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 – 북한정권의 향배 – 김동호

분단 70년 – 북한정권의 향배

김 동 호 (예-공군소장)
(사)외교국방연구소 이사장
공군 역사기록단 자문위원장

1. 한반도 분단의 원천

(1) 세계 제2차 대전 종전과 일본제국 소멸

약 120년 전 신흥 군국주의 일본제국이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 (1904~1905)에서 승리함으로써 급기야 동양권에서 일약 선진 산업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청나라도 당대의 막강한 군사대국이었기 때문에 신흥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 세계인은 없었다. 일본은 이 두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세계 정치무대에서 욱일승천하는 동양의 패권국으로 그 위상을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우리 조선왕국(대한제국)은 이 두 전쟁의 한 중심에 휘말려 희생제물이 되어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청일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한 “청일조약(시모노세끼 조약)” 협상과정에서 일본은 역설적으로 조선왕국이 청나라에 조공을 받치는 속국이 아닌 완전 독립 주권국가임을 주장했다. 비록 협정 본문에 삽입되지는 아니했으나 청나라대표 이홍장은 끝까지 조선이 청나라의 종속국임을 주장했다. 이 협약에서 일본은 전쟁승리의 대가로 산동반도 전역과 발해만 일대, 대만 통치권, 그리고 요동반도와 만주에 부설된 철도 등의 기득권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장악한 기득권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제국의 국호 하에 과거에 상실한 기득권을 차지했고 영유권 이상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부국강병국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은 엄청났다. 만주를 침탈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데려가 만주국 황제로 옹립했다. “뿌의 왕제”-푸이 왕제가 그 사람이다. 이어서 북방 몽고지역과 중국대륙의 광활한 본토까지 침략대상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중일 전쟁) 일본의 군사력은 프랑스 통치령 베트남을 넘어 캄보디아, 태국, 버마, 미얀마, 말레이시아 반도를 석권하고 화란영 인도네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미국령 필리핀을 위시한 대소 섬과 나라들을 모조리 휩쓸고, 이어서 하와이 진주만까지 공격하였다. 그 당시 일본은 가히 세계의 군사대국다웠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일본이 급기야 잠자는 조용한 미국을 내려쳤던 것이다. 사자 무서움을 몰랐던 일본은 스스로가 사자 행세를 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2) 한반도 광복과 남북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정부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국력을 모두 소진한 “대일본제국”이 형편없는 몰골로 소멸했다. 우리나라 The Korea가 해방과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장장 36년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났다.

유럽 전선에서 “히틀러”의 자살과 독일의 항복을 전후한 1944~45년 사이에 연합국 수뇌인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과 장개석 등 전쟁지도자들이 카이로, 얄타, 포츠담 등을 전전하면서 일본패전 후의 조건과 전후처리방안 등을 논의했고, 이 과정에서 태평양지역의 군도/섬 등을 포함하여 식민지상태의 여러 나라의 독립문제가 의제로 제기되었으며, 당연히 The Korea는 일본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함을 보장받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항복이 예상외로 빨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 국무성은 물론 국방성과 합동참모본부에서 조차도 만주지역과 조선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에 따르는 무장해제 등에 관한 협의가 확실하게 조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반면 소련군은 38선 북쪽에 쉽게 진주해올 수 있었다. 소련군은 만주지역과 북한땅에 진군해오면서 전투다운 전쟁도 없이 점령이 가능했다. 미국 전쟁지도부는 마주지역 관동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을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군은 김성주 대위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신속하게 북한에 진주했으며, 곧바로 점령지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2. 대한민국 독립과 김일성 군대의 남침전쟁

(1)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북반부 정권출범

1948년 5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건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UN 한국감독위원회의 통제 하에 이루어졌다. 38도선의 북한지역은 소련 점령군사령부와 김일성종파(인민위원회의)의 강력한 반발로 공개 자유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민투표는 태평양전쟁 승전국을 대표하는 미국군정이 관할했던 남쪽지역에서만 가능했다. 510선거(1948년 5월10일)가 그것이다. 남한지역의 주민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내 나라의 주인이 된 유권자로서 투표를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국민이 선출한 제헌국회 의원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선포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대한민국헌법 제1장 총강 제1조 조문이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전후 과정에서의 “The Korea”가 비로소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UN 총회는 선거과정의 합법성과 더불어 선포한 <대한민국 : The Republic of Korea>를 승인했고 세계만방에 공포하였다. 물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에 근거하여, 분단된 북쪽 소련군정하의 지역도 우리의 영역에 포함된 것이다.

