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 60주년: 회고와 과제 – 전인영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 60주년: 회고와 과제

전 인 영
서울대 명예교수
국제정치학

1. 한미동맹은 한국안보의 초석

한미동맹은 한국안보의 초석이다. 반대로 북한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시대착오적 침략정책 산물로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한・미 양국관계에 때로는 갈등과 기복이 있으나, 60년 이상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한미동맹은 미국도 인정하는 흔치 않은 성공사례로 꼽힌다. 한미동맹은 전우로서 함께 싸우고 엄청난 희생을 치룬 6・25전쟁에서 비롯되었다. 휴전 직전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틀과 제도로 마련된 전쟁의 유산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 후 한국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조약 체결・발효는 전화로 인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약소국 한국이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거둔 괄목할만한 외교적 승리였다. 현재는 한・미 양국이 안보협력은 물론 지구촌 문제들까지도 긴밀하게 협의하고 협력하는 가까운 동반자지만, 전쟁 당시는 거의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열악하고 절박한 형편이었다. 주한 미군 지휘관들은 건배를 제의 할 때, “같이 갑시다 (We Go Together)”를 외친다. 지난 10월 30일 새로 부임한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의 첫 일성도 ‘특별한 동반자’였다.

2. 미국의 관심 밖의 존재였던 조선과 한국

회고컨대, 일찍이 조선은 미국의 주요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제26대 미국대통령(재임기간, 1901-1909) 시어더어 루즈벨트는 “조선은 자기방어를 위해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나라다.”라며 외면했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인정한 1905년의 태프트-가쯔라 메모란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구소련 적군과 미군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과 북에 각각 진주했으나,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은 미국은 1949년 한국정부 수립 후 군정을 종식시키고 다음 해 6월 29일까지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모든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날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알류산열도・일본・필리핀으로 연결되는 미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었음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애치슨라인’ 공표가 워싱턴 정가에 이미 알려진 사실을 확인한 것이기는 해도, 외교적으로는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메시지(신호)였다.

3. 한국전 참전으로 인한 엄청난 미군 인명피해

6・25전쟁 발발과 미군의 신속한 한국전 참전과 희생은 한・미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 전쟁 초기에 미국은 ‘경찰행동’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미 지상군을 투입했으나, 37개월 동안 지속된 한국전 수행을 위해 누계 170만 명의 엄청난 수의 미군이 참전하게 되었다. 참전 결과로 미국은 전사 3만 3,629명(최근 3만 3,870으로 수정), 부상 103,384명, 실종 및 포로 5,000명 이상의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워싱턴 한국전 기념비와 동상들에는 우리를 숙연케 하는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경구와 함께, 미군 사망자 54,246명, 유엔군 628,833명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상식으로 생각조차 힘든 엄청난 큰 희생이 아닐 수 없다.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한 이 조약은, 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완강히 휴전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힘겹게 탄생한 조약이다. 휴전성사를 위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판문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거칠고 지겨운 협상을 하는 동시에, 휴전을 완강히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힘겨운 협상을 벌려야 했다.

