ‘9.19 공동성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 기간 중 한미 양국 사이에는 북한 핵문제, 대북 경수로지원, 한반도 평화체제, 한반도 종전선언, 서해북방한계선(NLL),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남북경협 등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팽팽한 이견이 지속되었고, 주한미군 기지이전(LPP), 용산기지 반환, 평택기지 건설비, 전시작전권 전환, 주한미군 감축, 전략적 유연성, 작계5029, 아프가니스탄 파병, 이라크 파병 등 군사문제에 관한 마찰도 연일 계속되었다. 그 밖에도 북한 인권문제, 동북아균형자론,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 등 온갖 외교 현안들을 둘러싼 잡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한미동맹의 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무렵 노무현 정부가 좌파 지지세력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이라크 파병, 아프간 파병, 한미 FTA 체결 등 중대한 조치들을 단행함에 따라 양국관계는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분히 친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양국 간 갈등 고조로 인해 주한미군의 대폭 철수가 현실화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 친북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유지 필요성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 후 9년여 만에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를 능가하는 좌편향 정책으로 한미관계를 큰 위기로 몰아넣고 있고,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미래 자체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노골적 친북정책을 취했을망정 중국에 대해서는 의연했고, 박근혜 정부는 과도한 친중국 편향으로 인해 미국 조야의 강한 의혹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대북한 정책은 그와 상관없이 단호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보다 더 노골적인 친북정책에 더하여, 박근혜 정부를 훨씬 능가하는 대중국 굴종외교를 전개하고 있어, 한미관계가 미증유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는 그러한 정책을 숨기거나 망설이는 기미도 없고, 양국관계의 파국을 완화하거나 해결하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반미적 색채가 점차 표면화되고 있다.

친중, 친북 편향외교에 따른 한미동맹의 위기
(친중 굴종외교에 따른 위기)

문재인 정부의 친중, 친북 편향 정책으로 인해 한미동맹은 세 방면에서 동시에 위기를 맞고 있다. 첫째 위기는 미중 패권경쟁의 본격화로 냉전시대를 연상시킬 만큼 미중 진영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현저한 친중국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미국을 분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미중 패권 경쟁은 두 나라 사이의 경쟁의 차원을 넘어 점차 친미진영과 반미진영 간 대결,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전체주의 진영 간 대결, 세계 문명사회와 비문명사회 간의 대결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국은 북한 핵문제,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문제, 한미 합동군사훈련 문제, 한미일 삼각안보협력 문제, 한반도 평화협정/종전선언 문제, 미사일방어 문제, 화웨이 제재문제 등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현안들에서 대부분 중국 측 입장에 동조하고 있고, 중국이 반대하는 모든 국제적 활동에 불참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미중 쟁점현안 미국입장 중국입장 한국 정부의 선택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 가입 가입 반대 가입 요구 창설회원으로 가입(박근혜 정부)
중국군 전승70주년 열병식 참석 참석 반대 참석 요구 박근혜대통령 참석(박근혜 정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강력 반대 영유권 주장 반대입장 표명요청 거부(박근혜/문재인 정부)
한미일 3자 안보협력/합동훈련 강력 희망 강력 반대 협력 회피, 사실상 와해(박근혜/문재인정부)
미사일 방어체제 설치 배치 희망 강경 반대 사드기지 가동불허, ‘3불약속’(문재인정부)
대북한 제재조치 해제 문제 해제 반대 해제 주장 중국/북한 입장 동조(문재인 정부)
북핵문제 해결 방식 일괄타결 단계적 해결 중국/북한 입장 동조(문재인 정부)
한반도 종전선언/평화협정 반대 찬성 적극 추진(문재인 정부)
한미 합동군사훈련 적극 희망 강력 반대 3대 합동군사훈련 폐지(문재인 정부)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참여문제 참여 요청 참여 반대 참여 거부(문재인 정부)
대북한 밀무역단속 합동해상작전 참여 요청 참여 반대 참여 거부(문재인 정부)
화웨이 제재문제 동참 요구 불참 요구 불참 입장(문재인 정부)

군사 분야에 있어서도, 한국은 남중국해의 광활한 영역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근거 없는 영유권 주장과 불법 점거에 항거하는 미국, 일본, 호주, 영국, 프랑스 등 자유진영 국가들이 남중국해에서 벌이는 ‘항행의 자유 작전’에 불참하고 있고, 한반도 해역에서 북한 선박의 밀무역을 단속하기 위한 미, 일,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7개국의 합동해상작전에도 불참하고 있다. 한미일 3국이 태평양 지역에서 실시해 온 합동해상훈련도 기피하고 있고, 미국이 군사보안 문제를 이유로 실시하는 화웨이 제재에도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정부의 이러한 친중적 성향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좌파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우파 정부인 박근혜 정부 때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한국이 이미 미국 진영을 떠나 중국 진영으로 기울었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있다. 한국 정부가 스스로 초래한 이러한 한미동맹의 위기로 인해, 워싱턴 조야에는 친한파 인사의 씨가 말랐고, 한국의 동맹 이탈과 중국진영 편입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친북정책에 따른 위기)

한미동맹의 둘째 위기는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친북 편향적 성향을 띠게 됨에 따라 북핵문제, 대북정책, 군사안보문제 등 북한관련 동맹현안에 있어 양국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과거 노무현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친북정책 노선이 추구되고 그에 더하여 친중 굴종외교까지 추가됨에 따라, 한미 양국 사이를 연결해 줄 최소한의 접점마저 상실된 상황이다.

이에 따른 미국 정부의 강력한 거부반응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이를 수습하려는 움직임은커녕 거의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이로 인해 한미관계 악화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고, 주한미군 대폭 감축과 한미동맹의 와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는 2018년의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른 한국군의 전반적 방어태세 이완과 더불어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커다란 불확실성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고려연방제의 천년왕국을 꿈꾸는 이 나라 좌익세력에게 불감청고소원의 축복이 될지도 모르나, 대다수 국민에게는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다.

(한미일 삼각협력 파괴에 따른 위기)

한미동맹의 셋째 위기는 한국 정부가 반일 민족주의를 선동하고 한일 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을 폐기하는 등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체제의 근간인 한미일 삼각협력체제의 파괴를 주도함으로써 한미동맹의 위기가 수면위로 부상해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관제 반일민족주의 캠페인이 결과론적으로 한미일 삼각협력을 파괴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김일성의 이른바 ‘갓끈 전술’ 개념에 따라 반일정책을 통해 삼각협력체제를 타파하고 이를 통해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이 궁극적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초 의도가 무엇이었건 결과에는 차이가 없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친중, 친북, 반일 정책 뒤에 숨겨져 있던 반미적 의도가 비로소 민낯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지소미아 파기를 둘러싼 미국 정부의 격앙된 반응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별다른 무마 노력을 기울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정책을 바꾸거나 하다못해 그럴싸한 해명이라도 하려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현재의 상황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별다른 이의나 우려가 없음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한미일 협력체제를 파괴하는 것이 처음부터 한국 정부의 목표였다면 그것은 단순한 획기적 대외정책 변화의 차원을 넘어 한국이 건국 이래 소속되어 온 국제정치적 진영을 아예 송두리째 바꾸려는 원대한 전략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정부수립 이래 70년간 한국은 미국과 서유럽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일원이었다. 수십 년간 아태지역을 포함한 세계무대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벌이는 다양한 외교적 공동행동, 합동군사훈련, 다국적 연합군 등에 참여함으로써 그들과 각별한 유대를 맺어왔다. 그 구성원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과 유럽의 영국, 독일, 프랑스 등 NATO 회원국들로서, 국제 문명사회와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구성하는 핵심 국가들이기도 하다.

그런 한국이 돌연 방향을 급선회해 세계 공산주의-전체주의 진영의 대표격인 중국, 러시아, 북한이 결성한 ‘북방 삼각체제’ 카르텔의 문전을 기웃거리고 있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과거 6.25 남침의 주역이었고, 미국이 이란과 더불어 최대의 잠재적국으로 간주하는 나라들이다. 미국은 이러한 동맹국을 언제까지 용인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동맹국에 대한 의리가 없기로 정평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을 배신한 한국에 대해 보여줄 인내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한국의 동맹파괴 행위가 초래할 대가

한국 정부의 동맹파괴 행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무엇보다 먼저 한미동맹, 특히 주한미군 문제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주한미군 유지비 총액에 해당되는 약6조원의 방위비 부담을 요청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동맹국으로서의 의무를 무시하면서도 굳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원한다면 마땅히 주둔비용 전액을 ‘용병료’로 지불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그것이 합의될 가능성은 없을 테니, 이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주한미군의 대규모 감축은 이 나라 외환시장과 대외신인도 및 외국인 투자에 큰 타격을 주어, 가뜩이나 어려움에 처한 한국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이와 관련, 한미관계가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와 평택기지의 효용성을 감안할 때 미국이 주한미군을 절대 철수하거나 대폭 감축하지 못하리라는 견해가 좌파진영은 물론 우파진영 일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안일한 생각이다. 미국은 박정희-전두환 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을 시도했다. 양국관계가 긴밀하던 시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지상군의 대부분을 철수하고 주한미군을 공군 위주로 재편성 하려는 것이 수십 년 전부터 미국의 일관된 소망이었다. 그것을 외교협상을 통해 만류하고, 방해하고, 교섭이 실패하면 미국 의회와 언론까지 동원해 번번이 좌절시킨 것은 바로 한국 정부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한 주한 미지상군 철수라는 미국 국방부의 오랜 꿈은 아직 유효하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문재인 정부는 과연 얼마나 열심히 반대를 할 것인가?

