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능선 전투 전적비를 찾아서

최상진
수필가 / 본 협회 편집위원

휴전선 아래 우리 마을 양구

내가 사는 마을은/대안산 아래 작은 마을/저 너머 북녘하늘 바라보며/

소리쳐 부르면

이산가족 달려 나와/손짓 할 것 같은데/아무리 불러 봐도/대답이 없어요.

가칠봉 정상에 올라/산 아래 북녘 땅 바라보며/소리쳐 부르면

북한 친구 달려 나와/뛰어놀 것 같은데/아무리 불러 봐도/메아리만 대답해요. (중략)

 

1977년 6.25전쟁 47주년을 맞아 경찰청이 주관한 제 1회 전국 학생 백일장 아래 우리 마을”이란 작품이다. 양구의 어린 소녀의 시에서 우리민족의 참담하고 불행한 전쟁의 양상을 떠 올리고 인류 역사상 어디서도 전례가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성과 그 결과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 바닥에는 동판으로 “You want peace, remember war!!”, 즉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문구가 새삼 가슴깊이 와 닿는다.

이번에 답사한 양구 지역은 우리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6.25전쟁 시 군사 요충지로 격전의 현장이었다. 6.25전쟁이 만 1년을 경과한 시점(1951년 7월)에서 펼쳐진 양구지역 전투는 전쟁 당사국과 지원 강대국들의 지루한 협상과 치열한 고지전의 공방속에서 피아 장병들의 막대한 희생과국토의 파괴 등 목적과 결과에 비해 과정상 너무나 큰 희생을 낳았고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던 전투이었다. 이 땅에 그러한 전쟁의 참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68년전 이곳 양구에서 있었던 치열했던 전투를 회고해 본다.

1951년 양구 전선

전쟁의 피로감은 고조되고

1951년 4월 지평리 전투를 기점으로 6.25 한국전쟁은 양상은 전면전에서 휴전을 염두에 둔 국지전, 고지전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양구와 철원지역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직결된 곳으로 1953년 7월 27일 협상이 종료 될 때까지 쌍방이 협상 주도권과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행해진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쟁 2년차인 1951년 6월의 전황은 피아간 극심한 피해로 전쟁의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각자의 정치상황에 따른 대안, 즉 휴전에 관한 논의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 5차 공세의 실패로 인한 10만의 병력의 손실과 소련이 약속한 60개 사단규모의 전투장비 및 전쟁물자 지원이 지연됨으로 1주일 이상의 전투를 수행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북한은 더 이상의 폭격 목표물이 없을 정로 철저히 파괴되어 김일성 체제 유지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7만 8,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힘에 의한 승리는 힘들다는 결론과 압록강을 넘어 중국과 확전, 궁극적으로 대치하게 될 소련과의 마찰로 야기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중공군의 인해(人海)전술과 미국의 화해(火海)전술은 현대전의 전술로는 너무나 무식하고 비인간적 살상의 형태였다.

억지와 이기적인 지루한 휴전 협상

미국과 중국의 소비적 전투로 힘이 약화되기를 내심 희망한 소련은 공산 3국(소련, 중국, 북한)의 대표 격으로 1951년 6월23일 소련 유엔 대표 말리크가 휴전 제의를 발표하고 1주일 후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정식 제안하고 중국의 팽더화이(彭德懷)와 북한의 김일성에게 수락함으로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은 처음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어 7월 26일에는 의제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후 일차적인 어려움은 양군의 경계선의 책정문제였다. 이미 38도선을 넘어서 진출하고 있던 미국은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공산측은 38도선의 원상회복을 고집함과 동시 한반도로부터 외국군(특히 미군)의 철수를 고수하여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8월 22일에 공산측이 회담의 중단성명을 냄으로써 회담은 정지되었다. 회담은 시작은 순탄해 보였으나 설전(舌戰)이 혈전(血戰)으로 이어지며 2년 간 죽음의 시간이 흘러갔다.