4. 미국을 경악케 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

2년 가까이 지속된 막판 휴전협상을 파탄위기로 몰고 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약소국 대통령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에 거제, 광주, 군산 등지에 수용되었던 반공포로 25,000여 명이 한국군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민가로 숨어들었다. 포로석방 배후에는 강제송환을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특명을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조차 원 헌병총사령관에게 과제를 하나 주었다고 귀띔만 해 주었을 뿐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단적 행동에 크게 경악했고 격분했으며, 공산측은 당연히 미국을 맹렬히 비난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테일러 미 8군사령관,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으로부터 거친 항의전화를 받은 후 경무대로 전화를 걸어 대처방법을 묻자, 강심장을 보유한 이 대통령은 “그렇군, 미군들에게 내가 했다고 그래. 내일 프레스 릴리즈 할 거야.”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포로석방 담화문에서, “제네바 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한인포로들을 벌써 다 석방시켜야 할 터인데…….이 포로들을 석방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나는 믿으며 내가 책임을 지고 이 반공한인포로들을 6월 18일자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군에 잡혀 강제 편입되었다가 연합군에게 다시 포로가 되고만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인’들을 스탈린의 소련으로 강제 송환해 버렸던 영국의 비인도적인 조치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미국은 사태수습에 나섰고, 공산 측에게는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처사였다고 설명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통령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모두 휴전을 원하던 상황에서, 국익 및 인도주의 명분에 부합하는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대담하고 전략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상대로,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혼자서라도 북쪽의 김일성 군대와 중공군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북진통일’ 의지를 거듭 표명했었다. 당시 한국군의 제한된 군사력과 북한군・중공군의 대규모 군사력 및 미국의 ‘제한전쟁’ 정책을 생각 할 때, 실현성이 희박한 주장이었으나 전쟁 중 그가 보여 준 비전과 의지 및 포석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5. 휴전수락 전제조건 한미상호방위조약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6월 25일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가 이끄는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휴전의 전제조건이던 한미방위조약 및 대한 경제지원 등을 놓고 한국 측과 18일 동안 피곤하고 힘겨운 협상을 전개했다. 백선엽 장군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은 변영태 외무부 장관 등 몇 명의 각료만 데리고 협상장에 들어가 문구 하나 하나까지 직접 보고 따졌으며, 그의 표정은 늘 단호해 보였다고 한다. 오죽이면 미국이 이 대통령과의 협상을 ‘작은 전쟁(Little War)으로까지 불렀을까.

한국은 로버트슨 특사에게 (1) 나머지 한국인 반공포로의 비무장지대 이송과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도, (2) 정치회담의 90일 시한, (3)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보장 및 경제원조 제공, 그리고 (4) 한국육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지원 계속을 요청하는 네 가지 조건을 전제로 휴전을 수락하겠노라고 전달했다. 6월 27일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회신은 1에서 3항까지는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 대통령은 4항에 대해, “필리핀과 유사한 상호방위조약을 기꺼이 협상하고자 하나, 미 상원의 인준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그것을 보증 할 수 없다.”고 유동적인 회신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1)상호방위조약을 휴전협정체결 이전에 매듭 짓고, (2) 정치회담이 결렬될 경우, 특히 중공군이 북한에서 철군하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며, (3)유엔군사령부가 전쟁 승리를 추구 할 때만 한국군을 유엔군의 지휘아래 둔다고 역제안 했다. 7월 12일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는 휴전성립 후 양국은 상호바위조약을 체결하며, 미국은 장기간의 경제원조와 2억불의 제1회 원조를 공여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적당한 해・공군을 증강하는 등의 합의문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6. 군인외교관 백선엽 장군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면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일화를 소개 할 필요가 있다. 1953년 5월 초 백선엽 장군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초청으로 방미했을 때, 1군단장 시절 함포사격으로 한국군 작전을 지원해 주었고 휴전회담에도 유엔군 측 대표로 함께 참여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이 그에게 휴전회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번 방문 길에 반드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휴전 전에 얻을 것이 있으면 얻도록 하라면서, 면담 시 가장 먼저 거론 할 사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충고했다. 백 총장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미 대통령과의 면담 주선을 요청했고, 다음 날 백악관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은 기정사실이고, 공약사항이며, 참전 유엔회원국들이 바른 휴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하자, 백 장군은 “휴전에 앞서 우리에게 개란티를 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청했다. 미 통령이 “어떤 방법을 원하느냐?”고 묻자, 백 장군은 “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합니다.”라고 면전에서 요청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은 유사시에 영국과 행동을 함께 합니다. 상호방위조약은 그런 유럽국가 들과의 선례는 있으나, 아시아 국가에서는 매우 드믄 케이스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다음으로 백 장관은 버크 제독과 함께 국방부 보다 냉정한 입장을 지닌 국무부의 스미스 차관을 예방하여 대통령과의 면담내용을 설명했고, 귀로에 뉴욕의 맥아더 장군을 예방하여 한반도 전황을 설명했다. 미국이 신뢰했던 백선엽 장군은 외교관 이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크게 공헌했다.