한미 동맹관계의 악화는 양국 간의 정보공유에도 대단히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는 북한동정 관련 전자정보 공유 등에 있어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이나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보다 미국의 적인 중국, 북한을 더 중시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과연 미국이 어떤 민감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한국에 대한 최첨단 무기의 판매마저 중단될지도 모른다. 첨단 무기체계의 민감한 기술정보가 중국이나 북한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점을 미국이 어찌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이 전시작전권 전환 이후 한국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미연합사령부와 별개로 유엔군사령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미국으로서는 불가피하고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전시작전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되면 한국이 중국 또는 북한의 침공을 받아 전시상태가 될 경우 한국군 사령관이 한미연합군을 통합지휘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동맹국인 미국보다 가상 적국인 중국, 북한에 대해 더 호감을 보이고 있는 한국 정부가 임명하는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미국 정부가 과연 주한미군과 수십만 증원병력에 대한 지휘를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미국 의회가 이를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미동맹의 이완은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와 군사정책 전반에도 변화를 불러옴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외교적, 군사적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안보체제에서 일본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리라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의 동맹 이탈에 따른 공백을 메우려 미일동맹을 한층 강화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보다 강력히 지원하게 될 것이다. 또한 독도문제, 과거사 문제 등 한.일 간의 오랜 쟁점현안들에 있어서도 점차 미국의 충실한 동맹국인 일본 측 입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예상된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반일 캠페인은 당초 의도와는 반대로 동북아에서 일본의 외교적, 군사적 역할을 확대시키고 한일 현안에 관한 일본 정부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미동맹의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한미동맹과 국가안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고 간단하다. 현재의 모든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조치들이 그 핵심이다. 첫째, 대중국 굴종외교를 종식시키고 미국의 동맹국으로 완전히 복귀해야 한다. 둘째, 시대착오적인 종북 정책을 중단하고 북한 핵문제와 여타 대북 정책에 있어 미국 및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외교적 공조를 재개해야 한다. 셋째, 9.19 남북군사합의를 폐기하여 휴전선 일원에서의 대북한 감시, 정찰, 방어훈련, 심리전활동을 재개하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해야 한다. 넷째, 한일 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의 조건 없는 연장과 한일관계의 완전한 회복을 통해 한미일 삼각안보협력과 합동해상훈련을 복원해야 한다. 다섯째, 태평양 지역에서 실시되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합동해상훈련과 합동작전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완전한 일원으로 복귀해야 한다.

이상의 5개항 조치는 그간의 비정상적 정책을 원점으로 복구시켜 정상화시키는 조치들이며, 국가안보의 위기 극복을 위해 시행해야 할 5개의 추가적 대응조치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섯째, 상주의 사드 기지를 즉각 가동하고 추가적 사드 포대 도입과 저고도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 체제를 전국적 규모로 배치한다. 일곱째, 미사일 주권을 포기하는 대중국 ‘3불약속’을 폐기하고, 북한 핵미사일의 방어를 위해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과 연계된 고도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추진한다. 여덟째, 북한의 어떠한 재래식 군사공격도 미국의 도움 없이 능히 격퇴할 수 있을 만큼 우월한 군사력을 구축하기 위해 최단 시일 내에 대규모 군비증강을 실시한다. 아홉째, 자유민주주의 우방들과 협조 하에 북한의 비핵화와 인권개선 및 개혁개방을 위한 압박외교를 전개한다. 열째, 북한에 대한 핵억지력 확보를 위해 독자핵무장, 미국 전술핵 반입 등 가용한 방안을 국가차원에서 논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여타 조치들의 신속한 이행을 지연시키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상 열거한 열 가지 조치들 중 문재인 정부 하에서 실현 가능한 조치는 단 하나도 없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 이러한 조치들의 필요성을 무관심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부에 대해 정책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둘째,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가 현 정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을 여러 경로로 미국 정부에 알림으로써 미국 정부가 한미동맹에 대해 졸속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미국 내 여론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중국에 줄 섰다가 맞게 될 한국의 미래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남북군사합의·지소미아 파기 등 현 정권 외교·안보 의문투성이
미국 멀리 중국 가까이전략은 한미동맹 해체로 가는 징검다리
중국과 손잡고 성공한 나라 없어인접국 ‘1GDP’ 3분의 1

정부 여당의 ‘중국 편향’이 심해지고 있다. 최근 부산시 여러 곳에 내걸렸던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 경축’ 현판은 그 작은 징표다. 중국 공산당의 존재는 수도 서울의 시의회까지 들어왔다. 지난달 말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중국 건국 기념사진 전시회는 공산당 정권 수립과 경제 발전을 찬양하는 사진 160여 장으로 채워졌다. 6·25 때 이 땅에서 14만 명의 젊은 피를 흘린 미국을 위한 경축 행사는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서울시의회가 국군에게 총을 쏜 중국에는 장소를 내주었다.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중국 관련 경제 포럼에선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의 리더십’ ‘한·중의 새로운 관계 설정’ 등이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이 포럼에는 설훈, 김두관, 정동영 등 범여권 실세 의원들이 참석했다. 학생운동권 출신 여당 정치인들은 이제 ‘미국을 대체할 중국’과 ‘새로운 한·중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것 같다. 안민석 의원이 “한국이 북·중과 연대하여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일본 욱일기의 반입을 막자”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이후 취해온 의문투성이의 외교 안보 조치들 역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거기엔 ‘친중(親中) 전략’이 숨어있다. 환경영향평가를 핑계로 미룬 사드 정식 배치, 안보 역량을 약화시킨 남북 군사 합의, 한·일 간 지소미아(GSOMIA· 군사 정보 보호 협정) 파기, 한·미·일 안보 협력 대신 중국 포함 다자 협력 추구 등은 한미(韓美) 동맹 해체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이는 모두 중국에 이로운 조치다. 문 정부 외교는 ‘미국을 멀리하고 중국을 가까이하는(원미친중;遠美親中)’ 전략이다. 그 목적은 북한과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식 연방제 통일을 하는 데 중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한반도에 미군이 있는 한 통일에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이므로, 문 대통령은 통일과 미군 철수를 함께 추진해야 할 수도 있다. 결국 ‘미국을 버리고 중국과 손잡는’ 결단의 순간에 직면해야 한다.

한국 좌파 정치권은 ‘연방제 통일’이야말로 7,500만 한민족이 ‘분단 체제’를 끝내고 강대국 앞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대전제라고 본다. 이 목표를 위해 ‘친중반미(親中反美)’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것 같다. 청와대가 북핵 문제에 작은 돌파구라도 열리면 미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협에 총력을 쏟을 태세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성과를 동력으로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연방제 개헌(改憲)에 다가선다는 계산법이다.

‘미국을 버리고 중국과 손잡는 것’이 문 정부가 꿈꾸듯이 남북한 공동 발전과 평화통일로 가는 길일까? 우린 장밋빛 미래 대신 리스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한국이 한·미·일 삼각 동맹에서 이탈해 북·중·러 삼각 체제에 편입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한국 사회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경제가 받을 충격은 1997년 IMF 위기 이상이 될 수 있다. 내년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가 예상되면 연방제 통일을 우려한 국제 자본이 한국을 이탈할 것이고 주식과 원화 가치는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 부자들이 해외로 떠나면 부동산 시장도 위험하다. 한국이 미국 주도의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 제외되면 수출 길은 급격히 좁아진다. 기업들이 문을 닫으면 실업자는 급증하고 청년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금융기관 파산으로 수십 년 부어왔던 개인연금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좌파가 꿈꾸는 것처럼 북한 개발 붐이 일어나기도 전에 한국 경제부터 무너질 수 있다.

또 한미 동맹을 버리고 연방제에 합의한 한국은 장차 북한과 대등하게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자국의 군사력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정치 체제를 강요할 수 있다”는 스탈린의 말처럼, 핵 무력을 가진 김정은 일인 독재 체제는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짓누르게 될 것이다. 말이 ‘평화적 연방제 통일’이지, 북한 주도의 흡수 통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란 든든한 친구를 버린 한국은 중국 관계에서도 대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받으리란 보장이 없다. ‘수직적 위계’를 중시하는 중국은 한국에 종속과 굴욕을 강요할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과 손잡아서 성공한 나라는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14국 중 러시아를 제외하고 중국보다 잘사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14국의 1인당 GDP 평균은 3,064달러에 불과하다(그래픽 참조). 캄보디아와 미얀마 베트남은 마오(毛) 사상 영향으로 내전과 학살에 시달렸다.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에 협력한 국가들은 지금 엄청난 빚에 신음 중이다. 북한 대외경제성 관리조차 “미국과 동맹을 맺은 한국은 잘사는데, 중국과 동맹 맺은 우리는 못산다”고 하소연하겠는가. 중국 땅 끝에 위치한 한국이 3만달러 수준에 오른 것은 한미동맹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을 버리고 ‘중국 줄’에 서는 선택은 지난 70년간 우리가 누려온 자유 민주와 풍요의 정치 경제 구조를 근본부터 파괴하는 일이다. 미군이 주둔하는 곳은 자유민주 정치가 가능하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의 힘이 미치는 곳엔 감시와 억압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위구르 지역과 홍콩을 보라.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한국 경제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미 동맹 위에서나 가능하다. 미국은 한국의 ‘친구’지만, 중국은 ‘친구’가 될 수 없다.

* 본 칼럼은 조선일보 동북아시아 연구소장 지해범씨가 조선일보(‘지해범의 아웃룩; 2019년 10월 9일)’에 기고한 글을 본 협회지에 옮긴 글입니다.

내가 느끼는 이 시대의 한미동맹

이승복
아시아투데이 전략기획팀장
본 협회 청년위원장/편집위원

세상이 온통 시끄럽기만 하다.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개혁 당해야 할 사람이 장관이 되고, 이를 두고 분노해서 나온 두 갈래의 집회의 모습에서, 나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시대이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한 사회상이 투영되고 있음을 짐작해 본다.