– 19517월 전선(戰線)의 난기류

여전히 전투는 미국과 중국의 주도로 치러지고 있었지만 국군의 경우 군 체제의 정비와 훈련으로 점차 일선 전투부대의 역할이 커졌다. 미군은 여전히 막강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전장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지상전투에서는 기계화 부대의 기동능력을 극대화해 나갔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하자 휴전과 정전을 염두에 둔 전략이 구사되어 무리한 남하, 북진의 완승개념의 전투가 아닌 휴전 또는 전쟁 재발 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 즉 전면전에서 고지전, 산악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전투의 양상이 바뀌면서 공중폭격이나 첨단병기의 운용이 제한적이었고 재래식 무기와 병력이 우선되는 뺏고 빼앗기는 살상의 소모전이 지속되었고 승자도 패자로 가릴 수 없는 혼돈의 시간에서 참전국의 정치적 입장은 어떤 목적이던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든 방향으로 기울어져 미국과 중국은 휴전협상의 조급증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7월 이후의 전투들에서 치열했던 전투상황 속에서 전쟁 영웅담들이 전쟁으로 야기된 비극적인 모습과 처절함이 전적비와 추모비에 새겨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서글픔에 가슴을 여민다.

양구지역 9대 전투

양구 전쟁기념관에는 야외에 9개의 기둥에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양구에서 일어난 전투 양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투명 기간(1951년) 참전 부대
도솔산 전투 6.4–6.20 미 해병 제1사단 외. 국군 해병 1연대
대우산 전투 7.8 -7.31 미 제 2사단. 네델란드 대대. 국군 해병
피의능선 전투 8.18-9.5 미 제10군단. 미 제2사단. 국군 3,5,7,8사단
백석산 전투 8.18-10.28 국군 제7,8사단. 미 제96야전 포병대대
펀치볼 전투 8.31-9.20 미 해병 1사단, 국군 제 1 해병연대
가칠봉 전투 9.4 -10.14 국군 제 5사단
단장의 능선 전투 9.13-10.13 미 제 10군단, 제 2사단. 프랑스/네델란드 대대
949고지 전투 11.17-11.18 국군 제6사단, 제 8사단
X마스 고지 전투 12.25-12.28 국군 제 7사단

당시 양구지역은 6개월 동안 사상최대의 폭격이 가해지고 피해규모도 엄청나 피아간에 사상자가 아군은 전사 2,797명, 부상 외 13,801명, 적군은 전사 25,422명, 포로 2,015명이 발생하였다.

산하(山河)를 붉게 물든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는 중공군 6차 공세(2차 춘계 공세)의 하반기에 해당한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1951년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한 유엔군은 향후 전황을 전쟁 이전상태로 회귀해 휴전으로 종결하고 최종 목표인 통일국가는 유엔 기구를 통해 계속 추구하기로 내부방침을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의 1차 저지선을 임진강-영천-화천저수지-양양으로 설정하고(서부전선에서는 38선에서 3-9km 정도, 동부전선에서는 16km 북쪽의 산과 고지를 연결하는 선) 이를 캔사스 선이라 명명했다. 예상보다 쉽게 캔사스 선을 확보한 유엔군은 캔사스 선의 북방 10-20km 내에 방어선을 설치하여 최종 방어에 주력하게 되었는데 이 선이 유엔군이 주장한 휴전회담 당시의 군사접촉선으로 휴전선의 기초가 되었다.

양구지역 전투의 또 다른 특징은 공산군의 불성실한 회담(전황이 불리한 경우 갖은 핑계로 회담 불참, 중지)태도에 유엔군은 강력한 군사적 압력으로 그들을 회담장으로 불러낸다는 전략이었다. 피의 능선 전투를 비롯한 양구지역 전투는 당시 공산군의 동북부 주요 보급기지인 해안분지(亥安盆地)를 확보와 캔사스선 고수를 위한 전투로 휴전 초기 최대의 격전지로 손꼽히고 있다.