그해 9월 북쪽에도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이 발표되었다. 그들은 헌법 서문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시자이시며 조선의 시조이시다.”라고 하였다. 이 서문 8개 구절에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라는 말을 16번이나 거명되는데, 그들은 이 사람을 인류역사상 어느 위인보다도 높은 최고위의 신격에 올려놓았다. “김일성동지는 영도예술의 천재이시고,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셨으며,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이시고, 위대한 인간이셨다.”, “조선인민은 조선노동당의 령도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법화한 김일성 헌법”이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모든 국가기관들은 민주주의중앙집권제 원칙에 의하여 조직되고 운영된다. 제1장 정치 제5조 조항에서 인민의 권력은 전혀 규정되어 있지 않다. 김일성의 헌법과 노동당규약과 주체사상으로 인민들을 지배통치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북 지역은 이 3가지로 통치해야 하기 때문에, 백두혈통이 유지되어야 하고, 지고한 존엄이 김일성 직계이어야만 하고, 죽어서도 땅에 묻히지 않고, 김정일도 김일성 시신 옆에 누워 있어야만 하고, 손자 김정은도 그렇게 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오늘 현재 김일성의 Shadow수반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젊은 김정은이 그들 내부에서의 숙청 정리작업과 더불어 시시각각 변하는 변화무쌍한 국제무대에서 김일성을 대행하기가 얼마나 힘겹겠는가?

(2) 김일성 군대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김일성은 세계 안녕질서를 파괴했다. 그는 스탈린의 확실한 군사력지원 보장과 더불어 8개월 전에 북경 천안문 누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신예 공산사회주의국가로 등장한 혜성같은 존재 모택동의 조건없는 참전 약속을 움켜쥐고 자신만만했다.

우리 남쪽땅!! 이승만 박사를 수반으로 UN의 축복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이 출범했으나 국내 전체가 시끄럽고 치안상태조차 어수선했다. 김일성은 잘 조직되고 철저하게 군사훈련을 마친 육상, 해상, 공군의 막강군대(20만)로 주말새벽에 기습을 해왔다. 새벽 4시, 남침으로 시작한 전면전쟁!! 이 전쟁은 3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어렵게 정전/휴전으로 전투행위가 멈추게 되었다.

3. 대한민국 분단고착의 원점과 소멸되어야 할 북녘의 정권

(1) 중공군 참전과 또 하나의 전쟁

전쟁 발단 2개월여 만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대반격과 근세 전쟁사에서 획기적이고 기록적인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성공한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 군대는 지리멸렬, 완전 지휘통제권을 팽개치고 북녘으로 후퇴하는 한편 일부 패잔병들은 지리산 등 산악지역으로 삼삼오오 도망가기에 바빴다. 당시 김일성 남침전쟁에 반대했던 중공의 일부고위층은 김일성이는 조만국경 북쪽 산악으로 피신하여 빨치산 작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0월 1일 우리 한국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이 본격화되었고, UN군도 맥을 같이했다.  미국(군)의 경우 본국 전쟁지침의 불협화 상황이 있기는 했으나, 맥아더 장군의 전쟁지침은 김일성의 항복이 있기까지 북진하는 것이었으며, 대한민국과 공히 이 나라의 국토통일까지 계속하는 것이었다. 전쟁양상과 전투 역사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확 바뀌었다. 김일성에게 참전을 약속한 모택동은 스탈린과 공중전력을 포함하여 제반지원의 확인을 받고 10월 19일 전후 30만의 대병력을 참전시켰다. 연 3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들의 참전은 김일성의 재기와 더불어 인민군을 재결속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래서 이 전쟁은 김일성이 시작한 전쟁이지만 625한국전쟁은 두 개의 전쟁이라고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한 한국군과 청천강 원산북쪽까지 올라간 UN군은 허를 찔리고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14 후퇴의 시련을 겪었다. 그 후 평택-속초선까지 밀렸다가 전열을 가다듬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서쪽전선 개성지역, 중부전선, 금화일대,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고성지역까지 밀고 올라갈 무렵, UN총회에서 소련대표가 휴전을 제의했다.