급기야는 오늘 여자 대학생들로 구성된 시위가 미대사관저의 담장을 넘어버린 날이다. 현행범을 두고도 여자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현장 조치가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이 또한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경찰로서는 상당히 억울할 만하다. 나중에 추행이나 과잉진압에 대한 소송에 시달릴 수도 있으니 그 순간 법의 수호자가 아닌 철저히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으로만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제정신의 모습들인가라는 강한의구심을 갖게 한 날이다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책으로만 배우고 단 한 번도 실천하려 애쓰지 않은 기성세대와 그 내용마저도 목적을 위해서는 과감히 변질 시켜버리는 일부 집단의 잘못된 인식에 따른 결과가 너무도 참혹하게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한미동맹!
70년의 역사 속에서 건국, 지원, 분단, 전쟁, 국방, 경제발전 그리고 동북아 우방의 중심으로 함께 해온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선이 아닌 악, 평등이 아닌 불평등으로 규정되어지고 그렇게 이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동안 미국이라는 담장아래서 우리가 받은 혜택을 주장하는 사람은 순간 제국의 앞잡이이며, 분단의 책임자이며, 소위 늙은이들의 한풀이 주장이라는 메아리가 그냥 덮어버린다. 이에는 논리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미국의 압제와 영향력에서 벗어나야한다는 논리는 얼핏 듣는 순간 매우 그럴싸하다. 이제 우리가 경제 강국이 되었고, 세계 경제 대국의 반열에 있으며, 우리의 문화가 전 세계에 우뚝 서 있는 이러한 힘이 있음에도 대국의 힘의 논리에 굴복한다는 것 자체가 사대주의이며 이제는 우리가 자주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들은 정말 멋있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렇게 잘 산다하여 방위분담금 올리겠다고 하니 도둑놈이라 하며 지금까지 그렇게 받다가 갑자기 올리니 이는 우리를 무시한 처사이기에 도둑놈 심보라 한다. 우리가 국방비리만 잘 관리해도 그 정도의 군사력은 갖춘다는 논리로 또 포장해 버린다. 그리고 이참에 아예 나가라는 주장도 한다. 이 또한 그냥 들으면 대단히 정의롭고 애국심에 불타는 좋은 이야기로 들린다.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지금 세대에는 들리는 대로만 인식되어진다는 것이다. 논리고 주변 상황을 볼 것 없이 주전론은 애국자이고 주화론은 매국노로 평가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성으로 둔갑한 채 활개 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대는 먹고 살기 힘들다. 미국의 보호아래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제품을 수없이 실어 날랐던 초호황의 단물을 마신80년대의 세대와는 달리 치열하게 공부하고 경쟁하며 달려와도 직장 잡기 어려운 고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초호황의 시대에 일자리가 넘치고, 무엇이든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꿈의 시대를 살면서 꽃길만 걸어 온 배부른 선각자들께서 그야말로 밥 잘 먹고 배설하는 것들이 이 시대를 주도하는 주장이 되어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이러한 기득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미국으로 도움 받은 최고의 국방 상황과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초호황의 경제 혜택을 받은 줄을 모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이것이 바로 잡힐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저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미국의 존재와 한미동맹이 무언지도 잘 모르고, 동맹이 균열되었을 때의 모습들은 전혀 모르고,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반미를 주장하는 세력들의 자제분들은 고귀하게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시민권 받고,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그 배설과도 같은 요설에 그냥 휘둘리고 있으며 ‘ 이정도 사는 데 미국 없어도 되잖아’라는 참 편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미국도 우리를 혈맹이며 전략적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미국 공화당 내의 한반도 담당 상원의원들 사이에서의 기류는 한반도내에서의 한국이라는 정부의 인식과 역할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미 상원의원 코리 가드너와 한미동맹관계에 대해 의견교환을 나누고 있는 필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충돌이라고 멋들어진 표현은 내게는 관심사는 아니나 미국이 멀어지면 좋아할 것은 중국과 러시아이며 가깝게 있는 대국의 힘의 논리에 눌리게 되면 고려, 조선조 내내 힘없이 누려 지낸 시대가 다시 오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해 본다

힘에 의해 나라 잃고 설움 당하고, 총칼 앞에서 피의 항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과연 한번 잃은 주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면 답은 자명하다

대국에게 기대고 종속적으로 살자는 뜻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그야말로 최고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북한도 이미 중국의 경제력 앞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힘의 논리 앞에는 명분도 필요 없다. 자국의 이익 앞에는 어떠한 선과 악이 없다

전쟁나면 UN이 도와줄 거고 국제법으로 해결될 거라는 생각,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동북아의 균형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상상은 현실과는 완전히 다름을 빨리 인식하고 잘못된 정책과 방향에 대해 이제는 국민들에게 정확이 알리고 수정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권력에 취해 있는 자들의 문제인식의 한계가 있고 언론의 행태도 큰 문제가 있다.

시대정신에서 도외시 되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어쩌면 국가적 위기가 발생해야 재정비가 가능하리라는 위험하고 서글픈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때는 기존의 동맹의 개념과는 다른 철저한 사업적 방식의 관계유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 에이 설마 뭐 그 정도까지야 하겠어. 그렇게 우리 국민들이 우매하지 않아’라고 자위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있다. 정말 불과 3년도 채 안된 시기에 이렇게 북한스러워질 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는 분명히 위험 경고등이 켜져 있는데,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너무도 잘 사는 나라에서 성장 해온 터라 위기감이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최근에는 현장에서 취재하다보면 인식의 변화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집 사는 데 은행에서 돈 좀 빌리려는 데, 좋은 조건으로 우호적이며 오래 거래한 은행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출 없이 한 번에 집을 살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당연히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 은행과 거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야 이자가 좀 밀려도 집이 경매로 안 넘겨진다.

내 자산 상황을 잘 아는 오래된 좋은 은행을 두고 자꾸 신규 은행과 계좌를 만드는 것이 과연 얼마나 유리한지는 위기 상황이 닥쳐봐야 알게 된다.

지금 우리는 국가경영이라는 중요한 명제에 있어 감정과 선동이 아닌 냉정한 분석과 냉철한 판단이 중요한 시기이다

자칫하면 비오는 날 우산 뺏기고 거리로 나아가 앉을 수도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상황이다. 한미동맹은 가난한 집안에게 잘 살라고 무상 임대도 해주고, 일부러 납품도 받아주고, 조금 위험하면 아들도 보내주고, 그렇게 좋은 은행이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어렵게 설명하고 거창하게 설명해 봤자 인터넷시대에 전자사전으로 공부한 이 시대정신에는 맞지 않다

한미동맹,
그 가깝고도 뜨거운 마음이, 이제는 어렵고도 먼 길을 돌고 있다. 혼돈과 갈등의 시기에 지켜가야 하고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임을 이제는 더 많이 전도하고, 포교해야 한다. 종교처럼…

같이 갑시다 : Go Together

♣ 맥매스터 “北 핵 보유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 한반도 통일 원하기 때문”
    손턴 前 국무부 차관보 대행은 “북과 정상회담 하느라 시간낭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허버트 맥매스터사진 전 보좌관이 10일(현지 시각) “북한의 공허한 약속을 믿고 제재를 섣불리 완화해선 안 된다”며 “군사 옵션과 강력한 제재를 통합해 비핵화를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싱크탱크 민주주의수호재단이 워싱턴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북한과 또 한 번의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군사 옵션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대북 압박에)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6월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정은에 비핵화를 설득하기 위해 군사 옵션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었다.

맥매스터 전 보좌관은 만일 대북 제재 완화를 해 줄 경우 “북한과의 협상은 늘어지고 현상 유지 수준의 빈약한 합의가 이어질 것”이라며 “그러고 나서 북한은 그 합의를 깨버릴 것이다. 우리가 또 그렇게 (제재 해제를) 한다면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의 은행을 제재하는 방안을 거론하며 “아직 더 많이 쓸 (제재) 도구가 남아 있다”고 했다. 대북 제재의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배경에 대해 “공산주의 체제 아래 한반도 통일을 원하기 때문”이라며 “북한보다 40배나 경제력이 큰 한국을 당장 흡수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 통일을 위해 (핵을 이용해) 동등해지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을 맡았던 수전 손턴 전 대행도 이날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미국이 (북한과) 몇 차례나 정상회담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제재) 압박으로 거둔 효과마저 상쇄시켰다”며 “이제 (비핵화 협상의) 시간이 거의 없다. 북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시험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19년 10월 12일 기사)

 

언론속의 한미관계

♣ “미래 황금알” 양자기술산업…韓기업이 美·유럽 선점 나서

SKT 세계적인 양자기술 확보
KT·LGU+ 국제표준 예비승인
삼성도 IBM과 양자컴퓨터 연구
정부 정책적 지원은 거의 없어

양자산업 15년 뒤엔 400조 원대
반도체 규모로 빠른 성장 전망

양자정보통신 글로벌 각축전

미국이 최근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보안을 요하는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정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한국 통신사인 SK텔레콤의 힘을 빌렸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미국 최초 양자암호통신망을 구축하는 일에 양자통신 전문기업 ‘퀀텀엑스체인지(Quantum Xchange)’와 더불어 SK텔레콤 자회사인 IDQ를 참여시킨 것이다. IDQ는 양자키분배기를 공급하며, 퀀텀엑스체인지는 암호키(Key) 전송 거리를 확장하는 솔루션을 적용하는 협업이다. IDQ와 퀀텀엑스체인지는 현재 구축된 양자암호통신망을 내년까지 워싱턴DC에서 보스턴에 이르는 800㎞ 구간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일궈내며 경쟁력을 입증 받은 한국 이동통신사들이 양자암호 기술 개발 경쟁에도 뛰어들며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양자기술로 생성한 암호키를 송수신하는 양자암호통신은 패턴 분석이 불가능한 무작위 숫자로 강력한 안전성을 자랑해 우선 주목받고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20일 “공놀이로 비유하자면 기존 통신 방식에서는 누군가 중간에서 몰래 공을 가로챈 뒤 복제본을 전달해도 받는 사람은 진위 여부를 알기 어렵다. 반면 양자암호통신은 비눗방울을 주고받는 것과 같아서 제3자가 비눗방울을 건드리기만 해도 형태가 변형돼 해킹이나 복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양자암호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SK텔레콤은 2011년부터 양자기술연구소를 설립해 국내 양자정보통신 기술 개발을 이끌어왔다. 특히 지난 4월 3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5G 통신망에 양자기술을 적용하는 등 세계 최초 활용 사례를 만들고 있다. 2016년에는 세계 최초로 세종~대전 간 LTE 백홀에 양자암호통신을 적용했고, 2017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양자난수생성기(QRNG) 칩을 개발했다. SK텔레콤은 약 1년의 공동 연구 끝에 IDQ와 함께 유럽·미국에서 양자암호통신 구축 사업을 수주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IBM이 개발한 양자컴퓨터

SK텔레콤 외에 KT와 LG유플러스도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스터디그룹 국제회의에서 암호통신 네트워크 프레임워크 권고안 1건을 제출해 국제표준으로 예비승인을 받았다. 이 밖에도 삼성은 국내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IBM의 양자컴퓨터 활용 사례를 만드는 `Q네트워크` 일원으로 참여해 20큐비트(양자컴퓨터의 단위) 양자컴퓨터를 공동 연구하면서 실용화 사례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대기업들만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 구체적인 로드맵은커녕 관련 법제도 등 정책적 지원이 전무하다. 양자기술은 시장조사기관 가트너가 선정한 2019년 10대 전략 기술 중 하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양자 산업 시장 규모는 2035년 400조원대로 성장할 전망이다. 반도체의 뒤를 이어 새로운 먹거리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2016년 발행된 퀀텀 유럽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국의 양자정보통신 분야 지원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거의 최하위권인 17위를 기록했다. 향후 투자계획에 따르면 이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전망이다.

