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운명을 지킨 명장 월턴 H 워커 대장

최상진
전 삼성물산 임원, 본 협회 편집위원

급박한 전황

1950년 6월25일 일요일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은 오랜만에 경회루에 낚시를 계획하고 있었고 미국의 투르먼 대통령은 주말을 맞아 고향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력팽창으로 또 다른 전쟁의 조짐을 보인 가운데 (구)쏘련은 유럽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중공)은 아시아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의 총구는 중국 공산당과 타이완(대만)과의 전쟁에서 터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남북한은 역시 분단의 갈등을 겪고 있지만 군대의 수준이나 모든 상황이 전쟁을 일으킬 상황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전쟁 준비는 철저하고 집요했다.

개전당시 피아 전력을 보면 북한군은 20여만 명의 병력과 소련에서 지원받은 당시에는 최고 성능의 T-34 전차 242대, 구경이 큰 야포 172문, 야크전투기(YAK)를 포함한 211대의 항공기와 대소함정 100척 이상이었다. 여기에는 전술한 중공군에서 편입된 조선인 편성 4개 전투사단이 포함되었으며 이 전투사단들은 낙동강 선까지의 공격 전투에서 주력부대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 국군은 10만여 명의 병력이 소구경 야포로 무장하였으며, 탱크와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으며 특히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대전차 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국군에는 대부대 전투경험이 있는 부대가 하나도 없었으며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대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치명적인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다.

준비된 침공자와 준비되지 못한 자의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남침 6시간 후, 이 대통령이 보고 받은 시점인 10시 경에는 T-34 전차부대가 파죽지세로 의정부와 문산을 축선으로 서울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기고 이 대통령은 대전-목포-부산을 거쳐 7월 8일 대구에 임시 경무대를 설치하게 된다. 전황은 급속도로 나빠져 7월1일 미 8군 제 24사단 제 21연대가 주축이 된 스미스 특임부대(Task Force Smith)가 부산에 도착 7월4일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의 첫 교전을 벌렸으나 큰 희생을 내고 패배 하였으며, 이어 34연대가 경전차 부대와 19연대까지 투입된 금강 전투에서도 사정없이 패배하여 12일에는 금강너머로 후퇴해 있었다. 한국군 또한 뚜렷한 미군과의 연계도 없이 지리멸렬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워커장군이 초대 주한 8군사령관 겸 지상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튿날 대한민국 정부는 7월14일 “전쟁이 끝날 때 까지”의 단서조항으로 한국군 군사 작전권을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한다. 전선을 시찰한 워커 사령관은 모든 전략전술을 공세에서 사수, 지연 전략으로 바꾸고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방어선(Walker Line)을 구축한다. 8월5일 상황은 영덕, 포항, 대구, 진주를 잇는 600리 역기역자 형태의 전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그의 역할은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정상적 전투를 치를 수 있을 때까지 전장을 사수하고 최소한 지원군이 교두보를 설치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7월29일)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제 25보병 사단을 방문해 전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로 침울한 군대를 독려한다.

“우리에게는 덩케르크(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철수작전을 한 곳)도, 바탄(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철수한 곳)도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유례없는 대참극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 팀으로 싸운다. 물러서는 자는 전우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모든 장병들은 우리가 방어선을 지켜낼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Stand or die.”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I will stay here to protect Korea until my stay)” 그는 임전무퇴, 살신성인의 군인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이렇게 약 45일간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미군은 T34를 파괴할 수 있는 3.5인치 바주카포와 M4A3셔만 탱크가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대구의 8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항공지원 및 함포지원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어 9․15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9월18일 서울을 수복하였다.

워커 사령관 그는 누구인가?

