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역사 갈등의 고양과 한미동맹에 대한 함의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에서는 한일관계와 한미동맹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 냉전시대에는 소련, 중국, 북한이라는 사회주의권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안보동맹으로서의 남방 삼각관계로서의 한미일 협력이 강조되어 한국과 미국 일본을 하나로 엮어서 생각하는 방식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북방으로부터의 연합된 공통의 위협이 약화된 사회주의권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한미일의 협력 필요성은 예전에 비해 약화된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안보 면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희박해져갔다. 또한,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민주화되면서 일본과 점차 대등한 관계를 가지게 됨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동등한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한일이 일체화된 그룹에 속한다는 의식은 약화되었다. 양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동질성이 깊어지면서 오히려 한국과 일본이 같은 진영에 속하고 협력적 기운이 고양되는 것이 당연시될 줄로 알았지만, 한일 양국관계는 그다지 순탄하지 않은 발전 경로를 밟아왔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반부터 한일 양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적인 역사 수정주의의 움직임이 가속화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억압되었던 진보적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표면에 등장하였고, 이들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완전하게 청산되어 있지 않았던 미완의 과제들을 정면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충격적인 경험의 고백이 있은 직후부터 위안부 문제는 정치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한국이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상대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한국에서 일본에 대해 숨겨진 이슈들을 정면으로 제기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일본이 식민지 시대의 ‘가혹한 가해자’였음을 상기시킨 것이었으며, 일본에서는 일본사회당이나 자민당 내의 비둘기파들을 중심으로 한 리버럴한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설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1993년 고노담화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은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냉전 후 한일 양국의 ‘역사화해’를 통해 새로운 동아시아의 협력 분위기를 고양하려던 지역협력의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사회에서도 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한 반동적 역사관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93년 자민당 비둘기파에 의한 역사 반성과 사죄에 제동을 걸면서 자긍심을 가진 역사관, 사죄와 반성보다는 일본의 자존심을 높이는 ‘국민의 역사’ 재구성 움직임이 가속화된 것이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였다. 현재 아베정권의 지지부대의 모태가 되는 우익세력 ‘일본회의’가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의 민족주의적 세력의 조직화는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흐름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인 동시에, 한일 양국 간의 ‘자극과 반응’의 흐름 속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는 한일관계가 미국의 조정이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길항관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사태의 전개였다. 사실상 미국도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개입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국의 식민지 시대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처리에 임하지 않은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평화헌법 제정 등을 통해 ‘징벌적 평화(punitive peace)’를 요구하였다는 측면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두려워한 측면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역사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일의 협력적 움직임이 지속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 첫째, 일본 내에 전전의 경험을 공유하고 식민지와 전쟁에 대해 회한의 심정을 가진 진보적이거나 리버럴한 정치세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유럽에서의 지역통합의 전개를 보면서 동아시아에서도 다자간 협력의 제도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정치지도자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동아시아 협력 구상’이라든가 ‘한중일 협력’의 기운이 고양되면서 한일은 지역의 일원으로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셋째, 1989년부터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한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미사일 개발은 한일 양국으로 하여금 소련과 중국에 대신하는 ‘새로운 위협요소’로 자리 잡았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 한일이 공동 대처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의 재발을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한일 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의 하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초강국인 미국의 일극체제(Unipolar system)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인 존재감이나 한미동맹, 미일동맹의 유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2001년 9.11사태의 발발로 인해 세계가 테러집단에 의한 대량살상무기의 획득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상당 기간 미국은 자국에 도전하는 잠재적 위협에 대한 대처를 뒤로 하고 북한, 이란, 이라크 등 ‘악의 축’의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이 연계하여 미국과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이같은 움직임에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면서 점차적으로 미일동맹을 글로벌화 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반면 중국의 부상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중국의 성장을 과실을 공유하려는 움직임도 동시에 가속화되어 한국은 중국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통상무역을 통해 단기적이 이익을 많이 축적해 나갔다.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보면,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자연스런 공동 대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피해자로서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한중 양국의 공통성 때문이었으며, 중국이 아직은 개발도상국으로서 지역 및 세계질서를 교란하지 않는다는 온화한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수행하는 데 대해, 일본은 국제적인 지원을 통해 국제안보와 일본의 국가안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점차 정착되어 갔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능력이 향상되면서 한국은 북한문제의 처리에 골머리를 썩여야했다. 진보정권하에서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화해협력정책’이, 보수정권하에서는 ‘압박과 제재’ 정책이 번갈아 시행되었지만, 북한의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싶다는 심정에서는 공통된 접근법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대북 견제와 억지전략으로서의 기본 성격에 의문을 가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미국과의 동맹이 한국과 일본의 협력의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다.