먼 미래의 일로 여겨졌던 양자컴퓨팅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는데, 한국만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위기에 놓인 셈이다.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국 정부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매년 수천억 원을 쏟아 부으며 양자컴퓨터 개발에 뛰어들었고, 일부 기업은 벌써 상용화에 성공해 활용 사례를 쌓아가고 있다. 한국은 2023년까지 약 435억 원을 투자해 ‘5큐비트 컴퓨터’를 가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IBM이 이미 개발한 사양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 정부도 발 빠르게 양자기술 선도를 위한 대규모 국책연구과제를 준비했지만 ‘시기상조’라는 학계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지난 정부 시절인 2014년 12월 당시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양자정보통신 중장기 추진 전략`을 수립해 국가 차원의 양자정보통신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 기반 조성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6년 하반기부터는 `양자정보통신 중장기 기술 개발 사업`을 기획해 투자 확대를 추진했으나 그마저도 좌절됐다. 늦었지만 산학연이 모인 국회 차원의 양자정보통신포럼이 출범하는 등 기본적인 논의는 시작됐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과 함께 이 포럼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16일 ‘양자응용기술 및 산업 진흥을 위한 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작년 말 미국 정부가 내놓은 양자지원법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아서 허먼 허드슨연구소 박사는 “양자정보통신은 5G와 나노 기술 분야와 연계돼 경제 성장을 이끌고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며 “미국은 양자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통해 과학기술을 넘어 한미 양국의 동맹을 더욱 강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출처 : 매일경제 2019년 10월 20일 기사)

 

한국전쟁 초기전투와 미군의 값진 희생

오산 죽미령 초전기념 평화공원 개장을 환영하며

최상진
수필가, 본 협회 편집위원

폴과 요셉

폴(Paul)과 요셉(Joseph)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규수의 미 육군 캠프인 캠프 우드에서 만났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두 사람은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젊음의 의욕이 넘치는 가운데 훈련 중 이었지만 승리자의 일원으로 꿈같은 이국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6일째인 1950년 6월30일 출동명령이 발동되고 7월1일 이다츠께 공항에서 4대의 더글러스 C-54 수송기에 분승한 그들은 스미스 특임부대의 일원으로 8시45분 부산에 도착한 후 오후 8시경 기차로 대전을 거쳐 오산북쪽 죽미령 언덕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나의 친구 Paul에게

– 중략 –

7월5일 오전 8시 피할 수 없는 전장의 불꽃이 타올랐어.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철수명령을 받았고

나는 폴이 있던 언덕으로 단숨에 달려갔지.

포화 속으로 탈출구를 찾으며 언덕을 올랐을 때

참호 속에서 웃고 있는 폴을 발견했지.

말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우리는

마지막 남은 필립모리스 담배 하나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피웠지.

진지에서 적들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참호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산마루 보이는 적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할 때

폴은 적의 포탄에 머리와 가슴을 맞았지

끔찍한 고통 속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전우, 그 죽음을 지키는 나

신이시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운 시련의 고통을 주려 하십니까?

친구의 눈물과 죽어가는 몸부림을 보며 가장 소중한 벗을…

친구의 창백한 얼굴엔 죽음의 가면이 드리워져 있었어.

나의 소중한 벗이 들이쉬는 마지막 숨소리를 들었네.

– 중 략 –

폴, 내 소중한 친구야

너를 위하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신이 나를 데려가는 그 날까지 영원히 너를 위해 기도할 뿐…

7월5일 첫 전투에서 전사한 소중한 친구 폴을 생각하며…

– 1995년 6월 Joseph A. Langone

초전(初戰), 오산 죽미령 전투

적의 진전을 지연하라!

극동사령부(사령관 맥아더)의 작전명령 1호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강화하여 지연전 수행부대를 북쪽으로 전진시키고 현재 서울에서 수원으로 남하하고 있는 적과 대치상황을 유지하면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킬 것.” 이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이 주도한 유엔의 의사결정 과정은 전광석화 같았으나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남하하는 북한군의 파죽지세 공세를 막을 수 없었다. 유엔 안보리는 불과 7일 동안 1차 결의안으로 ‘북한군의 침략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수 할 것’을 요구하였고 2차로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유엔의 이름으로 모든 지원을 제공 한다’는 결의안을 가결시켰지만 이미 서울은 함락되었고 대전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유엔군 파견의 합법적 절차를 거친 유엔은 1950년 7월5일 지연특공대로 미 제 8군 제 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와 제 52야전 포병대대가 주축이 된 540명의 스미스 특임부대를 선정하였다.

‘7월 5일 오전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 모습이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임부대는 오후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27여 명이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 해설 인용)

죽미령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이 첫 격돌한 전투였고 상황은 군사력 10 대 1, T-34 전차포와 105mm 곡사포의 대결로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꽃다운 나이의 조셉도 생전 생각하지도 못한 이국땅 낯선 곳 죽미령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죽미령 전투에서 미군은 죽음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미군이 지킨 6시간 15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위치에 있는 유엔 참전국들도 전쟁에 대한 파괴와 염증은 패전국과 마찬가지였다. 유엔이 결성되었지만 집단안전보장 체제 가동을 위한 합의와 결정, 또 자국 군대 파견의 절차과정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반면 전쟁 당사자인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과의 교전을 원치 않았으며 만약 미국의 참전한다 하더라도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장내려는 속셈인 만큼 전략은 오직하나 속전속결 이었다.

일본의 맥아더 사령관은 6월29일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한 후 지상군파견을 결심하였다. 미군은 죽미령 전투를 통해 상대에게 미군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전쟁의 성격과 상대의 강약을 파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급조된 스미스 특임부대 만으로 대처한 북한과의 초전 죽미령 전투는 패전으로 끝났고 후속부대인 미 제 24사단 제 34연대가 구축한 오산의 후방 평택-안성 저지선마저 북한군의 파죽지세 공세에 밀려 천안 남쪽 공주 지역까지 철수한 미군은 7월8일 금강 유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반면 미군참전으로 남진속도가 늦춰진 북한군은 미 공군의 공습으로 전력은 다소 약화되었지만 대대적 낙동강 공세를 준비하고 미군은 주력부대의 이동과 공군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전선이 다소 안정된 가운데 수도 서울 탈환을 위한 9.15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소중한 시간을 더욱 소중한 목숨으로 지연시킨 죽미령 전투의 6시간 15분은 비록 패전이기는 하나 한국을 구사일생 방어해준 골든타임 이었다.

특임부대장, 스미스 중령(예비역 준장)

그는 1916년 5월 7일 미국 뉴저지 주 렘버트빌에서 출생하고 1939년 뉴욕의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찰스 비 스미스 중령은 2차 대전 시 일본과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한국전쟁의 구원투수로 오산 죽미령 전투에 투입되었다. 1975년 7월과 1987년 7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오산 죽미령 전투 전몰장병 추도식 및 유엔군 초전 기념식에 참석한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그는 인터뷰에서 “저는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북한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세계평화와 한국의 안보유지에 작은 공헌으로 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계속 치러야 할 대가는 ‘힘과 경제 그리고 헌신’이라는 것을 항상 가슴깊이 새겨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2004년 5월 27일 88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대한민국을 지켜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오산 죽미령 초전기념 공원 개장

오산의 북쪽에 자리 잡은 죽미령(竹美嶺)은 글자 그대로 대나무가 아름다운 고개 마루이다. 오산 평택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교통이 발달되어 평시에는 살기 좋고 인심 좋은 곳이기는 하나 환란 시는 항상 아비규환 전화(戰禍)의 현장이었다.

1955년 7월5일 죽미령 전투 5년 후 미 제 24사단 장병들이 참전용사 540명을 기억하는 540개의 돌을 쌓아 (구)유엔군 초전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1982년 맞은편 둔덕에 (신) 초전 기념비를 건립하고 2013년 유엔군 초전 기념관을 정식 개관하였다. 위도 37도의 평택-안성-원주-삼척線은 한국전쟁 시 3차례 전장(戰場), 즉 1950년 7월의 북한군 남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한군 퇴각, 마지막으로 1951년 중공군 1차 춘계공세의 한계 저지선으로 혹독한 전란을 겪었고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오산, 평택, 안성은 육로교통의 대동맥으로 남해와 서해를 통한 외적의 통로였고 격전지였다.

또한 한반도 5천년 역사에서도 수많은 내전과 피난민들로 고통을 겪은 이 지역은 평화에 대한 갈망이 남다르다. 오산은 미군의 초전지역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과 6.25 전쟁의 올바른 이해와 오산 죽미령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 위해 현재 초전기념관 부지에 약 6만3천 평을 추가 매입하고 182억 원을 들여 ‘오산 죽미령 초전기념 공원’을 조성, 11월 초 개장을 앞두고 있다.

6.25 초기전투와 미군의 고귀한 희생

6.25전쟁 발발에서 천안전투에서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될 때 까지 국군에 대한 기록이나 무용담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해방 후 군정종료와 함께 1949년 6월30일 남한 주재 5만의 미 지상군 전투 병력이 철수했다. 군정 당시에도 소련과 북한은 끊임없이 미군철수를 주장해 왔고 비밀리에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고 만 1년 후 6.25전쟁은 발발하였지만 한국군(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라를 지켜줄 군대도 무기도 없었다. 만일 북한군이 T-34 전차부대와 같이 제공권을 압도할 수 있는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10일 전쟁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끔직한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초기전투에 투입된 미군들은 인간방패로 적의 탱크를 저지하였고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

본지(영원한 친구들)에서는 이미 제 232호(오산 스미스부대 추모비를 다녀와서; 본지 편집위원 김봉주/2019년 9월호), 제 242호(개미고지전투 미군장병 전몰추모비 답사; 본회 사무국장 채연석/2018년 12월호) 통해 미군의 초기전투와 참전비 답사기를 게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우리의 맹방으로 한미동맹의 초석이 된 미군 장병들의 헌신을 기린바 있다.

참전비 참배의 목적은 그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함이다. 준비된 군대와 무기로 남침한 70년 전의 북한과 핵으로 무장한 지금의 북한은 힘의 논리로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 상황은 그 때와 유사하게 전개되고 좌편향의 종북세력은 상대의 평화공세에 동조하여 정신적, 군사적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의 슬픈 역사는 다시 기록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국민과 정치인들은 이 땅에 부국강병과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0세인생 생활의힌트 (14)

이성원
한국청소년도서재단이사장, 본 협회 부회장

“후반생을 어떻게 살면 좋을까.” 일본에 가면 서점에서 주로 이런 주게 책들을 고릅니다. 와다(和田秀樹)라는 저명한 노인정신과 전문의의 ‘치매와 우울증’에 대한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입니다. 노후 건강의 3대 장애인 암과 치매 그리고 우울증에 대해 집안 50대들에게 몇 가지 얘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2세들에게

o : 30년 전 우리 세대가 50대 쯤일 땐 암이 성인병으로 세계인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1971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암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막대한 국가예산을 투입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미국국립보건원이 내놓은 판정은 단 한줄, ‘인간이 졌다’는 결론이었다.

그간 많은 병리학적 연구는 내놓았지만, 현재의 치료술로는 암환자의 수명을 연장하지 못한다. 암에 대한 뚜렷한 전망이 서기까지는 앞으로도 몇 십년, 혹은 백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시 사망 원인의 3분의 1이 암이라는 통계 앞에 막연한 불안이 일어, 조기 발견을 위해 종합병원을 들락거렸다.

