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휴전회담 – 정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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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일 화
정치학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1. 늪에 빠진 자의 고함소리

지난 7월 말 디스커버리 채널을 통해 방영된 북한의 정전협정기념식 광경은 북한의 기념식 공식명칭인 ‘전승기념식’에 어울리듯 온통 승리의 깃발로 뒤덮여있었다. 군인 학생 시민이 히틀러시대의 발걸음을 높이 쳐들면서 벌이는 화려한 페레이드와, 세계 어느 곳이든 타격할 수 있다고 해설하는 미사일탑재차를 비롯한 어마어마한 무기전시행렬이 사열대의 북한지도부 앞을 지날 때 함성이 온 평양천지를 덮는 듯 우렁차 보였다. “지금 전쟁을 다시해도 승리는 우리 것”이라는 신념이 충만한 듯 했다.

미국은 지난 2013년 7월 27일 워싱턴에서 열린 정전60주년 행사에서 오바마대통령이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에서 ‘잊혀진 승리’(forgotten victory)’라고 이름을 바꿔 불음으로써 이 전쟁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사가 아닌 자랑스러운 전쟁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한국은 휴전회담 자체를 강력히 반대한 나라로서 정전협정을 그렇게 떠받들지는 못했지만 정전협정 체결이후 북한의 재침(再侵)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과 그 기간을 통해 국가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UN참전용사들의 한국방문기회를 열어 참혹했던 전쟁을 돌이켜 보는 행사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의 남북한의 역할은 북한식의 승리를 뽐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남한처럼 참혹한 전쟁을 이겨낸 공을 내 세울만한 것도 아니었다.

625전쟁은 소련,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열강들이 얽혀든 세계전쟁이었으며 남북한은 그 거대한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아직도 그런 거대한 전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그 세력이 밖으로 흘러넘치려하고 있을 때 스스로 이들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의 무기와 중국의 8로군 병력을 지원받아 남침전쟁을 벌여 남북한인구 3백만명의 사망자를 내게 했다. 그들이 남침전쟁에 투입했던 소련무기와 인민군주력은 낙동강 6백리공격에서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무력화 되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압록강까지 무혈점령하려 할 때 쯤 중공군이 투입되어 인해전술로 북한정권을 살렸지만 많은 장개석군대 출신들로 채워진 중공군의 끔찍한 희생이 깔려있어 도무지 북한의 남침전쟁이 승리의 전쟁이었다고 말할 구석이 없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말할 때 마다 인민군이 미 제국주의를 이겼다고 말하지만 남침 당시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철수하고 없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유엔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한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자 대한민국을 도우러 온 군대였기 때문에 남침전쟁의 승리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이 남침전쟁에 끌어들인 소련, 중국 등은 북한에 의해 끌려 들어와 침략자 낙인을 받게 되었지만 대한민국 편으로 한국전에 들어온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태국, 에티오피아 등은 곤경에 빠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의(義)의 군대로 같은 외국군이지만 전혀 성격이 다르다.

2. UN군은 ROK를 도운 군대가 아니고 살린 군대

1950년 6월 25일의 대한민국 형편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나라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었다. 1백 50마일 전 전선에는 지난날 독일전차병들도 무서워서 벌벌 떨던 소련제 T34 1백 50백대가 늘어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 뒤에는 국공내전에서 전투경험을 풍성히 쌓은 8로군 출신의 인민군 4개 사단을 중심으로 살기등등한 20만병력이 단숨에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러 밀고 내려왔다.

국방경비대수준의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대한민국국군은 무기면에서나 숫자면에서 도무지 침략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T34전차가 1시간이면 뚫어낼 서울을 그나마 3일 걸려 점령당한 것은 천운이었다. 남침부대는 최신전차를 가졌지만 전차전을 몰랐기 때문에 야간포위섬멸이 주특기인 보병의 전진속도에 맞추다 보니 앞서가던 T34행렬이 멈춰서기도 하고 심지어 되돌아오기도 하면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시속 60km속도가 시속 10km속도도 내지 못했다.