1951년 휴전회담 기간 중 북한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주요 고지대를 요새화하여 미군과 국군에게 큰 난제였다. “피의 능선”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수리봉 983 고지를 중심으로 940, 773 고지는 현재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 이 지역에 배치된 북한군 제 12 보병사단과 제 27 보병사단은 북쪽의 문등리 계곡과 사태리 계곡 일대, 아군의 후방지역인 인제 일대까지 관측하며 주저항선과 주보급로는 물론 화력지원과 병력 이동상황 등 모든 군사행동을 제어하고 있었다.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7일 아침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8월 25일 10여 일에 달하는 공격으로 능선을 점령했으나 다음날에 탈취당하고 말았다. 이때 한국군 제36연대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 뒤 미군은 제24사단의 4개 포병대대, 중형포 2개 대대, 1개의 105㎜ 대대 , 2개의 중박격포대대, 2개의 연대 전차중대, 그리고 중형 전차대대 1개 중대 등을 투입하여 피의 능선에 공격을 감행했다. 8월 27일, 940고지에 있던 미 제9연대 제2대대가 983고지를 공격하였고, 28일에는 제3대대가 동쪽에서 긴 능선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8월 30일에는 제1대대 및 제2대대가 북쪽 940고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능선 정상의 수백 미터 전방까지 진출했다가 적의 사격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후 9월 3일까지 제1대대는 포병 및 공중의 지원을 받으며 이 능선을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결국 견고히 구축된 적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러, 3주일 동안 지속된 한·미 양군의 공격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투 결과 북한군 제6 보병사단 13 보병연대, 제12 보병사단, 제27 보병사단은 1,250명이 사살되는 등 총 15,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해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한국군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와 미 제2 보병사단 역시 전사 326명, 부상 2,032명에 실종 414명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한·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하여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하였다. 하루 평균 3만-5만 여발, 총 42만 여발의 포탄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2천 여발의 대인지뢰가 터지는 가운데 수많은 장병들이 발목이 절단되는 부상자를 감수해가며 끝내 고지를 탈취하는 모습을 미국 기자가 ‘Bloody Ridge Line’이라는 제목으로 격전 상황을 보도하면서 ‘피의 능선’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국군 제21 보병사단 “백두산 부대”가 수비하고 있으며 당시 격전지에는 1980년 11월11일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기타 양구지역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솔산 전투

도솔산(해발 1,148)은 해안분지를 감제관측 할 수 있는 요충지로 미 8군으로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 제 5해병연대와 교대해 도솔산 탈환을 명령 받은 국군 제 1해병연대는 악전고투 끝에 야간기습으로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국군 해병대 5대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도솔산 전투로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의 휘호를 하사하고 해병대를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펀치볼 전투

“펀치볼을 공격해 공산군의 요충지를 탈취하고 아군의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확보 한다”는 전략은 휴전회담 이전에 세운 아군의 작전개념 이었다. 와이오밍선의 구축과 공산 측을 적극적으로 회담에 임하게 할 목적으로 행해진 이 작전에서 미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 제 1연대는 탈환 고지 명을 적개심 고취 차원에서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로 명명하여 북한군 제 3군단 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펀치 볼을 확보했다.

가칠봉 전투

펀치 볼 전투에서 전세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작전지역의 중앙인 가칠봉 일대에 국군 제 5사단을 투입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차후 작전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1,122고지(가칠봉 전방 500m)를 점령하기 위해 40일 동안 고지쟁탈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국군은 여섯 번의 쟁탈전을 거치며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하며 펀치볼 지역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

남으로 처져있던 주저항선을 정리하기 위하여 양구 북방의 931고지(일명 단장의 능선)를 1개월에 걸친 공격 끝에 점령한 전투이다. 미 2사단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단장의 능선을 공격했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잔여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전차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 부대로 적의 후방을 강타하면서 이 능선을 확보하였다.

양구지역 전적 비 방문을 마치며

아직 무언가 어색한 기운이 돌지만 오늘의 양구는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곳이다. 펀치 볼이 상표가 되어 펀치 볼 시래기가 특산품으로 팔리고 70년 전 피에 젖은 전쟁 상처가 상품이 되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미 제 2 보병사단 과 국군 제 5사단 36연대가 주축이 되어 피로서 지킨 현장에서 산화한 국군용사와 혈맹으로 이 나라를 지켜준 미군 장병들에게 감사의 묵념을 드린다. 굳건한 한미동맹만이 이 나라를 지켜왔고 또 지켜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깊어지는 여행이었다. 동행해 주신 협회 채연석 사무국장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한미우호협회가 한미동맹의 영원한 기축이 되기를 기원한다.

양구지구 9대 전투기념물
(양구 전쟁기념관)

도솔산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
(양구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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