일본 암 의료계의 권위인 게이오대학의 곤도(近藤誠)박사가 나를 이 공포에서 구제해 주었다. “조기 치료는 수명 연장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연장된 듯이 보이는 것은 발병 전에 치료를 시작해 고만큼 치료기간이 길어진 것이지, 수명이 연장된 것이 아니다. 발병 후 치료와 생존기간에는 차이가 없다.”

암은 신체의 노화에서 오는 병이므로 노화가 피할 수 없듯, 암도 피할 수 없다. 함께 끼고 살아갈 공생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이하는 ‘치매’와 ‘우울증’에 대한 와다박사의 진단이다.

o 치매: 지금 50대에겐 치매는 먼 훗날 얘기 같겠지만, 이미 고령에 접어든 부모세대는 85세 까지에 40%에서 55%, 거의 반수가 치매에 걸린다는 통계다.

치매 환자에겐 한가지 커다란 은총이 있다. 가족이 환자가 마음 편하도록만 대해주면, 환자는 과거의 모든 불행을 잊고, 행복했던 사건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배회나 이상행동 같은 것도 마음에 불만과 불안을 느낄 때 일어난다.)

가족은 환자의 행동에 대해 따지거나 책임을 묻지 말고, 그냥 얘기를 들어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면 된다. 그것이 환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길이라는 것이다.

o 우울증: 암이나 치매와 달리 우울증은 노화에서 오는 병이 아니다. 정년 등 오랜 일상생활이 일시에 툭 끊어지고, 사회와 가정에서 자기의 존재이유가 없어졌다는 자기 연민에 빠져 의기소침해진다. 과거에 좋았던 일은 하나도 없고, 왜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자기 일생을 전면 부정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망상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다 자기를 싫어하고, 앞으로는 가난해질 거고, 나쁜 병에도 걸려있다는 등이다. 난치병이다. 격심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는 증상으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자살을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치유도 가능하지만, 재발도 하는 어려운 병이다.

전문의와 왕래하며 수시로 전문적인 조언을 듣는 것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온다. 그러나 근본은 스스로 과거의 사회적 프라이드를 다 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 즐거운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결 론

암, 치매, 우울증 등 노후 3대 질환은 모두 예고 없이 찾아온다. 특별한 예방책도 치료법도 없다. 근본적인 대책은 평상시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이다.
병이 나면 그때 가서 치료에 임한다. 암은 대수술이나 항암제 같은 극약을 써서 완치(Cure)하려 들지 말고, 통증관리(Care)수준에 머물고, 치매는 좋은 가족관계로 안정을 찾고, 우울증에 대해선 과거에 대한 오기를 버리고, 평범한 취미인이 되면, 3대 장애를 넘어 행복한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항암제는 희소암인 급성백혈병, 악성임파종, 소아암, 고환암, 자궁융모암 등 몇 가지 암에만 효과가 입증 돼 있고, , 위장, , 유방 등 고체 장기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뿐더러, 딴 정상 장기를 해쳐 사망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곤도)

 

산울림

정소성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소설가, 본 협회 편집위원

푸르다 못해 거무스레하게 변한 산과 산들의 끝없는 행렬이 진행되고 있는 곳, 내 고향 하정리이다. 오늘 따라 더욱 짙어진 거무스레한 산의 행렬 사이로 귀청을 찢는 듯한 산 정적이 드리워져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득한 세월 저 너머에서 있었던 일들을 수시로 추억하는 버릇 같은 것이 생겨 버렸다.

짧지 않은 내 인생에서 광호는 언제나 나의 맞수였다.

우리 둘이 인생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맞짱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백산맥 속 두메산골이 같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 산골마을은 하정리(下井里)라고 불렸는데, 골짜기에 박힌 마을의 북쪽 산발치에 마을 공동우물이 있어서 였다. 하정리에는 한 이십여 호가 모여서 살고 있었으니 산골마을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광호네는 원래가 조상 대대로 농짝을 만들어 팔아서 가계를 꾸려온 집안이었다.

광호네가 농짝을 만들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태백이나 영월 5일장에 나가는 것을 나는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다.

경상도 영주나 부석 봉화장터까지도 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국민학교 3학년에 다닐 무렵 광호가 자기네 소달구지가 태백 장터에 농짝을 싣고 가는데 같이 타고 갈 수 있으니까 함께 가자고 나를 꼬드긴 적이 있었다.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태백이라는 데를 말만 들었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오면 태백 무슨 탄광에서 일하고 있다고들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었다.

태백이라는 데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대단한 곳인 듯했다.

아마도 6.25라는 전쟁이 끝난 지 아직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도 산골짝 동네라 논다운 논이 없었다. 자기 땅으로 논 다섯 마지기를 부치면 부자 소리를 들었다.

동네사람들은 대부분 화전을 일구어 곡식을 구하거나, 아니면 영월이나 태백사람들의 땅을 도지로 얻어 경작했다. 수확량의 절반씩을 지주와 나누어 가졌다.

“순달아, 니 이번 태백 장에 가는 기제? 확실히 말해라마. 달구지에 자리 많지 않다. 먼저 말해 도고.”

“내가 안 가마 갈 아가 또 있나? 영구는 안갈 낀데…”

숙자는 아비와 어미가 없고, 할미하고 둘이서 동네 구석지 외딴 집에 사는 여자아이다. 그런데 숙자의 할미는 무당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무당할미를 귀신할미라고 불렀다. 이 무당할미는 직업은 없고 동네 사람들 굿을 해주고 약간의 복채와 굿음식 남은 것으로 살고 있었다. 우리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두 세 시간 숙자보다 늦어서 같이 고개를 넘어서 우리 동네로 하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하교시간이 틀린다고 하더라도 왕복 삼십 리가 되는 우리들의 긴 통학거리이고 보면 우리가 숙자를 만나는 기회는 자주 있었다.

우리는 숙자가 귀신할미와 같이 살아서 기분 나쁜 아이라고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문제는 숙자가 나날이 조금씩 예뻐진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영구가 이런 소리를 했다.

“순달아, 내 너거 하정리에 한분 가마 안 되겠나?”

“우리 동네는 뭐 할라꼬? 볼 거 아무것도 없다 아이가. 절간도 없고 물레방아간도 읎다…”

“그래도 구신 할매는 있잖나.”

“구신 할매 봐서 뭐 할라고? 어떤 때는 무섭데이. 머리가 구신처럼 허옇고 어떤 때는 두 눈에서 불이 번쩍거린데이.”

“그라마, 영구가 볼라카는 사람은 구신할매가 아이라, 구신할매 손녀 숙자다.”

“숙자라이? 그 냄새나는 쪼꼬만 가시나를 뭐할라고 볼라고 여기까지 올라카노? 학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

“순달아, 니 눈에는 숙자가 냄새나는 쪼꼬만 가시나로 보이나?”

“그라마, 그 가시나가 옆에 오마 재수 없다는 생각밖에 없다. 무신 귀신가시나같이 으스스한 생각밖에 안들더라.”

“바로 그기다. 숙자가 어릴 때 숙자 아이다. 을마나 이쁜지 곁에 오마 으스스 한기가 든다 아이가. 니는 그걸 귀신같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로는 가가 너무 이뻐서 그런 기분이 든다 아이가.”

나는 혀를 찼지만, 사실 나도 광호가 하는 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숙자는 초등학교 2학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말 귀신같은 귀기를 거느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태를 띄어 갔다.

영구가 하정리에 오던 날, 나와 광호 그리고 상섭이가 그를 맞아 우리 집에서 놀았다. 상섭이는 동네 사람들 머리를 일 년 동안 깎아주고 가을에 이발료를 쌀로 받아서 살고 있는 홀아비 소천의 아들이었다.

상섭이네 집은 바로 숙자네 집과 나란히 있었는데, 두 집만이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 집만이 서로들 내왕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니 재 너머 학교 가다가 우리 상섭이 엉딩이를 발로 찼제…그러마 안 된다…”

하면 우리는 무조건

“잘못했습니더. 다시는 안그럴께예.”

“야 못이 더럽게 크다야-”

영구가 소리쳤다.

“이쪽은 모래무지나 잉어가 안 잡힌다. 저쪽 좀 얕은 데로 가마 잘 잡힌다. 요 새끼들이 물이 얕아야 쳐묵을라꼬 떠오린다 아이가-”

광호가 말했다.

상섭이는 형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낚싯밥을 새것으로 대기가 바빴다. 그리고는 잡힌 잉어와 모래무지들을 커다란 대나무 통에 주워 담았다. 통 속에 갇힌 물고기들은 은빛색채를 번득이며 퍼득거렸다.

“상섭아, 니 초고추장 있나?”

내가 물었다.

“없어…”

“그라마, 너거 반 친구 숙자한테 좀 갖고 오라 캐라.”

광호가 말했다. 어느 새 대나무 통 안에는 물고기들이 절반이나 차올랐다. 상섭이는 고기를 모으기 위해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짜석아, 그거는 내가 할끼이까네 니노마는 구신할매집에 가서 가시나한테 초고추장 좀 달라캐라. 너거 둘이는 같은 반이까네 같이 학교 가고 같이 재 넘고 같이 집으로 온다 아이가. 집도 딱 들어붙어 있으민시로 그것도 좀 못하나!”

“숙자가 내 말을…내 말을…들어쳐묵겠나…”

상섭이는 투덜거리면서 대나무 통을 내려놓고 귀신할머니집 쪽으로 걸어갔다.

“숙자야–”

목소리가 돼지 목따는 소리였다. 흙집 담에 난 문이 뽈좀히 열리더니 콧날이 오똑 서고 푸른 눈매를 가진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상섭이를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투였다.

“순달이하고 광호가 잡은 모래무지 처먹는다고 초고추장 좀 달래. 재 너머 읍내에서 영구가 왔다…”

“…”

숙자는 아무 말도 안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는 침묵이었다. 한참 만에 다시 문이 열리더니 숙자가 이런 소리를 했다.

“별노무 자식들이 다 있다. 저거가 3학년이라고 우리를 부려쳐묵나! 그래도 잉어를 쳐묵을라카마 초고추장은 있어야제. 가 있거라. 내가 만들어갖고 따라갈게. 할매가 오늘은 집에 없을 끼다. 그래서 내가 해줄라칸다. 어서 꺼지거라. 거기 서 있으마 멀리서 동네 사람들이 보고 놀란데이!”

“다음에 홍수지마 재 너머 도랑 건널 때 또 업어주마.”

