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미군참전 기념물을 찾아서
– 춘천 포니 브리지 기념비를 찾아서 –

최 상 진
전삼성물산 임원, 본 협회 편집위원

봄이 오는 문턱, 도시 이름이 언제나 봄인 춘천 소양강변에서 조용히 역사의 아픔을 달래고 있는 “포니 브리지 기념비”를 찾았다.
전쟁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과 비극적 사실은 앞으로 어떻게 평화를 지켜나가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6·25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국군들의 무용담과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많이 알려져 왔지만 이름 없이 희생된 장병들과 공적을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단위 부대의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이 남아있다.

포니 브리지 기념비 이전행사

2014년 10월 16일 아주 쾌청한 가을날 강원도 춘천시 소양 2교 시작지점, 소양강 처녀상 옆에 “프랭크 포니 브리지” 기념비 이전행사가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니얼 라슨’ 주한미군 공병부장과 육군 2공병여단 장병, 춘천시장, 6·25 참전 유공자 회원들이 참석한 행사였고, 두 번째 기억될 행사는 2018년 6월 25일 한미사령부와 미 8군사령부 공병부(공병부장 리프팅 대령)와 한미공병 40여 명이 참석한 전술토의 및 추모 행사였다.

이때 국방일보에 소개된 기사에 의하면 “포니 브리지: 1951년 7월, 미 62공병대대가 병참선 유지 목적으로 소양강에 목교(木橋)를 건설하였고, 미 24사단 19공병단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에서 전사한 프랭크 하트만 포니(Frank Hartman Forney)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포니 브리지로 명명했다.”고 게재되어 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8일부터 8월 1일까지 불과 26일 만에 건설한 이 다리는 길이 537m, 폭 4.15m로 6.25전쟁 당시 최장의 교량이었고 지금은 길이 510m, 폭 35m의 현대식 교량으로 바뀌었다.

소령 시절 포니 브리지 건설에 참여한 62공병대대의 리프팅 대령은 당시 포니 대령의 업적을 기억하고, 지금도 그와 6·25전쟁을 상기하는 행사를 진행한다면서 ‘오늘 행사를 통해 과거를 잊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는 깊은 관계인 한미동맹을 앞으로도 더욱 돈독히 이어 나가자고 말했다”고 전한다.

포니 브리지의 역사적 배경

미국은 자국의 안전과 국방을 책임지는 군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그 어느 나라보다 훌륭해 배울 바가 크다. 부대의 이름도 대부분이 임무 수행 중 전사한 장병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다. 프랭크 포니 대령은 미24사단 소속으로 전쟁 초기에 투입되어 부임 5개월 만에 청천강 전투에서 산화한 인물로 2차 세계대전 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뛰어난 인품으로 부하들로부터 절대적 신뢰와 존경을 받은 군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포니 브리지 기념비를 취재하면서 포니 대령이 미 8군 예하 24 보병사단 19전투 공병단 부대장이었다는 점에서 몇 가지의 특이한 상황을 풀어나가야 했는데 그 하나는 포니 대령이 속해 있던 미 24사단의 운명 같은 사연과 그와 연관되어 전개된 춘천전투와 청천강 전투를 이해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工兵(공병)이 수행하는 특수한 작전과업의 해석이었다. 먼저 6·25전쟁 초기 상황을 주요일자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0.06.25 04시 북한 공산군 남침(전쟁 발발)

