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 대사님을 추모하며

조원일
본 협회 전 부회장, 전 베트남 대사

박근 대사님은 애국자셨습니다.

박근 대사님은 지난 30여 년간 앞장서서 애국활동을 선도하셨습니다.

대사님은 보수는 자유를 지키는 정치운동이라고 하면서 “역사는 자유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고, 그래서 당대에 제일 번영하는 국가는 항상 자유가 가장 많은 국가였다”고 했습니다. 좌익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이념적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落膽(낙담)하는 후배들과 우리 국민을 격려했습니다.

대사님은 “세계 자유민주주주의 아버지” 링컨대통령과 共通(공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링컨대통령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民主(민주)정부는 최선의 정부로서 어떠한 어려움도 모두 다 극복하고 세상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이라고 했고, 박근 대사님도 민주정부가 한국에서 영속할 것이고, 우리 국민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번영과 발전을 누리는 밝고 힘찬 나라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선각자인 대사님은 1960년 자유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下野(하야)를 극구 반대했습니다. 당시에 대사님은 서기관이셨는데 건국의 아버지 하야에 반대하여 사표를 제출한 유일한 공직자였습니다.

박 대사님은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큰 원인은 박 정희 대통령의 리더십과 한미동맹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국민과 지도자들이 미국처럼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발전한 것입니다.

2001년부터 8년간 한미우호협회 회장직을 맡은 기간에는 솔선수범해 좌파의 반미 난동과 暴擧(폭거)를 막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라를 위하고 협회를 위하는 일이라면 어느 누구에도 머리를 숙일 수가 없다고 하며 ‘행동하는 지성’이기를 그 분은 늘 강조하셨습니다. 좌익분자들이 인천에서 농성하며 맥아더 장군 동상 毁損(훼손)을 시도했을 때는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현장에 찾아가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경찰과 인천시민들을 독려하여 좌익의 폭거를 중단시키도록 했습니다.

2005년에 평택에서 좌익세력이 장기간 농성하며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할 때에는 3개 경제단체의 후원을 받아 재향군인 수천 명과 함께 주한미군기지 이전촉구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좌파의 농성을 중단시켰고, 2008년 부시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에는, ”부시대통령 방한 환영 범국민대회“를 열고,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가 그를 열렬히 환영함으로써 광우병 亂動(난동)을 제압하도록 이끈 분도 박근 대사님이십니다.

부시대통령이 광우병 난동을 보면 “대한민국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나라로 비추어질 것이 아닌가. 그러니 방한을 환영하고 FTA를 지지하는 국민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독지가를 설득할 때 우리나라의 서글픈 현실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박근 대사님의 모습은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분의 지극 정성인 모금활동으로 사무실과 기금이 마련되고, 연중 최대행사인 6월 “한미우호의 밤” 행사와 연말 “송년한미우호의 밤” 행사는 미국에서처럼 테이블을 독지가가 사주는 방식으로 주최해 수백 명의 주한 미군장병들을 매년 정기적으로 초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애국활동을 하는 한미우호협회가 다수 국민의 지원과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라와 자유를 사랑하는 그 분의 지혜와 무한한 열정 덕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또 “世界市民(세계시민)”이셨습니다. 세계시민의 애국주의는 “共同善(공동선)” 즉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이익을 선호하여 애국은 자기 나라나 자기 종족과 部族(부족)뿐만 아니라 人類(인류) 전체의 이익을 추구 하는 것이며, 애국자는 자유와 改善(개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유익한 애국자는 주위 사람들이 마음과 가슴을 열어 더 나아지게 할뿐더러 세상의 기본원칙을 세우고, 개인이익은 사회이익에 일치하도록 하고, 국가이익은 인류의 이익에 부합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박근 대사님은 또 명연설가로 널리 알려지신 분이기도 합니다.

대사님이 미국대사관 근무 중이던 1963년 텍사스 Weyland Baptist College에서 외교관으로서 첫 연설을 했는데 ”한국인의 熱望(열망)“이란 연설은 미국 죤슨 대통령, 교황 바울 6세, 프랑스 드골 대통령 연설과 함께 1964년 1월 15일자 세계의 주요연설(Vital Speeches)로 선정 되었는데 한국인 연설로는 처음입니다.