전선은 교착상태로 휴전회담이 장장 2년 3개월 지난 1953년 7월 27일 10:00에 양측 군사령관의 서명으로 그날 밤 22;00에 전 전선에서 현재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기준으로 정전/휴전이 되었다. 서명 당사자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조선인민군 사령관 김일성,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크라크 대장이 서명했다. 이 전쟁의 원흉 김일성은 역사와 민족에게 한마디 말의 사과도 없이 199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땅속으로 묻히지 않고 그들이 만든 헌법상에 영원이 살아 있는 상태로 죽었다

(2) 휴전협정과 국토분단고착
휴전협정 교섭의 막바지단계에서 우리나라 이승만 대통령의 진면모와 놀라운 정치력이 발휘되었다. 반공포로 27,000여 명을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북측 상대방은 물론 유엔군 사령관과 미국을 위시한 참전국 전체가 아연실색하고 혼비백산했다. 이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조치였다. 포로는 전원 일괄 교환으로 양측에 협의가 이루어지는 양상으로 가고 있었고, 이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자유의사로 북송을 반대한 사람들의 인권과 자유선택의지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상을 수락하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여 미국정부(아이젠하워 정부)의 확약을 받아냈다

①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원조 (학교, 병원, 교량, 항만 등의 건설 주도)
② 한미 상호 방위조약의 체결
③ 한국군의 현대화와 육해공 해병대의 균형 증편
④ 전쟁참전 16개국 공동명의의 한국 안전보장 성명
⑤ 전후처리를 위한 관련국간의 정치/평화회담 개최 (90일 기한부)

이승만 대통령은 당대에 동양지역에서 국제적 감각과 세계정세 판단력, 국가 간의 상호존중 외교능력 등 타에 비견이 될 수 없는 대정치가답게 이 엄청난 나라를 보존하는 현안들을 이룩해냈다.

지금, 전쟁은 잠시 멈추어져있다. 62년 전 이야기이다. 1992년에 이르러 국제공산주의/사회주의 이념의 붕괴와 국가체제 해체기류에 떠밀려 세계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 김일성이는 정전협정체제(판문점 회담)를 일방적으로 기능정지 선언을 하고, 중공군의 정전회담대표단과 4개 중립 감시위원국 중 공산진영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을 강제 퇴거시켰다. 이 판문점 회담의 원상회복 문제는 한반도 분할과 고착상태를 확정한 회담이기에 양진영간, 전쟁당사자와 국제기구(UN)와의 협의로 해결해야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분단은 남북 정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많이 변했고, 우리 대한민국은 엄청 발달했다. 세계 G-10 그룹에 있지 않는가?

남북통일은 물론 되어야 한다. 북한정권은 핵개발/보유와 대량 살상무기를 내려놓고 3대 세습에서 벗어나야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 북한 주민이 산다. 북한정권,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① 세계 G-2로 우뚝 선 중국, 흑묘백묘 정책으로 개혁을 견인한 엄청난 대정치가 등소평 방식
② 생명을 걸고 공산국가체제 전복에 도전하여 성공한 폴란드의 바웬사
③ 소련공산 연방체제를 페레스트로이카, 그라스노나트로 혁신한 고르바초프
④ 김일성으로부터 한 수 배워간, 그래서 횡사한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⑤ 캄보디아, 버마, 월맹, 심지어 쿠바까지 그 못된 일인체제를 몽땅 갈아치운

이상 예시한 역사적인 사례들이 좋은 향도지표가 된다. 이들 나라 국민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인권 존중받고 떳떳하게 세계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 역대정부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때는 퍼줘가면서 미국 좀 반미하면 어떠냐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북한은 그들의 체제가 무너질까 두려움에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의 엘리트들에게 기대해본다. “때”라는 것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1) 현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대 북한 평화프로세스, 비무장지대에 국제평화공원 및 생태계조성, 가시화된 가능한 것부터의 경제원조하겠다는데, 최근에 몇 가지 못되게 잘못한 것들을 시인하고 사과하고, “통일의 길 같이 갑시다.”하면, 그것은 아주 큰 박수감이다.

(2) 현 중국의 시진핑 정권이 그래도 과거의 혈맹국이라는 입장과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태평양 지역 안정과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정책을 견지하고 비록 김일성 종가독재정권일지언정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는 중인데, 이러한 정세를 잘 소화하여야지… 지금이 김씨 백두혈통 정권을 내던지고 바꿔야 할 시기로 보는데 그대들이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북쪽의 엘리트들… 2015년도 전반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시간이 아깝고 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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