2010년을 전후 하에 한일 간의 갈등의 역학은 변화의 조짐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민주당 정권이 탄생한 이후 하토야마 정권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공동체’라는 유화적 동아시아 정책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9월 이른바 ‘센카쿠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점차 중국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급선회에 나섰다. 2012년 정권을 다시 잡은 아베는 중국에 대한 경계감을 숨기지 않고 내세우면서, 중국을 포위하고 해양진출을 억제하려는 미-일-호-인도 4개국에 의한 ‘다이아몬드 안보구상’을 내놓았고, 나중에 이 개념은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재 명명되면서 일본의 외교안보전략의 중추적인 요소를 형성하게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미국도 이 전략에 동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견제전략은 더욱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외교안보전략의 요체가 바로 인접국인 한반도의 한국과 북한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질서의 도전자인 중국으로 이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부상에 정면 대응하는 글로벌 차원의 파트너로서 점점 협력의 날실을 촘촘하게 짜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북한은 김정일 말기와 김정은 초기에 핵과 미사일 능력을 급격하게 발전시켜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동아시아 지역, 나아가 하와이와 괌을 타격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 데 이어, 2016년 즈음이 되면 미국 본토를 겨냥할 수 있는 미사일 타격능력의 개발에까지 나섰다. 이에 대응하여 한국은 북한을 최대 압박을 통해 공세적 움직임을 제어하려는 욕구와 더불어, 중국 등 주변국가와의 협력을 통하여 북한의 불안정성을 강화함으로써 통일을 촉진하겠다는 구상인 ‘통일대박론’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도움을 바란 점에서 박근혜정권은 새로운 대북접근법을 시도한 것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움직임은 일본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정도의 불신을 자아내게 했다. 첫째는, 중국군 창설 70주년에 북경 천안문 망루에 푸틴 및 시진핑과 함께 서게 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이 ‘탈일본’하여 중국에 다가서고 있다는 깊은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둘째, 한국과 중국이 피해자의식이 공유를 기초로 하여 일본에 대한 역사문제 공략을 함께 시도함으로써 일본의 우익세력의 발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일본 언론에서는 ‘중한’이라는 단어를 활용함으로써 중국과 한국이 전략적으로 한 바구니에 있으며, 이들 두 나라가 역사문제를 내세워 일본을 괴롭힌다는 인상을 확산시켜나갔다. 당시 오바마정권 하에서의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접근법을 통해 북한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접근법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안부 합의’를 종용하는 한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통해 북한의 위협에 공동 대처할 것을 주문하였다.

문재인 정권에 들어 한국은 일본을 향해 두 가지의 도전을 설정하였다. 하나는 ‘위안부 합의의 형해화’ 및 강제징용피해자들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였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1965년 청구권조약에 의해 징용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일본과의 정면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한에 대한 전향적인 관여정책’이었다. 북핵 능력의 고도화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에서의 또 다른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신한반도 평화구상을 내놓으면서 북핵문제에 대한 강한 압박과 제재를 선호하는 일본과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문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징용문제가 완결되었다는 일본이 한국 정부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거듭 요구하고 협의와 중재를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무반응, 무대책, 무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한국의 대응에 대한 불만감으로 표시로 사실상 경제보복에 해당하는 ‘수출규제 조치’와 화이트리스트 국가로부터의 배제‘를 선언하였다. 특히 전자는 수출관리의 불비를 이유로 하였으나, 후자와 관련해서는 ’안전보장상의 이유‘를 내걸었던 관계로 한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치 한국이 북한과의 연루 속에 비우호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한국의 기간산업에 대한 재량적 자의적 규제조치를 취하고, 한국만을 쏙 빼내어 비우호국 취급을 함으로써, 외교 갈등은 본격적으로 경제 분쟁으로 비화하였다, 한국은 이에 대항하여 민간차원에서는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일본 여행 자제운동을 벌이는 한편, 정부차원에서는 일본에 의존하는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동시에 안전보장을 이유로 했다는 점을 틀어 안보협력의 상징이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연장을 사실상 중단하는 결정을 8월 22일에 내림으로써 경제 분쟁을 안보협력의 거부라는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한일 간의 고질적인 역사분쟁은 언제고 미국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역사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개입을 늘 회피해왔다. 자국도 역사의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이전 행정부였다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설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겠지만, 현재의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통상과 무역을 ‘무기화’하는 전략을 상시적으로 구사하는 관계도 있고 해서 굳이 한일 간의 경제 분쟁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 중단을 선언하고 나자 ‘우려를 넘어 실망하였다’는 논평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있다. 이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이 상존하는 상태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공동 대처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조치들에 대한 대항조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국이 중국의 공세적 대외정책에 대응하여 한미일 협력 체제를 공고화하려는 상징적 의미도 가진 것이어서 다지 한일관계의 유동화에 그치지 않고 한미관계의 본질적 수정 내기 미국의 권위와 설득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이 지소미아의 연장 중단을 일본에 통보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지소미아의 자동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소미아는 11월 23일까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일본과의 협의 여하에 따라서는 막판에라도 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다. 한일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관리 가능한 관계 재수립을 위해서는 한국이 11월 23일 이전에 이를 번복할 수 있는 정책적 재량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이에 상응하는 우호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한국을 다시 화이트리스트에 복귀시켜 우호국으로 대우한다는 외교적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일 양국이 한걸음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고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한일 갈등은 서로가 예상하지 못한 양상으로 걷잡을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한일 간의 장기적인 갈등이 자국의 이해에 반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대화의 촉진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일 간의 갈등은 결국 양자에게는 손해를 가져올 뿐이고, 북한에게는 직접적인 수혜를 안겨줄 뿐이며 중국이 어부지리를 얻게 한다는 점에서 하수중의 하수의 결정이다. 양국의 지도자의 냉정하고 현명한 사태의 관리과 관계 회복이 더욱 중요해 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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