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를 사수하라

최상진
전 삼성물산 임원, 본 협회 편집위원

지평리지구 전투 전적비를 찾아서

참전비를 찾아 나서면서 단순히 비석(碑石)에 담겨진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과 그동안의 깊지 못한 탐구에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미 제 2사단의 사단의 혁혁한 전공은 세계 전사 속에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시 2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내 조국 지키듯 대한민국을 지켜온 미 제 2보병 사단의 족적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헌신과 전공(戰功)을 좀 더 널리 알리고 감사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 졌다. 이에 한국전쟁 중 중공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으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소중한 승리로 재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 전투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4월의 봄꽃이 한차례 지나간 지평리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농촌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가 이 땅에 전쟁의 화마가 덮쳐 참혹한 살상의 현장이 되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픔의 현장이 되리라 예측했을까? 원래 지평리(砥平)는 사방이 낮은 산(갈지산, 용문산, 칠보산, 봉미산, 배미산, 매봉산)들로 둘러싸여 십 여리의 분지로 형성된 속칭 숯돌마을로 불리어졌던 평화스런 마을이었고 지리적으로는 동으로는 원주, 남쪽은 여주, 북으로는 홍천 서쪽으로는 서울로 통하는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서 군사적으로도 선점해야할 주요거점이기도 하다.

지평은 의향(義鄕)이라고도 불린다.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찬탈할 때 지평출신 이영춘과 김백선은 포수 400여명과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며 전국 의병봉기의 불을 붙였고 향후 독립군으로 활동이 계승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가 소재한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번지에는 지평의병과 지평리 전투를 기념하는 “지평의병‧지평리전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이 기념관은 2014년에 양평군이 건립하였고, 작년 9월에 얼마 전 작고한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풍산그룹 류진 회장의 협찬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1층은 전시실, 2D 역사 인포 그래픽, 2층은 지평리전투 체험관, 지평리전투 영상 체험실, 전망대등이 설치되어 해외 방문객을 위해서도 다양한 언어로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지평리 전투의 역사적 의미와 그들의 소중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왜 지평리 인가?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 후 제 4차 공세에 대한 전투이다. 이시기의 전황은 전쟁발발 7개월이 경과된 시점으로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국군이 연전연패하여 전선포기의 기로에 섰던 심각한 상태로 그 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중공군의 3차에 걸친 공세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차 공세 (1950.10.25-11.7)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과 유엔군의 파죽지세 공격으로 10월19일 유엔군은 평양에 입성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같은 시점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를 총 지휘관으로 한 중공군 제 13병단 26만여 명은 이미 평북 적유산맥에 잠복하여 유엔군의 후방차단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하지 못한 미 제 2사단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고 국군 6사단은 압록강 초산을 점령 한 후 북진을 기도했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작전계획이 무산되었다.

2차 공세(1950.11.25-12.15)

1차 공세에서 중공군의 개입이 입증된 가운데 11월6일부터 24일까지 중공군이 홀연히 잠적, 행방이 묘연해 졌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과소평가하여 중공군을 싸울 의지도 준비도 충분치 않은 단순개입으로 오판하였고 동시 중공군과의 확전을 원하지 않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의 기치로 11월 24일 크리스마스 작전을 단행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중공군의 대대적 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평안남도 영원에서 평양으로 우회하는 포위망을 구축하여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녀 섬멸 한다는 중공군의 완벽한 함정에 빠진 유엔군은 사력을 다해 후퇴작전을 수행하지만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12월 중순에는 38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어 군우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 함흥철수 작전 등의 후퇴로 이어진다.

3차 공세(신정공세, 1950.12.31-1951.1.8)

중‧조 연합사령부가 창설되어 김일성의 지휘권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마오쩌뚱(毛澤東;모택동)의 서울 재점령 지침에 따라 중‧조연합군 9개 사단 30만 명이 서부전선을 강타한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유엔군이 현 위치에서 더 이상 지체할 경우 주력이 중공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 선으로, 이어 1월 3일에 다시 평택-안성 선으로 후퇴를 명했다. 이에 따라 서울은 저항 없이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중공군의 공세로 아군은 아무런 대비책이 없이 “중공군이 공격해 올 경우 후퇴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빠지게 된다. 한편 3차 공세로 서울을 재 점령한 중공군은 서울점령 후 1월 8일 이후 일단 공격을 멈추어 양측 모두 전력 재정비 등 짧은 소강상태를 갖게 되며, 약 2개월의 짧은 시간에 1,250Km를 후퇴한 유엔군은 여주-평택을 잇는 37도 선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전력을 재편성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나 중공군의 대대적 공세로 주력의 후방이 완전 포위될 위험요소는 상존하고 있었다.

