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의 영웅들

최상진
전 삼성물산 임원,본 협회 편집위원

6.25 한국전쟁에서 지평리 전투는 연합군이 중공군과 대치한 이래 최초의 승리였으며 그 승리를 발판으로 상대에 대한 전략과 허실을 완전히 파악하여 전쟁을 일단 종식시키는(휴전) 계기가 되었다. 지난 호 “지평리를 사수하라”에 이어 지평리 전투에서 영웅담을 기록한 지휘관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결과론적으로 6.25 전쟁은 남북 민족상잔의 비극적 슬픈 사실이지만 양상은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과 중공군의 대리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중공군)의 참전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 국공내전과 빈약한 재정으로 전쟁수행을 어려우며 설령 참전한다 하드라도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오판하였다. 전쟁 수행능력을 첨단무기와 훈련으로 조직화된 병력, 군수지원으로 크게 판단한다면 당시 중공군의 위상이란 그렇게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산인해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은 무서웠고 위기상황이 연출되면서 유엔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지나간 전쟁의 결과를 손무의 손자병법에 비추어 보면 전쟁의 원칙은 동서고금을 통해 동일하게 적용되나 전략, 전술을 운용하는 지휘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중공군의 개입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명분으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1950년 10월19일 경으로 짐작되어 진다. 중공군이 은밀하게 전개한 첫 번째 전략은 병법 시계(始計)의 궤도(詭道) 즉 속임수로 시작하였다. “兵者, 詭道也, 故 能而示之不用, 用而示之不用, 近而視之遠, 遠而視之近” – 용병이란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어도 없는 듯 하고, 용병을 하면서도 용병하지 않는 듯 하며,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하고,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척 하여야 한다 –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가 시작되기 전까지 13개 병단 26만명이 평북 적유령 산맥 깊숙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대규모 병력으로 매복, 기습을 일삼는 중공군은 유령부대로 일컬어져 산악전과 살인적인 한파에 적응하지 못한 유엔군에게는 그들의 소리공격(함성,꾕과리,나팔 등)마저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모공(謀攻)편의 공격방법의 적용이다. “故 用兵之法 十則圍之, 五則攻之, 培則分之, 敵則能戰之, 少則能逃之, 不若則能避之, 故 小敵之堅, 大敵之擒也” – 고로 전쟁하는 방법은 적보다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 이상이면 공격하고, 두 배 이면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고, 비슷하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적보다 병력이 적으면 도망치고, 승산이 없으면 피해야 한다. 소수의 병력으로 무리하게 싸우면 강대한 적의 포로가 될 따름이다 –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중공군의 주 전략은 유엔군과 국군의 진지를 겹겹이 둘러싸고 보급선과 퇴로를 차단하여 일시에 공격하는 포위섬멸 작전이었다. 1.4후퇴까지 유사한 전략으로 일관해온 중공군의 최대 약점은 소련의 지원을 얻지 못해 제공권이 거의 제로였고 갑작스런 대규모 병력운용에 따른 지휘계통의 혼선, 통신 불비에 따른 명령, 지시의 오류, 무기와 화력의 절대부족, 전장이 길어짐에 따른 식량을 포함한 제한된 보급능력, 도보부대의 한계등 문제점이 점차 현실적으로 노출되었다. 중공군은 51년 2월초 4차 공세부터 유엔군의 극심한 공중폭격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특히 야간에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병사들은 폐렴과 소화기 질환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1950년 12월 26일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에 전격취임 한 리지웨이(Gen Mathew B Rigeway)중장의 급선무는 청천강 전투 이래 팽배해져 있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적의 실체를 파악한 후 고지 점령에 앞서 적을 유인하고 막대한 인명타격을 줌으로서 사기진작과 군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후퇴를 쉽게 허락하지 않으며 솔선수범하여 전선을 누비고 예하 지휘관을 설득하여 반격작전을 관철하는 용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군복에 두 개의 수류탄을 달고 다닌다. 트레이드 마크 이기도 한 수류탄 장착은 2차 세계대전 시 미 82 공수사단장 이래 착용한 낙하산 공격부대의 전투복장 이었다고 한다.

미국이 선정한 6.25 한국전쟁의 4대 영웅(맥아더 장군, 리지웨이 장군, 백선엽 장군, 북파 공작원의 대부 김동석 대령)의 한 시람 이기도 한 리지웨이 사령관은 6.25 한국전쟁 중에도 다수의 한국군 청년장교를 선발해 6개월씩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유학을 보내는 미래지향적 리더십을 보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51년 맥아더 장군의 해임과 동시 대장으로 승진, 유엔군령관으로 취임하였으며 공산군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한 중국의 펑더후이(彭德懷)와 김일성에게 휴전안 동의를 얻어냈다. 리지웨이 대장은 1952년 5월12일 나토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후 1993년 7월 26일 타계하였는데 군 후배들로부터 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사려 깊은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전설적인 프랑스의 영웅 몽끌레아 중장