상섭이는 숙자의 아픈 데를 찔렀다. 홍수 져서 도랑물이 불어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섭이가 업어주지 않으면 건너갈 수가 없다. 홍수지는 날이 상섭이가 숙자한테 대접받는 마당쇠가 되는 날이었다.

“듣기 싫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마 니는 내 손에 죽일끼다. 알았제! 어서 낫가리 뒤로 몸뚱이를 낮추거라. 동네사람들 본다카이! 이 빙신아!”

상섭이가 못 가로 오고 나서 한참 만에 과연 숙자가 주전자에 초고추장을 해가지고 나타났다.

“지린내 나는 가시나가 증말 잘 생겼다. 비단 옷만 입으마 태백시장에 갖다놔도 안빠질 끼다마!”

영구는 숙자한테 혹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숙자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영구야, 너거 아부지 지서주임한테 말해서 재 밑에 흐르는 도랑에 나무다리 좀 놓아달라캐라. 우리는 다리 걷고 건느마되지만, 숙자는 치마를 입은 데다 다리가 짧아갖고 안 된다 아이가. 학교를 못가거나 아이다 상섭이가 숙자를 업고 건넌다카드라.”

잠을 깬 아이들은 홀라당 벗고 못 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을 쳤다.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 옷을 주워 입었을 때, 광호가 쓰윽 나섰다.

“너거 놀라지 말거래이. 내가 숙자를 꼬셔갖고 점심 묵고 숙자네 집에서 신랑각시 놀이를 하기로 했다.”

“니가 운제?”

영구가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너거 초고추장 쳐 묵고 나가 자빠졌을 때 내가 다 가시나를 꼬셔 놨다. 지도 가시난데 무서운 할매하고만 사는 것보다는 우리 같은 잘 생긴 머스마들하고 놀이하마 조을 거 아이가!”

광호는 한수 높았다. 순달이하고 영구보다 한발 앞서서 걷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집에 창하고 칼, 그라고 구신들이 득시글거리지 않나! 무서버서 우째 그 집에서 하노?”

내가 말했다.

영구가 신방으로 들어간 이후 잠시 시간이 흘렀다. 뜻밖에도 신방에서는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영구가 숙자더러 자기의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갔더니 숙자는 보료 위에 누워 있었다. 꽤 괜찮은 요잇이 깔린 무명 요 위 한 귀퉁이에 기워져 있었다. 비단인 듯했다. 숙자는 방안으로 들어온 나를 거들떠도 안보고 옆으로 누워 있었고 한쪽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요 위로 올라가 숙자 옆에 누웠다. 숙자가 머리를 감쌌던 팔을 내려 내 머리를 감쌌다. 신랑각시 놀이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가르쳐주는 듯했다. 나는 갑자가 속이 욱하고 토할 것만 같았다. 숙자에게서 정말 알 수 없이 역겨운 냄새가 풍겨져 왔기 때문이었다. 숙자가 입고 있는 옷에서 피어오르는 냄새이기도 했고, 아니면 머리채에서 피어오르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면 숙자의 몸, 어쩌면 사타구니에서 솟구치는 냄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오라버니만 좋다아…”

분명 이런 소리가 들렸는데, 누가 하는 소리인지 금방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숙자의 목소리였지만, 숙자가 한쪽 팔로 자기의 얼굴을 감싸고 있어서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주변에 둘러서 있는 무시무시한 귀신형상들이 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서 이 고약한 냄새 풍기는 여자아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 몸뚱이 위에 다시금 픽 스러졌다. 그 구역질나는 냄새를 다시 맡아보고 싶은 욕구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내 작은 몸둥아리는 숙자의 몸통 위에 픽 스러졌다. 나는 그만 혼절하다시피 코가 꽉 막혀오는 호흡곤란을 느꼈다. 악취가 너무나 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방바닥으로 굴러 콧구멍을 숙자의 몸통으로부터 떼어놓았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귀신할매가 없는 틈을 타서 밤새 숙자네 집에서 놀았다. 신방에 늘어선 귀신형상들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광호는 귀신형상들에게 보자기 같은 천을 덮어 씌어 버렸다. 어쩐지 조금은 무섭고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순서를 정하거나, 아니면 팔씨름, 아니면, 두 다리를 앞뒤로 벌리고 한 쪽 손을 마주잡고 상대방 쓰러뜨리기를 해서 숙자를 차지할 순서를 정하는 놀이를 했다. 얌전한 신랑각시 놀이는, 이제는 힘과 재주로 겨루어서 순서를 차지하는 놀이로 변했던 것이다.

숙자네 집을 벗어나서 동네를 돌아서 재를 향해 방향을 틀던 우리들은 멀리 숙자네 집 담벼락에 붙어서 꾸물적거리는 아이, 광호를 보았다.

우리를 알아본 광호는 조금 놀라는 눈치더니 이윽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니 집에 가서 안자고 거기가 뭐했노?”

영구가 물었다.

어느 날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읍내 지서에서 순경이 와서 리장인 아버지와 머리깎아주는 상섭이 아부지 소천어른 그리고 염소수염을 한 영달이 어른 등 동네 어른 서너 명을 불러서 재를 넘어가 도랑에 나무다리를 놓았다. 다리는 튼튼했다.

상섭이는 숙자가 노골적으로 괄시를 해도 아무런 불평도 안하고 묵묵히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러면 숙자는 상섭이가 불쌍하다는 듯이 말 한 마디를 건네주곤 했다.

나는 광호가 숙자와 함께 학교 가는 길에 나를 붙여주지 않을까봐 우리 집 뒷마당에 서 있는 밤나무에서 추수한 밤이나, 찐살같은 것을 늘상 녀석에게 주었다.

“순달이 니도 영구만큼이나 숙자를 좋아하는구나. 너거 그래싸도 소용없다. 숙자는 나만 좋아한다카이…그기이 무슨 수로 그런지 아나?”

“…”

“다아 수가 있다 아이가! 순달아 내한테 좀 배우거라. 그래 날 따라와라. 내가 그걸 가리치줄끼다마. 사실은 가르쳐주마 안 되는데…”

나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쉬어빠진 행주냄새 같기도 하고, 썩은 고구마 냄새 같기도 한 숙자의 냄새를 나는 더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상 하고 있었다. 그런 숙자를 꼬시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니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귀신할매가 집을 비운 날 밤 신랑 각시놀이할 때 내 차례가 되어서 방안으로 들어갔더니 각시 노릇을 하던 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광호 오라비를 더 좋아한다고. 그런가하면 숙자가 나를 상섭이처럼 괄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살가운 시선을 주는 것만 같았다.

달빛마저 사그라진 어느 날 밤, 우리 집 사랑에서 천자문을 같이 읽던 광호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이런 소리를 했다.

지금 보니, 거기는 언젠가 내가 영구를 우리 집에서 재우고 재를 향해 가다가 여기 담벼락에 붙어 서 있던 광호를 보았을 때의 바로 그곳이었다.

“뭘 집어 넣었노?”

“세숫비누다.”

“그라마 숙자가 아나?”

“내일 봐라, 숙자 낯짝이 깨끗해졌을 끼고 몸에서 냄새도 덜 날 끼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숙자에게서는 그 구역질나는 고구마 썩는 냄새 대신에 코를 따갑게 하는 비누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것이 광호가 나에게 가르쳐준다는 바로 특효의 숙자 꼬시는 방법이란 말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시시껄렁한 잡동사니를 자꾸만 사다주는 것이 무슨 그런 신통한 방법일 수 있나.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 하정리 마을에 도무지 본 적이 없는 엿장수 한 사람이 찾아들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무렵 엿판을 멜빵을 해서 가슴팍에 매달고 키가 조그만 사내가 산악을 돌다가 우리 마음에 이른 것 같았다. 산악을 돌았으니 그가 엿구루마 같은 것을 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산간을 두 발로 헤집고 다니는 엿장수였다. 다들 없던 시절이라 이런 엿장수들이 수지가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 보이까네 할배가 예사로 주름이 깊던 게 아니더라고. 무신 탈나는 게 아닐까…”

“걱정도 팔자지. 무신 그런 걱정을…홀로 살던 사람들 노인이건 중늙은이건 서로 마음 맞아 같이 살마 그거보다 좋은 게 어디 있노 말이다.”

“그런데 무당이 서방 얻을 수 있노 말이다.”

“그라마, 아무 상관없다 아이가! 중들이 여편네 얻고, 신부가 파계하고 장가가는 세상이다. 무당이 시집 가는 거 아무 상관없다 아이가…”

“그런 뜬소문이야 나도 들었지만 소천이도 점잖은 사람, 설마 무신 몹씰 짓이야 할라고…”

“이 사람,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무신 일이 벌어져도 특별난 게 없다 하지를 않나! 조물주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럴! 그래야 인종이 씨가 마르지를 않을 거 아닌가베!”

소백산맥 깊숙이 들어앉은 산간 오지 마을에 엿장수 할배가 나타남으로써 심심하던 입들에 장날이 선 것이다. 그러나 별별 희한한 입방아만 찧을 뿐 무슨 뾰족한 눈요깃거리가 나타나지를 않았다. 언제나 침묵에 갇혀 있는 무당할매집에는 깊은 침묵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장님요, 우리 할배가 죽었어예!”

“할배라이? 무신 소리하노 니? 니가 할배가 있나?”

“할배는 없지만 그 집에서 사는 엿장수 할배는 있잖는교와!”

우리 어메가 한 마디를 했다. 무슨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버지가 불러준 어른들의 집을 돌면서,

“사람 죽었구마! 귀신할매집으로 오시랍니더!”

내가 상섭이를 데리고 무당집에 도착해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호롱불이 켜진 신당에 모여 있었다. 조용들 했다. 뜨내기 할배가 죽었기 때문에 슬피 우는 사람도 없었다.

나도 머리를 디밀고 방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조그만 영감 하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당 한 구석에 누워 있었다.

하루가 더 지나고 엿장수 할배의 죽음은 복상사라는 지서주임의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날로 야산에 매장되었다. 아무리 찾아도 기별을 해야 할 가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지서주임의 결론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지서주임의 처사를 보고 다들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복상사라는 기이 귀 뒤로 피가 마구 쏟아지는 병이라예?”

내가 물었으나 대꾸하는 어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서장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 흐르는 세월은 나를 결국 갑년까지 끌고 온 것이다.