1950.06.27 UN안보리 한국전 참전 결정

1950.06.30 미 지상군 투입

1950.09.15 인천 상륙작전

1950.09.28 서울 수복

1950.10.19. 평양 탈환

1950.10.27 중공군 개입

  • 춘천 전투 : 6·25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본진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남하를 시도하고 있었다. 춘천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서쪽으로는 서울로 진출하고, 남쪽으로는 홍천-원주로 남진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 북한군은 서울 우회 공격의 주요지점으로 춘천을 선택하여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다. 이에 맞선 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초반 패전을 무릅쓰고 1950년 6월 25일∼27일 춘천 옥산포, 소양강 일대에서 민·관·군과 혼연일체로 싸워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시킴으로써 차후 아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청천강 전투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 후 맥아더 장군의 북진 결정에 따라 한국군과 유엔군은 초기 강세가 꺾여 북으로 패퇴하는 북한군을 격퇴하며 만포진-신의주에 이르는 한만 국경선을 목표로 무제한 진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유엔군의 38선 이북의 북진에 따라 자국 안보에 큰 위협을 느낀 중국은 이념동맹과 향후 소련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한 대리전쟁의 성격으로 대규모의 병력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으며, 10월29일부터 12월2일까지 청천강 일대에서 2차례의 대규모 공세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 공세로 유엔군은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게 된다. 청천강 전투의 패인은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과 평양탈환 등 일련의 승리에 따른 자만, 중공군 참전에 대한 정보부족과 과소평가, 2차 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의 모스크바 침공 때와 같은 혹한의 무방비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었는데, 한편으로는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을 비롯한 유엔 강대국 지도자들과 현지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異見(이견)이 정치적으로 비화되면서 시의적절한 지원을 하지 못해 38선 이북지역에서의 전투에 영향을 미쳤고 큰 희생을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 미 24사단 : 미국이 해·공군에 이어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면서 1950년 7월 2일 선정된 최초의 파병부대는 당시 34세의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A대대(일본 큐슈 주둔)였다. 부대장 스미스 중령은 2개 중대 406명을 이끌고 공수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 이들은 곧 오산 지역 죽미령에 포진했다. 하지만 죽미령 전투 참패를 시작으로 대전에서 사단장(딘 소장)이 포로가 되고, 예하 제34연대는 6.25 전쟁에서 재건되지 않고 해체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미군 전사(戰史)에서는 이때 미 24사단이 담당했던 오산에서 낙동강 교두보까지의 후퇴를 ‘defeat after defeat’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초기 정비되지 않은 전력으로 적의 공세를 막아준 미 제24사단의 숭고한 희생은 전쟁초기 대한민국을 지켜준 일등공신이었다.
  • 공병(工兵) : 당시 미 24사단 예하의 공병 부대는 “시작과 끝은 우리가! (FILO-First In, Last Out)”, “안전제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작전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부대였다. 이들은 전투 시 보병을 근접후속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임무를 수행하는 전투공병으로 그들의 임무는 지뢰, 폭발물, 철조망 등의 장애물 설치/제거, 도하작전 시 부교 전개, 아군 기동로 개척 및 방호 진지 건설, 장애물 설치 및 적의 기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설치한 장애물 제거, 폭파된 교량 및 도로 복구, 적 퇴각 시 추가 설치한 장애물 제거, 전투로 인하여 발생한 장애물 제거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투 공병은 ‘건설공병’과는 달리 정예 전투병력((Combat Engineer / Sapper)으로 전후방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하나 지원부대의 성격상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상 기술한 네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Frank H. Foney 대령은 미 24사단 예하 제 19공병단장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성공 이후 북진 중에 청천강 2차 전투 때 전사하였는데(1950.11.29.), 이후 1951년 3월 16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 수복한 후 미 24사단이 공세작전 수행을 위해 춘천지역에 주둔 하고 있었던 그해 7월에 사단 예하 제 19공병단 62공병대대가 군수물자 보급 및 군사 교량으로 당시 최장의 군사작전용 목교(573M)를 건립하였으며, 청천강전투에서 전사한 전 지휘관 이었던 제19공병단장 포니 대령을 기리기 위하여 ‘포니 브리지’로 명명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포니 브리지의 재조명

6·25 전쟁의 초기 전투를 달리 표현하면 준비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일방적인 싸움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단기속전으로 한국을 공산화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초기 훈련이 미흡하고 전열도 갖추어지지 않은 국군, 그리고 전장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들의 긴박한 상황에서의 한국전 참전 등, 당시 한국군과 미군 장병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정예 북한군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초기 전투에서 많은 미군 장병들이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 땅에서 희생되었다. 청천강 전투에서 전사한 포니 대령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기념비를 보며 타국의 전쟁터에서 고귀한 생명을 잃은 수많은 미군 장병들에 대한 애틋함과 그들 가족에 대한 죄송함이 가슴 한곳으로 깊이 밀려옴을 느끼며, 이러한 애틋한 마음이 단순한 애도의 감정으로 끝날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한국전쟁 시 희생된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평화스런 조국과 우리가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나아가 우리나라를 더욱 강건하게 만들어 ‘전쟁이 없는,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미래의 우리 자손들에게 조국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니 브리지’란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소양 2교’란 새로운 이름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군사작전용으로 건립된 ‘포니 브리지’는 춘천의 남북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이는 1976년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가 1997년 지금의 철(鋼)구조물, ‘소양 2교’로 재탄생하게 된다. 아쉽게도 58년의 긴 세월 동안 춘천의 젖줄 소양강은 당연히 가슴에 새겨야 할 조국 수호의 순국 정신을 잊은 채 침묵 속에 가슴 아픈 역사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소양강 처녀상’ 등 볼거리가 많아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된 소양강변에 ‘포니 브리지’ 기념비가 이전되어 한미동맹의 굳건한 징표이며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포니 대령과 그의 공병부대가 재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다행스런 일이다. 이국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미 24사단 전몰장병들에게 숙연한 묵념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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