프랑스는 유엔 안보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에 포함되어 있다. 이사회의 역할은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 조사할 권한과 평화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권한과 의무를 수행한다. 6.25 한국전쟁 발발 시 프랑스는 상임이사국으로 일정규모 이상의 군대를 파견해야 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미온적인 태도를 일관하다가 대대급 외인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몽끌레아(본명, 마그랭 버르너르·Magrin Vernery)는 당시 59세의 육군 중장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22세에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임관 후 37년간 전장을 누빈 몽끌레아는 불굴의 군인정신으로 정부의 책임감 없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며 자원하게 된다. 대대장 직책에 중장 계급이 합당하지 않다는 르죈느 국방차관의 염려에 그는 육군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강등하여 유엔군 프랑스 대대 초대 지휘관(1959.11.29 – 1951.11.30)이 되었고 참전 동기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그가 최초로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대대는 미 제 23연대에 소속으로 그 안에는 80명의 한국군 카투사와 100명의 일반 병 도합 180여명의 한국군 병사가 있었다. 당시 대대원으로 복무한 임응상 옹(이정환 저, 지평리를 사수하라 참조)은 외인부대를 용감무쌍하여 패배을 용납하지 않고 군인으로서 당당했으며 외인부대의 긍지와 자신감 넘치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빨간 머플러와 베레모, 지휘봉을 든 백전노장의 몽끌레아 중령은 지평리 전투 첫날인 1951년 2월 13일 밤 어둠 속을 공격해 오는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20야드 앞까지 왔을 때 대대장의 사격명령이 떨어졌고 마지막에는 백병전을 벌리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 전투가 지평리 전투의 첫 개가였고 23연대 사기진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대대는 약 천 명의 규모로 연합대대의 일원으로 쌍굴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7차의 치명적 戰傷으로 90% 장애 등급자인 그는 1년 후 정년으로 귀국,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64년 6월 3일 72세로 파리에서 작고하였다. 프랑스의 국민영웅으로 칭송되는 몽끌레아는 국가를 대변하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투철한 군인정신을 보여준 진정한 영웅이었다.

기적을 만든 23연대장 폴 프리맨 대령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 2사단 23연대의 역할과 전적은 지난 호에서 소상히 설명한바 있어 이번에는 연대장 폴 L 프리맨(Paul L Freeman) 대령 개인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는 1907년 필리핀에서 출생하였고 1929년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 후 미 제 9 보병사단에 배속된다. 1936년 중국 천진의 제 15 보병연대로 전출되었으며 주중 미국대사관 부 무관 보좌관으로 근무하는 동시 중국어 연수과정을 수료해 중국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의 23연대는 1950년 7월 31일 부산에 도착, 8월 19일 다부동 전투에 참가하여 인민군 14연대를 격파하는 전적을 올린다.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제 2사단 본대는 약 5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단장까지 산으로 탈출하는 상황에서 프리맨은 기동로를 바꾸는 기지를 발휘, 12월 1일 집결지인 개성에 도착하게 된다. 그 후 23연대는 원주전투를 거쳐 쌍굴터널 전투에서 중공군 제 125사단에 승리를 거둔 후 1951년 2월 3일 지평리 방어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智將(지장)이요 德將(덕장)으로 참호와 참호를 오가며 부하를 따뜻하게 다독거리고 격려하였으며 전투 대비를 철저히 하여 부하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된 2월 13일 자정 무렵 그는 박격포 파편에 종아리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다. 사단장의 즉시후송 명령을 완곡히 거부하며 ”나는 23연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여기 왔다. 그러기에 나는 23연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승리한 다음 나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부하들에게 전하며 2만 명의 중공군을 퇴치 할 수 있었다. 군인이 전쟁터로 출발할 때 가족에게 남기는 말은 자기를 지켜온 마지막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고향에 남은 아내에게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 지역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어떤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소“ 라고 편지를 보냈다. 항상 자신의 수련과 내공을 바탕으로 먼저 시범을 보이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은 뒤 지휘권을 행사함으로서 실패없이 부대를 이끌어 나간 프리맨 대령은 기적에 가까운 분투로 지평리를 사수하였고 1955년 미 제 2사단장, 1962년 육군대장으로 승진, 미국 대륙간 육군사령관을 역임 후 1967년에 은퇴하였으며 1988년 캘리포니아에서 타계하였다.

달리면서 사격하라, 마셜 G 크롬베즈 대령

2월13일 밤부터 세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육탄전도 불사하며 잘 사수해 왔지만 중공군은 15일 대공세를 준비하여 포위망을 더 압축해 오고 있었다. 프리맨 연대장이 중상을 입은 가운데 자력으로 포위망을 풀고 적을 퇴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유일한 해결책으로 미 제1기갑사단 제 5기갑 연대에게 15일 저녁까지 지평리에 도착하여 현장 지원토록 명령했다. 연대장 크롬베즈는 즉시 특임 팀(Task force Crombez)를 구성, 지평리로 곧장 진격을 시작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엄호‧지원 병력을 탱크 갑판에 탑승시킨 채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야 했고 적의 맹렬한 저지에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명령은 오직 하나 “정지하면 안 된다. 달리면서 사격하라” 였다. 죽음의 死線(사선)을 돌파해 17시 15분 크롬베즈 연대는 지평리에 도착했고 프랑스대대를 포함한 23연대원들은 탱크에 눈물의 키스를 퍼부었다. 크롬베즈는 1900년 10월3일 벨기에 태생으로 1925년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하였으며 준장으로 예편한 뒤 1982년 81세로 산타클라라 카운티에서 타계하였다.

이름 없이 산화한 빛난 영웅들에게 감사를
이렇게 지평리 전투는 막을 내리고 휴전의 수순을 밟게 된다.
살상을 전제로 한 전쟁은 승리와 패배를 떠나 인류역사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참전비나 전적비를 취재 시 마다 느끼는 사항이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이름 없이 산화한 수많은 젊은 영웅들에게 깊은 감사와 애도를 표하고 남의 땅, 남의 하늘 아래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동맹국 장병들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수호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할 것을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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