*정소성
서울대, 프랑스그러노불대 졸업(문박),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월탄문학상, 박영준문학상, 류주현문학상 등 수상, 소설집 20여권 발행

북한의 대남전략과 한미동맹의 위기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대한민국의 안보는 크게 ① 한미동맹(국군과 주한미군) ② 국정원 등 안보수사기관 ③ 국민의 안보의식이라는 3가지 축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가안보의 3대 축이 모두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안보의 핵심 축이자 강력한 전쟁 억지력(deterrence)인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있다. 이의 근본 원인은 북한의 대남전략(對南戰略)에 부응하는 문재인 정부의 안보정책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대남전략 체계

북한의 대남전략을 이해해야 한미동맹의 위기 상황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북한의 대남전략(對南戰略)이란 김씨 집단의 정권 목표인 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전조선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남한을 향해 전개하는 모든 실천적인 행동지침을 말한다. 따라서 대남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의 이른바 ‘전조선 혁명’ 전략을 파악해야 한다.

북한의 전조선혁명 전략은 크게 남조선혁명 단계와 조국통일 단계로 구분되는데, <도표>에서 보듯이, 1단계(당면목표, 남조선혁명 완수)인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 단계와 2단계(최종목표: 적화통일)인 남북합작을 통한 사회주의혁명 단계가 그것이다.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전략은 북한의 남한사회 성격평가에서 비롯된다. 북한은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한국 사회를 미국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식민지사회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해방’이란 남조선혁명을 위해선 먼저 남한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미 제국주의(주한미군 및 미 대사관 관료 등)를 남한 땅에서 축출하고 남한민족의 해방을 이룬다는 의미이며, ‘(인민)민주주의혁명’이란 미국의 대리통치정권이며 독재정권이라 규정하는 남한 정권을 남한 인민의 힘으로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체제인 인민정권(민족자주정권이라 표현)을 수립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해방은 ‘미제축출=주한미군 철수자주화’를,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남한정권 타도 후 인민정권 수립민주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어 북한은 2단계로 남북합작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을 진행시켜 이른바 전조선혁명을 완성한다는 전략이다.

<도표1> 북한의 전조선혁명 전략

위 전략은 김일성과 김정일 정권에서 체계화된 것인데 김정은 정권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김정은은 제4차 당대표자회(2012)와 제7차 당 대회(2016)에서 당 규약을 수정했으나, 이른바 남조선혁명전략인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노선을 그대로 채택한바 있다. 대남전략에 입각한 김정은의 대남통일과제는 2016년 <제7차 당 대회 사업총화보고서> 중 ‘제3편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에 잘 집약되어 있다.

김정은은 제7차 당 대회 연설을 통해 ① 우리 대에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 ② 조국통일노선은 조국통일 3대헌장에 전면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③ 북과 남은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는 위에서 연방 국가를 창립해야 한다. ④ 민족자주와 민족대단결, 평화보장과 연방제 실현, 이것이 조국통일3대헌장을 관철하여 조국통일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한 당의 투쟁방침이다. ⑤ 이를 위해 “대조선적대시정책 철회,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남조선 침략군대(미군)와 전쟁장비 철수, 전쟁연습 중단, 대북 심리전방송과 삐라살포 중지, 화해와 단합에 저촉되는 각종 법률적·제도적 장치(국가보안법, 국정원 등 안보수사기관 해체 등 의미)의 제거” 등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북한 대남전략의 핵심은 한국 땅에서 강력한 전쟁억지력인 세계 최강의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한미동맹의 근간을 무력화하고 적화통일의 여건을 조성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북한은 민족자주권을 확립해야 통일이 된다는 미명 하에 ‘반미자주화투쟁’을 선동하고 있는데 핵심 내용은“주한미군 철수, 조미 평화협정 체결, 유엔사 해체”등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한미동맹의 근간을 위협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평화라는 미명 하에 북한의 대남전략에 부응하는 안보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한미군 철수론

북한의 대남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주한미군은 이른바 남조선혁명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세계최강의 미군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한 북한의 남조선혁명은 요원하다. 북한은 전쟁을 개시하면 한국군과 2만 7천여 명의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미 본토에서 ‘시차별 부대전개목록’(TPFDL)에 입각해 투입되는 69만 명의 증원군을 상대해야 한다. 일찍이 김일성은 남조선에 주한미군이 있는 한 남조선혁명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주한미군 철수’를 대남혁명의 선결과제로 설정한 바 있다. 북한은 남한혁명의 최대 장애물인 세계최강의 미군을 남한 땅에서 철수시켜 군사적 공백상태를 유도하고 이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적화통일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북한의 남침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큰 억지력(deterrence)인 주한미군을 먼저 철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의도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문정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고 있으나, 「판문점선언」(2018.4.27.)에서 명시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통해 종국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실제 문대통령과 김정은은 한때 ‘북한의 비핵화’(북핵 폐기)는 뒷전으로 밀어 버리고 ‘종전선언’의 채택을 위해 미국을 압박하는 모습을 연출한 바 있다.

종전(終戰)선언이란 한반도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겠다는 선언이다. 현재 한반도는 휴전상태이다.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불법 남침을 단행하여 3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정전)협정을 맺었고, 이러한 휴전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선언에 반대할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종전선언은 북한의 위장 평화전술에 부응하는 반()안보적 선언이다.

북한이 비핵화 이전에 종전선언 채택에 주력하는 저의는 ①한반도의 전쟁종식을 선언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위장)평화 분위기에 도취되도록 하고 ②현 정전체제를 무력화시켜 유엔군사령부를 불능화시키고 ③ 평화협정 체결을 유도하여 ④ 적화혁명의 걸림돌이 되는 세계 최강의 미군을 감축 또는 철수시켜, 6.15 공동선언 제2항에 명시된 낮은 단계 연방제와 연합제 통일 후 높은 단계연방제를 달성하여 결국 북한 정권의 궁극적인 목표인 전 한반도의 공산화통일(적화혁명) 여건을 조성시키려는 것이다. 즉 종전선언은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 축인 한미동맹을 약화, 무력화시켜 이른바 적화혁명을 앞당기자는 것으로 집약된다.

북한의 평화협정은 전쟁협정 !

평화협정 체결도 종전선언과 같은 연장선에서 제기된다. 종전선언 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의 논리를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시켜 우리 내부의 군사적 공백을 틈타 무력으로 적화통일 하겠다는 간교한 책략이 도사리고 있다. 국민들은 평화에 환호하나,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전쟁협정 체결 주장에 다름 아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정부가 추진 중인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 추진도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려는 북한의 대남전략에 부응하려는 시책이다. 한국은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강력한 군사동맹을 구축하고 있다. 이의 물리력인 한미연합사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자동개입함으로써 인계철선(trip wire)의 역할을 하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이다.

우리사회 일각에서 제기하는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작전지휘권이 미국에 예속되어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군의 통수권은 분명히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으며 평시 작전통제권도 1994년 12월 한국군에게 이양된 바 있다. 다만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아닌 ‘한미연합사령부’에 부여한 상태이다. 따라서 북한의 전쟁위협에 공동대처하기 위해 한미 공동방위기구인 ‘한미연합사’에 귀속된 전시작전통제권을 놓고 미국에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논리는 부당하다.

이의 연장선에서 문정부가 자주국방이라는 미명 하에 추진하는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은 유엔사와 한미연합사 및 주한미군의 위상 변화를 수반하며, 인계철선 기능의 부재로 미군의 자동파병을 어렵게 하여 결국 적화로 가는 비단길을 깔아 주는 격이다.

기타 한미동맹을 균열시키는 사례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말로는 한미동맹의 강화를 외치지만, 현실은 한미동맹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앞선 사례는 문정부가 북한이 대남전략에 충실히 부응하여 안보의 핵심 동력인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핵심 사례이다 .

이외에도 ▲기 배치된 사드(THAAD)의 정상적 작동 방해꾼들에 대한 지속적 묵인 ▲중국의 압력에 굴복한 ‘3 NO 원칙’(사드 추가 배치 불용,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 미 참여, 한·미·일 3국 군사동맹 반대) 수용 ▲유엔사 관할권을 무시한 평양공동선언 부속 남북군사합의서 채택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강행 등이 있다.

한미동맹의 위기 근원

한미동맹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주 요인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동맹인 미국과의 ‘신뢰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의 기저에는 문정권의 대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와대 내에 주사파 운동권 출신 참모들의 반미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운동권 시절의 반미 적대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통 관료출신의 청와대 외교안보라인들도 이들에게 동화되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코드화된 정책 대변에 연연하고 있다.

한편 외교부는 미국과의 당당한 협력외교를 전개한다는 미명 하에 ‘(한미)동맹파’를 적폐 시하고 이른바 자주파들을 전면에 내세워 대미정책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말이 ‘자주파’지 그들이 정책패턴을 보면 ‘반미/대북 굴종파’라 할 수 있다.

동맹이란 양국이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면서 정책연대와 공조를 통해 각자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문정부는 동맹인 미국을 외면하고 북한측 입장만을 옹호, 대변하는 행태가 반복되면서 양국 간 신뢰의 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말로는 한미동맹의 강화를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미국과의 공조를 배격하고 북한과 이른바 민족공조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연세대 특임교수)라는 분의 행보를 보면, “한미관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은 사실상 남북관계를 희생하고 있다”, “한미관계가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남북 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유엔군사령부이다”, “하루빨리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개성공단을 재개해야 한다” 등의 주장을 공공연히 펼치고 있다. 이는 북핵개발 등 한반도 문제의 북한책임론을 도외시하고 미국에 책임을 전가하며 한미동맹의 균열을 촉발시키는 주장이다. 더나가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제 공조에 역행하는 것으로 북한 정권의 입장을 옹호, 대변하는 것이다. 문정권이 이런 자의 거듭된 망언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바로 한미동맹의 균열과 와해를 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미동맹의 복원을 위한 제언

한미동맹의 균열을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는 향후 중대한 안보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대한민국 안보의 굳건한 안전장치인 한미동맹을 와해시켜 놓고 국가발전은 커녕 국민의 생명과 재산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향후 균열된 한미동맹의 조속한 복원을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기존의 친북-친중-반일-반미 코드의 정책에서 벗어나야 하고, 먼저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손상된 한미 간의 신뢰 회복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앞서 지적한 한미동맹을 균열시키는 제 정책을 중단하고 한미관계를 정상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에게 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민간차원에서라도 한미동맹의 복원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한미우호협회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는 이유이다.

일본은 왜 미국을 선택했는가?