서울점령을 한 후 한국군방어가 너무 미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민군전차부대는 7월 1일 한강을 넘으면서 보병부대를 제치고 독일식 전격전(blitz krieg)진격을 했다. 그러나 이미 바다와 공중을 장악한 유엔군전투기가 그런 T34의 돌진행군을 그냥 두지 않았다. 독수리가 토끼사냥 하듯 유엔군전투기들은 T34가 보이기만 하면 로켓포로 두 동강이를 냈다.

김일성은 당초 빠르면 전쟁시작 20일이면 이 전쟁은 끝난다고 봤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미국이 비록 대한민국을 구하러 온다고 해도 거리상으로나 절차상으로 인민군이 부산-통영까지 점령한 한참 후에나 부산앞 바다에 도착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으며 통상적인 상식으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옳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정치체제가 한반도전쟁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흩어진 병력을 모아 태평양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3개월이 걸릴지 6개월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미군이 한국전에 전광석화처럼 뛰어든 것은 한국전발발 보고를 처음 받은 미 국무부의 유엔전문가들이 이 전쟁은 곧바로 유엔의 전쟁으로 가야한다고 결정했으며 그런 결정은 밤을 새면서 워싱턴(국무부)과 뉴욕(유엔본부) 그리고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트루먼의 고향)를 잇는 비상통신망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이뤄졌다.

트루먼 미대통령은 유엔의 전쟁지휘체계가 확립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해양봉쇄조처를 했다. 소련이나 중국이 바다를 이용하여 침략전쟁을 돕는 일을 저지하는 동시에  바다를 통한 유엔군의 지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반도가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의 강력한 해군력과 공군력에 의해 한반도전체의 하늘과 바다가 봉쇄될 때 쯤 맥아더는 미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특별임무대)부터 시작하여 지상군을 들여보내 남침군을 막기 시작했다.

3. 위대한 임무를 감당한 UN군 사령관들

한국전쟁을 지휘한 유엔군사령관들인 맥아더원수, 리지웨이대장, 클라크대장과 한반도에서 8군을 지휘한 8군사령관들인 월튼 워커(Walton Walker),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제임스 밴프리트(James Van Fleet)장군 등은 2차 대전의 명장들로 한국전쟁을 통해 매우 적기적소에 등장해 임무를 완수한 인물들이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북한침략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일단 바다와 하늘을 봉쇄한 후 현장사령관의 현지보고를 통해 이 전쟁은 지상군투입 없이는 침략저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강시찰의 결과를 들어 설명하면서 지상군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인민군을 낙동강 쪽으로 끌어내린 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후방을 잘라 마치 큰 자루에 인민군을 집어넣듯 포위하여 깨강정을 만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8군사령관으로서 한국전선을 직접 관장한 워커는 군대숫자나 무기면에서 훨씬 우세한 인민군이 한강을 건너고 파죽지세로 대전을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7월 20일까지 미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대전만 지켜준다면 후퇴하는 한국군과 상륙하는 미군을 모아 어깨거리를 좁히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만들 수 있고 그런 방어선만 구성될 수 있다면 우세한 해군력과 공군력과 함께 인민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워커는 낙동강 6백리지도에 빨간 줄을 그으면서 전 유엔군은 여기서 ‘버티든지 죽든지 하라’(Stand or Die)라는 독한 작전명령을 내렸다.

24사단장 딘은 자신이 포로가 될 지경에 이르도록 대전방어전을 감행해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켜냈다. 미24사단이 대전을 버티는 동안 미1기병사단, 미25사단, 미해병1사단 등이 속속 들어와 낙동강 서쪽에 탄탄한 벽을 만들었고 왜관을 중심으로 낙동강 오른쪽은 국군이 방어선을 쳐 결국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냈다.

