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인연 – 박 성 국

소중한 인연

박 성 국
공군중장(예)

39년 전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만났고 한국 장교에게 유난히 따뜻하고 친절했던 Henrietta Howarth 란 한 미국부인을 회상해 본다. 그녀는 당시 San Antonio 시의 시청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전형적인 미국 여성이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1976년 공군소령 시절 Arizona 주 Phoenix 에 위치한 Williams 미 공군 기지에서 실전적인 전투비행훈련을 받기 위해 도미했었는데 모든 외국 장교들이 미국 내에서 비행훈련을 받게 될 경우 비행에 앞서 Texas 주의 San Antonio 에 있는 Lackland 미 공군 기지의 영어 학교에서 두 달 반 동안 영어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 교육을 받기 위해 Lackland 기지로 갔는데 도착한 첫 날 그녀는 집으로 저녁 초대를 해 주었다. 마침 그곳에 나보다 먼저 와 영어교관과정에서 교육 중이던 선배 소령 (후에 육군중장으로 예편)과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내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우리를 함께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식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후 주말이 되면 우리에게 유명한 Alamo 요새 등 지역 명소를 두루 구경시켜 주었고 저녁에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 식사와 숙소를 제공해 주어 편안한 주말의 미국 생활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한달 여 정도 지난 후 그 동안 우리들 한국 장교에게 그토록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녀의 호의가 궁금하여 하루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오래 전에 이곳에 교육받으러 왔던 한 선배 해군 장교(우리 보다 약 14 년 정도 선배로서 후에 중령으로 예편 후 대학교 영문학 교수가 되었다 함)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당시 그녀는 남편이 이미 사망하고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유학 온 김 소령을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던 중 아버지가 암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결국 집에서 누워있게 되었다. 그러자 김 소령은 수시로 집에 들려 그녀 아버지에게 면도와 세수까지 시켜주는 등 성심껏 돌봐 주었고 이 같은 김 소령의 따뜻한 보살핌에 그녀 아버지는 매우 감동했다고 한다. 김 소령은 교육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몇 달 후 그녀의 아버지는 결국 눈을 감게 되었다.

그러나 임종하기 전 몇 가지의 유언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는 재산의 일부를 우정과 감사의 표시로 김 소령에게 전해 주도록 딸에게 부탁했다. 결국 딸은 장례를 모두 마치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유산 일부를 김 소령에게 전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녀 아버지와의 관계는 친구간의 순수한 우정이었으므로 그 대가로 재산이나 돈을 받을 수는 없다고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마침 대화 중에 그가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겨우 설득하여 그의 학비만이라도 지원해 주기로 하였는데 그때 그녀는 한국인의 순수함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두 번째 만난 한국 장교

그 후 두 번째 만난 한국인이 우리들이었는데 우리들의 언행과 성실한 자세에서 다시 한번 따뜻하고 반듯한 한국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나는 비행훈련을 위해 Arizona 주의 Phoenix 로 떠났고 선배 장교도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며 우리들은 그 후에도 우정 어린 편지 교환을 지속하였다.

6~7년이 지난 어느 날 결국 그녀도 암 판정을 받아 병원에 입원할 예정이라는 편지를 받았고 몇 달 후에는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2차 수술을 받게 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남편과 아버지에 이어 가족이 모두 암에 걸리는 불행을 맞게 된 것이다.

다시 그녀를 본 것은 내가 대령이 되어 Alabama 주의 Montgomery 에 있는 Air War College 에 공부하러 갔을 때(1986~87)였다. 과정 중 기지 견학의 일환으로 Lackland 기지를 방문하면서 그녀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때 집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우리를 태워주던 그 당시 최신형 Lincoln Continental 승용차는 타이어 바람이 빠진 상태로 폐차 직전인 것 같았으며 그녀의 옛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피골이 상접한 노 환자가 힘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힘든 몸으로 어떻게 구했는지 김치와 함께 저녁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 역시 핑 도는 눈물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생활은 동네 친구들이 교대로 장도 봐주며 병원도 데려다 주고 그런대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내 눈에도 그녀가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옛날 일들을 회상하며 격려와 위로의 대화를 나누었고 집을 나서기 전에 무심코 “내가 뭘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라고 묻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제 뱀장어 가죽 핸드백을 하나 갖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자기 친구들이 한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뱀장어 가죽 핸드백을 사왔는데 너무나 예뻐 보이더라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삶 속에서도 예쁜 핸드백을 갖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소녀처럼 순수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한국에 가는 대로 보내줄 테니 걱정 말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로 그녀를 위로하며 집을 나설 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 편지

“어느 해인가 낙엽이 지는 어느 가을날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만약 올 연말에 그녀로부터 Christmas Card를 받지 못하면 자기는 죽은 걸로 기억해 달라는 슬픈 내용이었다. 과연 그 후에는 Christmas Card 나 편지를 더 이상 받지 못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가족과 함께 이태원에 가서 예쁘게 생긴 뱀장어 가죽 핸드백을 크기 별로 몇 개 사서 보냈더니 얼마 후 소녀같이 즐거워하는 그녀의 감사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다시 2~3년이 흘렀다. 어느 해인가 낙엽이 지는 어느 가을날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만약 올 연말에 그녀로부터 Christmas Card 를 받지 못하면 자기는 죽은 걸로 기억해 달라는 슬픈 내용이었다. 과연 그 후에는 Christmas Card 나 편지를 더 이상 받지 못했다.

회상

1995년 소장이 되어 한미 연합사령부에서 근무할 때 미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마침 San Antonio 의 Kelly 미 공군기지에 있는 미 공군 정보국에서 1박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았고 도착해서 바로 그녀의 소식을 확인해 보았더니 그녀의 몇 년 전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녀의 사망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미 공군 정보국장과 시내 중심가에 있는 Cow boy 정취가 흐르고 고풍스러운 강변 가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라며 꼭 이 Story를 글로 남겨서 한국인과 미국인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그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북핵 문제 등 국내외 상황과 관련하여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강조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지면 관계상 짧게 요약된 내용이지만 옛 생각을 하며 그 때를 회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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