채 연 석
본 협회 사무국장

1. 서 언: 한국정부의 일본과 GSOMIA 중단 선언
                –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의 붕괴 위기-

2019년 8월 22일,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미동맹과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

지소미아는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유일한 군사협정으로 2016년 11월에 북한의 병력 이동과 사회 동향, 북 핵·미사일 관련 정보 등을 일본과 공유하기 위해 체결했다. 한국은 탈북자나 북·중 접경 지역의 인적 네트워크,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수집한 대북 정보를 일본과 공유하고 있고, 일본은 주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실험이나 핵에 관한 기술 제원 분석 자료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특히 일본은 한국이 보유하지 않은 정보수집 위성 5기를 비롯하여, 이지스함 6척, 지상레이더 4기, 조기경보기 17대, P-3와 P-1 등 해상초계기 110여 대 등의 다양한 정보자산을 통해 수집한 북한 핵·미사일 관련 정보를 한국과 공유하기로 하여 북한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소미아는 한일 양국 간의 안보협력은 물론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도 매우 긴요하게 작용한다. 지소미아는 단순히 한-일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한미일 공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한국이 일본과의 갈등 때문에 지소미아를 파기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과 함께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지소미아 중단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동맹국 사이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깊은 우려와 실망’이라는 표현이 연일 쏟아져 나왔고, 일본정부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중요한 국가안보협정을 우리 정부가 일본정부의 전략물자 수출금지 조치에 대한 보복적 차원에서 중단시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매우 유감스러운 조치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북한의 핵과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과의 극한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고 급기야는 북핵 미사일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중요한 지소미아 안보협정마저 중단시킴으로써 우방국 일본을 적대국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동맹국 미국이 등을 돌림으로써 우리 안보불안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이번 지소미아 중단 선택이 ‘진정 국익에 부합되는 올바른 선택이었던가’ 라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의 선택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과 지정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일본은 국가가 중요한 기로(위기상황)에 서 있을 때 그들 지도자들은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강대부국으로 성장시켰는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일본의 전략적 선택
     – 명치유신과 부국강병의 길, 대동아 공영권의 꿈

일본은 근세기에 세계의 열강들과 나란히 손을 잡고 아시아 제국을 휩쓸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초강대국 미국과의 패권을 겨루며 그들이 말하는 소위 대일본 제국을 달성한 바 있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 패망 후 짧은 기간 내에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세계 제 3의 경제대국과 군사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여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저력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본이 그렇게 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들 지도자들은 과연 어떠한 국내외 정책과 전략을 선택하였는가?

임진왜란 이후 출범한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260여 년간 쇄국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열강들의 서세동점의 세력에 시달리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끄는 4척의 군함의 위용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게 된다. 그리고 1868년 왕정복고와 함께 명치(明治; 메이지)유신을 단행한다. 명치유신은 쇠약해진 일본이 일거에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명치유신과 동시에 일본은 군사개혁을 핵심으로 국정전반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명치 군대는 처음에는 국내안정을 위주로 하는 치안유지군의 성격을 띠었으나 중국 및 조선 등 아시아에서의 서양열강이 각축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자국안보의 눈을 뜨고 ‘정한론’의 대두와 함께 점차 외정군(外征軍)의 성격으로 변모하면서 해외점령정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880년대 이러한 위기의 안보정세 하에서 근대일본의 군사와 정치토대를 마련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총리는 자신의 ‘외교정략론’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의 논리에 의해 조선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청국과 러시아, 영국등과의 각축전에서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굴복시켰으며,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을 우방으로 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일전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장악하여 국가 이익선의 개념을 남만주까지 대폭 확장시키는 외교정책을 선택한다. 한편, 러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당시의 글로벌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하는 독일에 대응하기 위해 3차에 걸쳐 영일동맹을 체결하고(1902,1905,1911), 불일협상(1907), 러일협상(1907)을 맺어 4국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등 우방국을 많이 확보하여 자국안보를 유지해 나가는 한편, 해양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제해권을 획득하여 해군력의 우위를 점하고 급기야는 태평양에서의 미국과의 경쟁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안보환경이 급변하면서 소련의 위협이 점증되자 동아연맹의 주창자이자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역인 이시하라 간지 중장은 소련과 미국, 영국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한 총합적인 국가전략과 국방정책(국방국책대강, 1936)을 추진하며 대륙침략을 감행하게 된다.

일본은 중일전쟁이후에도 열강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펼쳐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 소련의 중일전쟁 개입의 저지를 위해 독‧일 군사협정 구상,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일‧이태리 정치협상을 구상하고 중일전쟁 이후의 차기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이태리, 독일과의 방공협정을 강화한다. 차후 일본은 국익을 위해 일본의 국방자급권 구축의 가능성을 모색하여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 남방자원 탈취를 위해 필연적으로 미국과의 일전을 구상하며 미국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 이태리와 3국동맹, 소련과의 중립조약 등을 맺고 태평양 전쟁을 감행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비록 미국에 굴복하여 패전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의 자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 다각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3. 일본은 왜 미국을 선택했는가?
     – 요시다 정부의 결단과 일본 외교의 기축 對美외교-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여 철저히 파괴되었던 일본이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짧은 기간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일본이 미국을 선택했고 미일동맹을 국가전략의 제일로 삼고 일관성 있게 유지 강화해 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미일동맹에 대한 출발은 패전 직후 패망한 일본을 부흥시킨 요시다(吉田茂) 수상의 독트린, 즉 ‘요시다 독트린’에서 출발한다. 이는 연합군 총사령부 점령 아래 일본 정권의 수장이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주장한 일본의 외교노선이다. 요시다 독트린이 가지는 성격은 “ 1)냉전 상황에서 스스로를 서방세계,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제휴를 외교의 기조로 하고, 2)안전보장 면에 있어서는 미국에 의존해서 스스로의 방위력은 최소한도로 하고 경제외교를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의 안보 문제는 오직 미국에 의존하는 한편, 군사적 예산은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출하고 일본의 경제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요시다가 수상이던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해 미국은 동맹국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미국은 1950년 6월, 강화 임무를 가지고 방일한 존 포스트 덜레스를 통한 일본과의 회담에서 일본을 재무장하여 군사적 지원을 받고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요시다는 덜레스의 요구를 거절하고, 맥아더의 양측의 의견에 대한 타협안을 수용함으로써 재군비를 회피하였다. 이후 일본은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발전에 국가역량을 집중 할 수 있었다.

한편 전후 일본의 위정자들은 국익에 바탕을 둔 외교정책을 결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철저히 자국의 헌법(평화헌법)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일관된 정책을 잘 추구하고 있다. 일국의 헌법은 국가통치의 가장 근간이 되는 법으로 국가이익, 즉 국가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지켜야 할 법칙 또는 행동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미국의 극동정책과 대일점령정책의 일환으로 제정 되었다. 따라서 전후 일본의 외교정책은 미국의 시대상황적 안보정세에 따른 극동 정책의 변화와 평화헌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미소 양극체제를 중심으로 한 냉전기를 거쳐 소련 및 동구권이 붕괴된 냉전 종언에 이르기까지 냉전초기에는 한반도 전쟁으로 시작한 재군비의 출발로부터 냉전의 종료 전까지 소련의 ‘해양요새전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전략의 일환인 ‘해양전략’의 전초기지 역할로서, 냉전 후에는 새로운 전략 환경의 변화에 따른 대처로서 일본의 방위정책과 방위전략이 그때그때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전후(戰後) 오직 자국의 국익을 위해 미국을 선택했고, 70여 년간을 일관되게 대미외교를 국가외교의 기축(基軸)으로 하여 적극적인 대미외교를 전개하면서 미일동맹 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4. 미일동맹과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의 함의

1945년 2차 대전이 종료함에 따라 반세기 이상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놓여있었던 한일 양국은 거의 유사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세계는 미소 양대 강국이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냉전체제로 진입하였고 그리고 양국은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을 동맹국으로 하는 매우 훌륭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미일안보체제가 출발하였고, 1960년 1월 19일 양국 간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신 조약에 의거하여 미일 안보동맹체제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미일동맹체제는 냉전시대 일본의 최대 안보위협인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안보를 지켜내고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1등 공신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동맹은 휴전 직후 1953년에 10월 1일, 미 워싱톤에서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조인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 34호로 정식으로 발효된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미동맹체제가 출발하게 되었으며, 한미동맹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생존과 번영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이처럼 한일양국은 미국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 질서에 편입하게 되면서 한국은 한‧미동맹체제를, 일본은 미일동맹 체제를 각각 구축하게 되었고,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양국은 자연스럽게 우호협력체제를 만들어 감으로써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가 형성되었다.

미일동맹체제는 한미동맹과 우리안보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순기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가 세계지역의 안전보장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즉 미일안보동맹에 의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주일미군은 한국은 물론 세계지역의 분쟁발생지역에 신속히 투입할 수 있도록 일본의 군사전략적 요충지역(오키나와, 요코스카, 사세보 등)에 3해병기동군(III MEF) 전력을 비롯하여 해, 공군 최첨단 전력들이 배치되어 운용된다. 또한 주일미군사령부가 위치하는 요코다(橫田)를 비롯하여 요코스카, 사세보, 후텐마, 가데나 등에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가 있어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태세도 갖추고 있다. 유엔사후방기지회원국(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 9개국)들은 자국의 선박 및 항공기를 이곳에 파견할 수 있다. 유사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주일미군의 존재는 한반도 전쟁의 위협을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일본에 주둔하는 미 7함대의 활동은 아태지역 해상로의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평시 역내 국가들의 안전한 해상무역활동의 기반을 조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5. 결 언
     – 국익을 위한 한국의 전략적 선택-한미동맹 강화와 지소미아 중단 재고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중차대한 한미일 삼각한보협력체제가 우리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붕괴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는 곧 많은 애국 지식인들에게는 국가의 존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위정자들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국익을 위해서는 신중한 판단과 결정을 했다. 한때 우리의 위정자들도 어려운 시기에 신중한 판단과 올바른 결정을 한 바 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튼튼한 안보를 유지하는 가운데 국가의 위상과 국력이 신장하였다. 바로 슈퍼 강대국 미국을 우리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선택하고 동맹유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강하고 믿음직한 동맹국과 우방국을 스스로 저버리고 신 애치슨라인을 스스로 그어가며, 한미동맹을 깨뜨려가고 있지 않은가? 미국과 일본은 과거에도 중요했고 현재도 변함없이 우리 안보와 번영, 생존에 매우 중요한 우방국들이다.

국가안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활적(critical)인 국익이다. 우리는 오늘의 어려운 안보위기상황 하에서 보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 명치유신 이후 100년간 근세 일본을 세계 최고의 강대부국으로 성장시켰고, 2차 대전 패전이후 불구대천의 미국을 가장 친한 우방으로 선택하여 대미외교를 국가전략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냉전이후 주적 소련이 사라진 후에도 자국의 헌법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국익을 위해 더욱 미일동맹을 강화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보장해 나가는 일본의 선택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설사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여 비핵화를 달성하고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구축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중국,러시아 등의 안보위협에 계속 대처하고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공존을 위해 한미동맹을 계속 유지하고 강화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지소미아 중단결정은 사활적인 국익차원에서 반드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