지평리에서 반격의 실마리를

중공군의 3차 공세 이후 평택-삼척선에서 안정을 되찾은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15일 울프 파운드(Wolf found;미 제 25사단 27연대의 별칭)작전을 통해 연대규모의 위력수색으로 한강 이남에는 중공군의 주력부대가 없고 차기 공세를 위해 홍천-양평(지평면)을 전초기지로 하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그들의 최대 장점인 기습전략, 인해전술, 매복, 포위 등의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깊숙한 산속에 매복하여 은신하였다가 소수가 다수인양 소부대 접전으로 유엔군의 상황을 파악한 후 야간을 통해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리치웨이 사령관은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썬더볼트(Thunder bolt) 작전과 라운드 업(Round up) 작전을 통해 대대급 이상의 정찰대를 적진에 투입하여 중공군을 전장으로 유인하여 강력한 공중폭격과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섬멸하고, 중공군의 최대 약점인 보급로를 차단하고 통신을 교란시켜 중공군의 대규모부대 지휘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등 수세에서 공세로 국면을 전환시키는 공격위주의 작전을 계획했다. 드디어 1951년 1월 24일 전쟁의 판도를 바꿀 썬드볼트 작전개시 명령이 떨어졌고 첫 번째 중공군과의 조우가 지평리 인근의 쌍굴전투를 위시로 수리산, 관악산 전투 등 부분적인 승리를 통해 라운드 업 작전의 시동을 걸고 수도 서울 재탈환(1951.3.16)을 도모하게 된다.

지평리에 감도는 전운

중공군은 3차 공세 이후 주력 부대를 은밀하게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 횡성과 원주를 확보한 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걸쳐 미군의 허리를 자른 뒤 미 8군의 주력부대를 측방으로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리치웨이 사령관은 미군의 주력인 제 9군단과 10군단의 경계선상으로 지평리가 무너질 경우 중부전선 전체가 위험하게 됨에 따라 반격작전의 선봉대로 미 제 2사단의 연대전투단(RCT)으로 편성된 23연대에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2월 11일 횡성을 수비하던 한국군 8사단이 격파되면서 유엔군은 중부전선에서 25마일 후퇴하게 되었고 중공군에게 첩첩이 포위된 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리지웨이 사령관으로부터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하달 받았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23연대의 “지평리 사수” 명령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전황 상 23연대가 지평리를 사수해야 했고, 두 번째는 유령군대라 불리울 정도의 신출귀몰한 중공군의 정체를 파악 섬멸하는 라운드업 작전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였다.

일백 시간의 사투, 지평리 전투의 영웅들

중공군의 4차 공세는(1951.2.11-18) 지평리 전투를 정점으로 하고 있다.
13일 밤 총공세에 맞선 프리만 연대는 철저한 방어 전투에서 참모장이 전사하는 등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고 13일 자정을 넘기며 연대장이 다리에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된다. 군단장은 즉시 후송을 명하고 새 연대장을 임명했으나 프리만 대령은 이에 응하지 않고 연대를 지켜나갔다. 그는 “내가 부하들을 이곳에 데려왔으니 내가 이들을 데리고 가겠다”며 부하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그의 현명한 전투지휘로 지평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했다. 프리만은 후일 미 제 2사단장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 나토 사령관을 역임했다.

지평리 전투에는 세계 1차 대전의 영웅 몽클라르 프랑스 대대장이 있었다. 삼성장군으로 예편했던 그는 한국전쟁에 대대급 병력을 파견하는 프랑스 정부의 방침에 따라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 59세에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프로군인 정신을 보유한 몽크라르 대대는 육탄전도 불사하는 전투력을 발휘해 23연대가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는 “평화를 깨뜨리는 군대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강인함과 용맹성으로 일곱번의 결정적인 전상을 입은 100% 장애등급자 였다.

지평리 전투의 대미(大尾)는 미 제 1 기병사단 제 5기병연대의 대 활약이다. 미 23연대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포위망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중공군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이상으로 새로운 병력을 증원하여 투입되었다. 이에 미 제 9군단장은 장호원에서 전열을 정비 중이던 제 5 기갑연대를 급히 지평리로 진출시켜 “제 23연대를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중공군의 포위지역을 돌파하였으며, 2~3일 소요될 5마일의 거리를 하루 만에 기동하여 어둡기 전에 지평리에 도착, 23연대 전차부대와 연결에 성공하여 중공군을 격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미 2사단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의 손실을 입은 반면, 중공군은 5천여 명이 전사하고 포로 79명을 획득하는 대 전과를 기록했다. 이 전투로 인해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 이래 연전연패 후퇴의 악몽이 끝나고 새로운 반격의 발판을 만들게 되었다.

지평리를 지키는 사람들

“지평 의병, 지평리 전투 기념관”은 양평군과 한국군 보병 5사단이 건립하였고 양평군이 관리하고 있다. 그 곳에는 6.25 당시 17-8세의 나이로 지평리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고 향후 전선을 지킨 참전용사 몇 분이 9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당시의 기록을 보존하고 있으며 방문객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며 ‘지평리 전투’의 숭고한 정신을 일깨워 준다. 그분들 중에 예비역 육군 대령 출신 전사연구가 이정환옹은 지평리 전투의 각종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여 “지평리를 사수하라”와 그 후편인 “지평리 승전”을 발간하였으며, 참전 유공자회 지평분회 임원진으로 있는 박광만 회장, 김이만 총무, 이정훈 이사는 아직도 당시의 전황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방문객들에게 소상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특히 이정훈씨는 “그 전쟁터에서 나는 살았다”란 기록을 통해 당시 17세 소년이 본 전투상황, 참상, 공포, 피난의 현장을 소상히 전하며 중공군의 민가침입과 약탈, 중공군이 생명과 같이 지참했던 흰보자기(눈에서 은폐용으로 사용) 이야기 등을 전한다. 필자가 방문한 그 때에도 이 분들은 손님을 맞고 당시를 회고하며 이 땅에 다시는 6.25와 같은 불행이 찾아오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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