그분은 이 연설에서, “경제자원이 부족하고 사회문화와 전통이 다르며, 끊임없는 공산주의 도발에 직면하고 있는 개도국 국민에게는 짧은 기간에 세련된 새 정치제도를 억지로 덮어씌울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민주주의 내용이 미국 민주주의의 複寫版(복사판)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 말은 민주주의원칙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운용과 절차에 있어서는 국가 간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내가 밝히는 것 뿐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屬性(속성), 즉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갖춘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한국인의 세 가지 열망은 통일, 번성하는 경제, 그리고 민주주의이다”라고 미국지성인들을 설득했습니다.

월남전 부상병을 살리는 외교

1969년 영국공사로 근무 시에는 제네바에서 개최된 인도주의회의에 파견되어 베트남戰場(전장)에서 砲火(포화)를 피하게 부상병이송 헬리콥터에 국제적십자사 휘장을 표시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학도병으로 6. 25동란에 참전한 경험을 살려 베트남 전장에서 한국군, 미군 부상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십자휘장을 표시한 헬리콥터의 구출활동 뿐이므로 각국 대표들은 인도주의정신을 발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소련과 공산권국가 대표들은 막무가내로 반대했고, 북한대표는 박공사에게 ”당신 연설은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결국에는 양심에 호소하는 박공사 제의가 전체회의에서 채택되었습니다. 박공사는 이 快擧(쾌거)로 미국 국방장관으로 부터 감사서한을 받기도 했습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

코리아게이트사건 때 우리 정보당국은 박정희정권을 겨냥한 미국정부의 공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언론은 ”박 대통령의 협조거부로 코리아게이트 조사가 어렵다“고 보도했습니다. 태국에서 근무하던 박 대사님은 미국언론 보도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잘 알고 지내는 태국 내 CIA책임자에게 즉각 본국에 보고해 달라고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대한민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나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이때에 만약 미국이 박대통령을 해치려 한다면, 나는 즉시 사직하고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이다.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남한은 북한에게 점령당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외국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동족인 북한의 노예가 되겠다.”

약 2주후에 CIA책임자는 박대사님에게 “미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동선을 체포하여 심문할 것”이라고 응답해오자 박 대사는 귀국하여 이 사실을 박 대통령 에게 보고하고 박동선이 미국조사에 응하도록 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미국 朝野(조야)의 최대 관심사는 케네디家와 매사추세츠 민주당원들이 30여 년간 공들여 키워온 팁 오닐 하원의장의 부정부패문제이었는데, 쌀 수입업자 박동선의 불법행위를 미국에서 조사한 결과 하원의장 에게는 골프채를 선물한 것뿐이어서 세상이 놀랄만한 큰일은 아닌 것으로 밝혀져 泰山鳴動에 鼠一匹(태산명동에 서일필)격으로 마무리 되었고, 박근대사님의 非常(비상)한 외교역량으로 한미 간 갈등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태국의 새마을 운동

1975년 베트남에 이어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도미노현상의 다음 희생국은 태국이 될 것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돌았습니다. 그 무렵 태국 國王(국왕)은 빈곤한 산악지역주민들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국왕과 王妃(왕비) 그리고 공주들이 꿇어앉아 농민을 맞이하는 겸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안락한 궁중생활을 떠나 자주 농민들과 함께 땀 흘리며 고충을 나누는 광경을 보고 박 대사님은 태국국민들이 王室(왕실)을 지극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국왕이 농촌의 灌漑(관개)시설 개발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으므로 박대사님은 국왕을 도와 태국 공산화를 막는데 일조하기로 결심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박 대통령은 덤프트럭과 불도저를 태국 국왕에게 보내주도록 했습니다.