7. 한미상호방위조약 구성내용과 문제점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직후인 1953년 8월 3일부터 협상에 들어가 8월 8일 최종안을 서울에서 가조인했다. 이에 만족한 이승만 대통령은 “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해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한국의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미 국무부 덜레스 장관이 문서에 서명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과 6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동 조약 제1조는 국제적 분쟁에 대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을 원칙으로 명시하고,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의무에 배치되는 방향의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가 할 것을 약속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의 주 관심사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제2조는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정이 외부의 무력침공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어느 일방이 인정 할 때,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하고 당사국은 단독 또는 공동의 자조와 상호원조에 의해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며, 본 조약을 실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 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 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방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에 양국은 적절한 조치를 협의・합의한다고 한 것은 북대서양조약(NATO)의 ‘자동개입’ 조항과 큰 차이점으로 지적된다.

제3조는 “타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공통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는 규정으로서, 위기발생시 즉각적 지원이나 조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약점이다.

제4조는 “상호합의 하에 결정된 바에 따라 미국의 육・해・공군을 한국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한국이 허용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미 군사력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한국이 허용하는 형식으로 미군의 한국 주둔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상호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주한미군의 철수가 가능함을 시사한다.

제5조는 한국과 미국이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 효력을 발생한다고 명시했다. 본 조약 비준서 교환은 1년 이상 경과한 11월 17일에 겨우 이루어졌고, 다음 날 18일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마지막 제6조에서는 “본 조약은 무기한 유효하나, 어느 당사국이든 타 당사국에 통고한지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료시킬 수 있다.”고 유효기간을 설정했다. 마지막 조문은 미국 혼자 자의로 조약효력을 끝낼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국 측이 이 조문의 문제점을 시정하려고 노력했으나, 미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 진 조약이나, 한국에게는 몇 가지 아쉽고 치명적 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제2조는 “어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는 경우, 협의와 합의를 거쳐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고 했으며, 제3조는 “공통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고 미 의회의 무력개입 지연이나 거부를 가능케 했다.

8. 동반자 미국과 전작권 전환 재연기 합의

지난 60년 동안 한미동맹 관계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인상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 기간에 미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발전된 국가로 변모했다. 대조적으로 실패한 계획경제 체제와 수령중심의 세습독재체제 하에서, 지배층을 제외한 북한 인민들은 억압을 받으며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국방연구원의 차두현 연구위원에 의하면, 한국에서 복무한 미군 수는 1950년의 32만 5천명을 정점으로, 1955년 8만 5천명, 1964년 6만 3천명, 1971년 4만 3천명, 1977년 4만 2천명, 2003년 3만 7,500명, 2004년 3만 2,500명, 2005년 2만 9,500명, 2006년 이후 2만 8,500명으로 감소추세를 보여 왔다. 현재 주한미군은 고정적 주둔군이 아닌 유사시 전개능력(전략적 유연성)을 지닌 강력한 군대로 변모했다. 북한은 미군을 상주시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강한 적대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 최첨단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미국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의 군사력에 비해 열세를 느낀 북한은 재래식 무기와 경제적 한계를 핵무기와 미사일로 극복하기 위해 전력투구해 왔다. 1989년 베를린 장벽붕괴 및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에 이은 1991년의 구소련 해체 이후, 북한은 국제사회의 감시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시간벌기전략 등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핵과 미사일 개발을 추진해 왔다. 이제는 스스로 ‘핵국가’임을 헌법에도 명시하고, 경제・핵 병진정책 추진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북한이 핵・미사일 비대칭 전력 면에서 한국을 압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의 대미 의존도가 증대했음을 의미한다.

안보환경 악화라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가 미국과 2012년 4월 17일까지 전시작전권 전환에 합의했던 것을 2015년 12월 1일까지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전작권이 전환될 경우, 한미연합사가 해체되고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형태로 바뀌게 되며, 유사시 미군 지원 규모와 신속성이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 10월 23일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46차 한미안보연례협의회의(SCM)에서 세 가지 조건에 기초한 전시작전권 전환을 재연기하고 용산 미주한미군사령부를 축소하여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기 및 다른 대량살상무기 등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이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되는 2020년 중반까지 전작권 전환 합의를 재연기 하기로 한 것을 놓고 국내여론이 양분되어 있다.