김일성은 좁아진 낙동강전선을 바라보면서 이곳만 뚫으면 곧 대구-부산을 곧바로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하면서 온 침략군 13개 사단을 낙동강전선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유엔군이 ‘Stand or Die’명령을 붙들고 물러서지 않았으며 유엔공군과 유엔해군은 전투기, 폭격기와 함포를 동원해 인민군 13개 사단을 참으로 비참하게 두들겨 팼다. 동경의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면서 인천앞바다에 발을 첨벙첨벙 딛고 해안으로 올라설 때 쯤 낙동강전선으로 깊숙이 내려간 인민군은 서울을 통해 내려오는 보급선이 완전히 끊겨 총알도 없고 양식도 없어 기진맥진하면서 죽어갔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이룩되려는 순간 미군 1인당 중공군 6명, 한국군 1인당 중공군 3인의 희생을 계산하면서 중공군 80만 병력이 압록강을 넘었을 때 맥아더의 주장대로 미공군기가 압록강다리를 파괴하고 만주의 중공군 집결지와 보급기지만 때릴 수 있었다면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전쟁 비 확대 논리를 붙들고 있는 트루먼 행정부를 맥아더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유엔군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의해 청천강을 후퇴하고 평양을 뺏기고 급기야 서울까지 후퇴해야하는 비극을 앉게 되었다. 워커는 의정부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맥아더는 1951년 4월 해임되고 말았다.

4. 보름달이 뜰 때 중공군공격을 막는 리지웨이

워커후임으로 8군사령관이 되었다가 뒤에 맥아더를 이어 유엔군사령관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맥아더처럼 워싱턴에 맞서서라도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정치의지는 없었지만 압록강에서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한 유엔군의 침체된 사기를 일으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위력정찰(Reconnaissance in Force)’로 단번에 제압했다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든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중국주둔 15연대에서 근무한 일이 있는데 중공군이 달밤을 이용해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달려든다는 것, 1주일분의 미숫가루 양식과 탄약을 지급받은 후 싸움을 하기 때문에 전투기간이 1주일을 넘기지 못한 다는 것을 알아내고, 유엔군은 달밤에 방어하고 그믐밤에 공격하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달이 뜰 때 미리 방어선을 쳐 놓았다가 야간포격과 폭격으로 중공군을 무자비하게 타격하였다. 그는 중공군시체로 한국 땅을 비옥하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여주에 세운 리지웨이의 전진사령부 텐트에 들어가 본 일이 있는 제임스 하우스만고문관은 리지웨이 숙소에 있는 큰 사판지도위에는 움직이는 달 모양이 매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리지웨이는 달이 뜨는 시기를 계산하면서 작전을 짰다. 이번에도 피리와 꽹과리를 치고 올라가면 미군은 간이 조려 다 도망할 줄 알고 인해전술을 폈던 중공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리지웨이는 단번에 서울을 회복하고 38선을 넘어 지금의 휴전선으로 유엔군과 국군을 밀어 올렸다.

리지웨이 후임으로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프리트장군은 그리스에서 대 공산게릴라작전을 성공적으로 치룬 후 8군사령관으로 한국전에 왔다. 6 25전쟁은 국제전이었지만 남북한의 내전의 성격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두 개의 전선을 갖고 있었다. 대규모부대가 부딪치고 있는 일선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게릴라 전선이었다.

밴 프리트는 게릴라 전선은 오직 한국군만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과 언젠가는 미군이 떠나는 날을 대비해 한국군을 키워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큰 공을 들였다. 그는 이승만대통령을 매주 토요일 8군사령관숙소(옛 서울대본부)로 초청하여 양식을 대접하면서 주요군사상황을 소상이 보고했다. 국군야전훈련본부를 세워 사단훈련을 받게 하고 4년제 육군사관학교의 개설, 보병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통신학교, 부관학교와 같은 전문군사교육기관을 만들어 한국군 강화에 정열을 바쳤다.

휴전을 할 때 쯤 대한민국은 북한의 잘 계획된 남침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전선의 70%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성장했다. 20대말의 애송이 사단장들도 미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3년 전쟁을 치루면서 유능한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전문군사교육기관을 거친 병력의 증강으로 국군전체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5. 이승만의 휴전전쟁

냉전시대 미스터리의 하나는 같은 미군이 주도적으로 개입했고 똑같이 미군주도로 휴전협정을 하고 전쟁을 끝냈는데 왜 월남은 망하고 대한민국은 살아남아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휴전 후  다시 북한군이 재침할 수 있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했기 때문이었고, 월남은 휴전(파리평화협정)후 월맹의 재침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도적 장치의 핵심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한국은 휴전과 더불어 미국과 국가대 국가의 대등한 자격으로 양국 중 어느 한 국가가 침략을 당하면 상대방과 협의하여 즉각 군사개입을 한다는 엄중한 국제조약을 맺어 양국 의회의 결의를 거쳤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방어에 문서로 단단한 책임을 졌다.