대사님은 태국 농민대표들이 방한해 새마을운동 정신을 배우도록 주선하는 한편 새마을운동 필름을 태국정부와 방콕시에서 상영하고, 다양한 기회에 태국총리, 장관, 시민들과 함께 방콕의 廣場(광장), 관공서나 식당 등 모임에서 새마을운동 노래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분은 태국에서 제일 유명한 대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떠날 무렵에는 태국이 도미노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완전히 사그라졌고, 태국국왕은 훈장수여로 대사님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소련 전투기의 대한항공기(007) 격추사건

19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는 내비게이션 오류로 소련영공에 진입한 대한항공 여객기에 미사일을 발사해 269명의 탑승객과 승무원을 몰살시키고 나서 賊反荷杖(적반하장)으로 대한항공이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박 대사님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민간항공기구회의(ICAO; 190여개 유엔회원국 대다수가 회원국)에서 소련전투기는 “사슴을 먹잇감으로 찾는 맹수같이 고의적으로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켰고, 소련 공산정권은 무고한 인명을 빼앗은 폭력을 미화하는 속성을 들어내고 있다”고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민간 항공기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소련은 “惡(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했고, 몇 년 후에는 고르바초프, 옐친 등 소련지도자들 조차도 공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공산당과 소련을 해체시킴으로써 東歐(동구) 위성국가들은 일제히 공산주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모두 자유민주국가로 轉向(전향)하게 되었습니다.

GATT이사회 의장

1986년 제네바에서 대사로 근무하실 때는 그 곳의 가장 중요한 국제기구인 GATT이사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100여개 회원국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만큼 통상 4–5년 이상 근무한 대사들이나 선출될 수 있는 어려운 직책인데도 불구하고, 박 대사님은 부임한 지 불과 1년 만에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며 그의 외교활동이 얼마나 超人的(초인적)이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GATT이사회 의장으로서 그는 이 기구가 훗날에 World Trade Organization(WTO)으로 확대 발전 하도록 토대를 쌓으셨습니다.

박대사님은 종종 의미 있는 조크를 하셨는데 시장경제가 아닌 중국이 GATT에 옵서버(대학의 청강생 자격과 같음)가입을 신청하자 “중국대사 이름이 “錢(전)”으로 돈이란 뜻이므로 옵서버 가입자격이 된다”고 말해 좌중이 폭소하기도 했습니다. 중국대사 본인은 다소 모욕감을 느꼈을 수도 있으나 중국인들이 평소 우리를 대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박대사님께서 이사회의장으로서 관대함을 보여준 사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박대사님이 명연설가가 된 것은 애국자인 동시에 세계시민으로서 깊은 철학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엔대사 시절(1986 88)

박근 대사님은 마지막 요직인 유엔대사로서 서울올림픽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동구권 대사들과 친분을 쌓는 동안에 북한대사는 동구권 국가들이 서울올림픽에 불참하도록 방해공작을 했습니다.

북한의 대한항공기 테러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었는데, 북한의 테러공작원 김현희는 항공기 수하물 칸에 플라스틱 폭탄을 두고 바레인공항에 내렸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청산가리 봉지를 입에 넣었으나 목에 걸려 죽음을 면한 김현희는 서울의 발전된 모습을 보자 자기가 상상한 것과 너무 달라 차츰 마음을 열고 실토하게 되었는데, 대한항공등의 보안이 허술함을 들어내어 많은 국가들의 서울올림픽 보이콧트를 유도하려던 목적으로 김정일 특별지시에 따른 테러공작임이 들어났습니다.

박 대사님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연설에서 “북한과의 오랜 투쟁에서 대한민국은 항상 독일철학자 니체의 金言(금언) – 우리가 괴물과 싸울 때에는 우리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다고 하고, 북한대사 박길연을 향해 “망상에서 깨어나 세상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준엄하게 질책했습니다. 다음 날 “미국의 소행”이라고 허무맹랑하게 거짓말 하는 북한 대사를 보고 안보리 대표들이 고개를 저으며 측은하다는 내색을 하자, 북한대사는 그의 표정이 우려와 羞恥心(수치심)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감추지 못 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북한의 테러나 동구권 결속을 통한 서울올림픽 방해공작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다가오자 소련, 중국과 동구권 대사들이 박대사님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 오는 것을 보면서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직관적으로 느꼈습니다.

제가 1983년 대한항공 007호기 격추사건 때 국제민간항공기구 회의에서 박근 대사님을 보좌하고 3년 후에 유엔에서도 그분을 보필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또 세계시민으로서 어떤 세계관과 윤리관을 가지고 얼마나 忠誠(충성)스럽게 나의 열정과 노력을 바쳐야 마땅한 지를 배울 수 있었단 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고 믿습니다. 그 분이 깨우쳐 주신 것 중에 조금이나마 조국을 위해 제 열정을 바칠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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