진보적 시각을 지닌 세종연구소 이종석 박사는 전작권 전환이 주권국가의 보편적 기능을 구비하는 정상국가화의 필수과정이라면서, 국방분야의 제대로 만들기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작권 전환이 대미의존도를 극복하고 호혜적 한미관계를 만들 계기가 되며, 북한군에 대한 한국군의 협상력을 높여 주고, 한국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를 위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 준다고 주장한다. 비판론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국 군을 지휘 할 권리를 미군 측에 무기한 넘겨 준 것은 ‘주권포기’ 행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떠나, 반론의 근거도 만만치 않다.

첫째, ‘주권포기라는 주장에 문제가 있다.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한 한국의 외교안보정책은 상호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는 미국 같은 강대국과의 동맹관계를 필요로 한다. 생존이 걸린 안보문제를 단순히 주권이나 자긍심 차원에서 비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강대국인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토 멤버들도 안보에 관한 한 온전한 주권을 향유하지 못한다.
둘째, 한반도 안보환경은 합의대로 내년 말에 전작권 전환 합의를 관철시킬 수 있을 만큼 현실적으로 여유가 없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미 6내지 10개에 가까운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며, 북한 스스로의 공언대로 핵폭탄 소형화・경량화・다종화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은 아직 킬-체인이나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내년인 2015년 12월까지 마련 할 가능성도 없다.

셋째, 한국의 2014년도 국방예산은 35조 7,600억 원으로, 이는 정부예산의 14.4%며, 국내총생산의 2.53%에 그치며, 전년 대비 국방예산 증가율은 3.5%에 불과하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 말은 고사하고 2020년 중반까지의 자주국방 역량 보유도 불확실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회복지예산 등을 미룬채, 이스라엘 처럼 국방예산의 GDP 점유율을 2-3배로 대폭 상향 조정 할 수도 없다. 아산연구원 최강 박사에 의하면, 2014-2018 중장기계획 수행을 위해 214조 5천억 원과 연평균 7.2% 국방비 증액이 필요하고, 같은 기간 방위력 개선사업을 위해 총 70조 2천억 원과 연평균 10.6% 증가를 필요로 한다면서, 실현을 위한 국방예산 확보의 현실적 어려움을 피력했다.

넷째, 한국사회는 안보문제를 놓고 심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국회에서의 ‘초당적 합의’는 기대난이다.

다섯째, 전작권 전환이 북한군과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리는 북한의 대외행태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지, 한국군 전력이나 전작권이 아니다. 세계의 화약고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한미동맹의 가치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전작권 전환 재연기 결정이 주권과 자존심의 문제가 됨을 인정하면서도, 북한 위협 억지와 방어를 위한 안전보장 조치가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한국도 전작권 연기와 재연기에 안주하면서 마냥 시간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전작권 전환 문제는 노태우 정권이 제기했고, 참여정부가 2012년 4월 17일 까지 전환하기로 합의했던 사항이고, 이명박 정부가 사정해서 3년 7개월을 추가로 연기 받았던 사항이다. 집권한지 2년이 가까워 오는 박근혜 정부는 미국과 합의하여 다시 10년 이상 전환을 재연기 했다. 대미의존을 벗어나 자주국방 태세를 갖추는 일은 논쟁이나 주장만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전략적 비전과 강력한 리더십 및 의지를 지닌 지도자와 범국민적 합의 및 희생 감수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오랜 기간 신뢰하고 협력 해 온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관계를 우선시하고 잘 관리하면서,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선린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중하지 못한 정책이나 조치로 미국과의 관계를 그르친다면, 중국과 일본 및 북한과의 관계마저 잘못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역동적인 안보환경에 민감하게 적응하며 정책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은 수준 높은 전략적 비전과 외교・안보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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