한국전 참전 16개국도 북한군이 재침하는 경우 즉각 방어 군을 동원해 한국방어에 파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전후 10억 달러의 경제지원과 국군 20개 사단 증강 합의도 있었지만, 한국이 재침되는 경우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가 침략당한 것과 같은 입장으로 상호방위를 하겠다는 이 조약이야말로 이승만정부가 이끌어낸 휴전전쟁의 핵심이었다.

미군은 한미상호방어조약의 징표로 미군을 한강이북에 배치하여 여차하면 북한을 칠 준비를 했다.

월남정부에 대한 미국의 휴전압력도 한국정부에 못지않게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티유대통령은 20억 달러의 경제원조와 월남군증강계획, 닉슨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을 조건으로 휴전협정에 서명했으나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하야하고 월맹군은 휴전협정을 휴지쪼가리고 알고 그냥 전쟁으로 밀어붙여 협정 2년 만에 전(全)Vietnam은 공산화되었다.

한국전쟁의 휴전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12월 1일 영국수상 애틀리(Clement Atlee)의 백악관방문에서였다. 홍콩을 지키는 것이 다급한 과제였고 또 유럽주둔미군이 한국전에 동원되는 것을 우려한 애틀리는 트루먼정부가 한국전쟁에서 원자탄을 써 중국과의 전면전을 벌이지 않을 것과 중공의 유엔가입 등을 양보하고 휴전할 것을 제의했었다.

미국이 중공군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하지 않고 휴전 운운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오자 이승만은 이런 소리가 나올 바에야 차라리 유엔군이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었다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1951년 4월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리지웨이 대장이 후임으로 부임한 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휴전의 조건으로 중공군의 전면철수, 북한군 무장해제, 북한에 대한 제3국의 지원 금지, 한국문제를 위한 모든 국제회의에 대한민국대표 참석, 대한민국의 주권 및 영토권보장 등의 거의 회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항을 제시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휴전회담반대 데모를 전개해 갔다. 2년간 줄기차게 반대운동을 했다.

1953년 6월 미국 중국 북한 간에 포로교환을 비롯한 까다로운 문제들이 거의 타협을 보면서 정전협정의 조인식만 남겨둔 상황에서 이승만은 국군과 경찰에 명령하여 반공포로 5만7천명을 석방해 버렸다. 포로교환을 위한 바탕을 흔들어 버렸다. 미국뿐 아니라 휴전협정을 거의 마무리 지은 것으로 알고 있던 중공 및 인민군대표도 미국대표에게 이승만을 휴전회담에 끌어내 오든지 휴전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확인을 받아내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2번에 걸친 이승만 제거작전을 벌였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로벗슨(Walter Robertson)미대통령 특사를 보내 이승만-로벗슨 회담을 하게 했다. 그 결과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반대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1) 국군 20개 사단 증강, 2) 10억 달러 경제원조 제공, 3) 90일 이내 제네바정치회담폐지, 4)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문서로 확약 받았다. 휴전협정 체결과 거의 동시에 덜레스미국무장관이 한국에 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서명하는 등 거의 완벽한 재침략방어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625전쟁 내내 전쟁주도책임을 미국에 맡기고 있었다. 한국군이 패배할 때 마다 미군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했기 때문”이라는 항의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이런 무기도 보잘것없고 전쟁경험도 없는 국군만으로 중공군, 인민군의 전술전략과 소련제 탱크를 비롯한 각종무기로 잘 무장된 공산군과 대항해 혼자 싸운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전쟁이라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으며 미국인들은 “저 영감은 자살이라도 할 모양”이라며 정말 국군만으로 전쟁을 계속할 것으로 봤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승만이 과연 국군만으로 전쟁을 계속할 계획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전쟁외교는 완벽했고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을 미국과 대등한 자격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월남이 휴전협정으로 망한 대신 한국은 휴전협정이후 번영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바마대통령이 한국전쟁을 ‘잊혀진 승리’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승만 외교는 미국에게도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이다.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을 대한민국의 눈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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