월튼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 ~ 1950년 12월 23일)는 워커는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의 벨턴(Belton)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뉴욕 웨스트포인트의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한 계기로 장군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905년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입학, 브랜든 육사준비학교를 마친 후 1908년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2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시 제 5 보병사단 기관총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계기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때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조지 패튼이 지휘하던 제3야전군 산하의 20군단장으로 참전하였는데 빠른 기동성과 활약으로 그의 부대는 “유령 군단” 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프리카에서 롬멜 장군의 전차부대를 격파한 뒤 중장으로 승진한 월튼 워커장군은 1948년 9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전세가 어려워지자 곧바로 대구에 미 8군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7월 13일, 초대 주한 미 8군사령관 겸 지상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녀의 난중일기라고 일컫는 “Mrs. Rhee’s Diary”에서 “워커 장군은 앉은키와 선키가 거의 비슷해 보였으나 벌어진 가슴과 불독같이 생긴 깊이 패인 주름의 강인한 인상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라고 회고 하였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전선을 누비며 상황을 파악하고 소신을 분명히 하는 덕장이요 용장이라고 일컬어 졌는데 6․25 참전용사이자 역사저술가인 페렌바크(T. R. Fehrenbach)는 『한국전쟁』에서 “워커 장군의 용맹하고 솔직하면서도 고집이 센 성품이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3. 비운의 초대 8군 사령관 워커대장

워커 장군은 과거 유령부대의 사령관답게 쉬지 않고 전선을 누벼 평양 탈환이후 중공군의 3차 공격 시 까지 왕성한 활약으로 전장을 이끌어 갔고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시로 전황을 전달하고 긍정적 조언을 함으로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1950년 12월 23일 10시, 워커장군은 미 24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방문하고 아들인 샘 S.워크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기 위해 가던 중 의정부(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596-5자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가 타고 있던 지휘관 지프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보병 6사단 2연대 소속 한국군 스리쿼터 차량과 충돌하여 전복, 야전병원으로 긴급후송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다. 워커 장군의 유해는 미군 역사상 최초로 곧바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이때 맥아더 장군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귀국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이때 샘 심즈 워커 대위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 부대원들을 두고 혼자 만 떠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나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2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사후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워커 사령관의 애석한 사고사는 불법 남침한 북한을 좀 더 강하게 응징할 수 있는 장군을 잃었다는 것과 우리 병사의 부주의한 과실로 전쟁의 영웅이 순직하였다는 사실에 더욱 죄송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더하다. 아들 샘 워커는 1977년 미군 역사상 최연소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미 육군사상 처음으로 부자가 4성 장군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군인 전사자 기준 세계 7대 전쟁으로 간주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장성 아들들은 모두 142명인데 그 중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리지웨이 장군의 뒤를 이은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벤플리트 2세는 전투기 조종사(중위)로 출격하여 실종되었고, 제3대 UN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육군대위는 세 번이나 부상당하여 제대한 후 사망한 가슴 아픈 기록이 있다.

월턴 워커 사령관의 기념비를 찾아서

워커 장군은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하게 알려진 이름이다.

1963년 주한 미군 휴양지로 지금의 광진구에 건립된 위락시설이 워커장군의 이름을 따 워커힐로 명명되었고, 대구의 캠프 워커나 직접적인 관계는 불명확하나 군인들의 군화를 워커화로 불리는 등 우리가 많이 접하는 이름이 되었다.

워커힐 호텔 입구 작은 동산에 1987년 10월5일 한미친선 군민협의회가 건립한 워커장군 기념비가 30여년의 풍상을 견디며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한미동맹친선회가 용산 미군기지의 구 미8군사령부 영내에 건립한 워커장군 동상은 주한미군의 평택시대의 개막에 즈음하여 2017년 4월25일 평택 캠프험프리스로 이전되었다. 또한 워커장군 추모 기념사업회 김리진 회장은 40년간 사비를 드려 워커장군 전사지를 찾아 표지석을 설치하고 매년 추모제를 드리고 있다.

워커 장군은 2012년 12월 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6·25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 6월에는 부산의 유엔 평화 기념관 주관으로 워커장군 특별 인물전이 1년 동안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닌 명예로운 전쟁으로 회자되는 요즘 이 시기에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핵무장으로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북한의 헛된 망상을 버리게 해야 할 것이다.

워커힐 호텔에 위치한 워커장군 기념비

험프리 기지로 이전한 워커장군 동상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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