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미국을 선택했는가?

채 연 석
본 협회 사무국장

1. 서 언: 한국정부의 일본과 GSOMIA 중단 선언
                –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의 붕괴 위기-

2019년 8월 22일,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미동맹과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

지소미아는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유일한 군사협정으로 2016년 11월에 북한의 병력 이동과 사회 동향, 북 핵·미사일 관련 정보 등을 일본과 공유하기 위해 체결했다. 한국은 탈북자나 북·중 접경 지역의 인적 네트워크,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수집한 대북 정보를 일본과 공유하고 있고, 일본은 주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실험이나 핵에 관한 기술 제원 분석 자료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특히 일본은 한국이 보유하지 않은 정보수집 위성 5기를 비롯하여, 이지스함 6척, 지상레이더 4기, 조기경보기 17대, P-3와 P-1 등 해상초계기 110여 대 등의 다양한 정보자산을 통해 수집한 북한 핵·미사일 관련 정보를 한국과 공유하기로 하여 북한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소미아는 한일 양국 간의 안보협력은 물론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도 매우 긴요하게 작용한다. 지소미아는 단순히 한-일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한미일 공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한국이 일본과의 갈등 때문에 지소미아를 파기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과 함께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지소미아 중단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동맹국 사이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깊은 우려와 실망’이라는 표현이 연일 쏟아져 나왔고, 일본정부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중요한 국가안보협정을 우리 정부가 일본정부의 전략물자 수출금지 조치에 대한 보복적 차원에서 중단시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매우 유감스러운 조치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북한의 핵과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과의 극한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고 급기야는 북핵 미사일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중요한 지소미아 안보협정마저 중단시킴으로써 우방국 일본을 적대국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동맹국 미국이 등을 돌림으로써 우리 안보불안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이번 지소미아 중단 선택이 ‘진정 국익에 부합되는 올바른 선택이었던가’ 라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의 선택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과 지정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일본은 국가가 중요한 기로(위기상황)에 서 있을 때 그들 지도자들은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강대부국으로 성장시켰는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일본의 전략적 선택
     – 명치유신과 부국강병의 길, 대동아 공영권의 꿈

일본은 근세기에 세계의 열강들과 나란히 손을 잡고 아시아 제국을 휩쓸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초강대국 미국과의 패권을 겨루며 그들이 말하는 소위 대일본 제국을 달성한 바 있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 패망 후 짧은 기간 내에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세계 제 3의 경제대국과 군사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여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저력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본이 그렇게 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들 지도자들은 과연 어떠한 국내외 정책과 전략을 선택하였는가?

임진왜란 이후 출범한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260여 년간 쇄국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열강들의 서세동점의 세력에 시달리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끄는 4척의 군함의 위용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게 된다. 그리고 1868년 왕정복고와 함께 명치(明治; 메이지)유신을 단행한다. 명치유신은 쇠약해진 일본이 일거에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명치유신과 동시에 일본은 군사개혁을 핵심으로 국정전반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명치 군대는 처음에는 국내안정을 위주로 하는 치안유지군의 성격을 띠었으나 중국 및 조선 등 아시아에서의 서양열강이 각축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자국안보의 눈을 뜨고 ‘정한론’의 대두와 함께 점차 외정군(外征軍)의 성격으로 변모하면서 해외점령정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880년대 이러한 위기의 안보정세 하에서 근대일본의 군사와 정치토대를 마련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총리는 자신의 ‘외교정략론’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의 논리에 의해 조선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청국과 러시아, 영국등과의 각축전에서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굴복시켰으며,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을 우방으로 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일전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장악하여 국가 이익선의 개념을 남만주까지 대폭 확장시키는 외교정책을 선택한다. 한편, 러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당시의 글로벌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하는 독일에 대응하기 위해 3차에 걸쳐 영일동맹을 체결하고(1902,1905,1911), 불일협상(1907), 러일협상(1907)을 맺어 4국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등 우방국을 많이 확보하여 자국안보를 유지해 나가는 한편, 해양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제해권을 획득하여 해군력의 우위를 점하고 급기야는 태평양에서의 미국과의 경쟁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안보환경이 급변하면서 소련의 위협이 점증되자 동아연맹의 주창자이자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역인 이시하라 간지 중장은 소련과 미국, 영국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한 총합적인 국가전략과 국방정책(국방국책대강, 1936)을 추진하며 대륙침략을 감행하게 된다.

일본은 중일전쟁이후에도 열강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펼쳐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 소련의 중일전쟁 개입의 저지를 위해 독‧일 군사협정 구상,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일‧이태리 정치협상을 구상하고 중일전쟁 이후의 차기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이태리, 독일과의 방공협정을 강화한다. 차후 일본은 국익을 위해 일본의 국방자급권 구축의 가능성을 모색하여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 남방자원 탈취를 위해 필연적으로 미국과의 일전을 구상하며 미국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 이태리와 3국동맹, 소련과의 중립조약 등을 맺고 태평양 전쟁을 감행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비록 미국에 굴복하여 패전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의 자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 다각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3. 일본은 왜 미국을 선택했는가?
     – 요시다 정부의 결단과 일본 외교의 기축 對美외교-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여 철저히 파괴되었던 일본이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짧은 기간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일본이 미국을 선택했고 미일동맹을 국가전략의 제일로 삼고 일관성 있게 유지 강화해 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미일동맹에 대한 출발은 패전 직후 패망한 일본을 부흥시킨 요시다(吉田茂) 수상의 독트린, 즉 ‘요시다 독트린’에서 출발한다. 이는 연합군 총사령부 점령 아래 일본 정권의 수장이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주장한 일본의 외교노선이다. 요시다 독트린이 가지는 성격은 “ 1)냉전 상황에서 스스로를 서방세계,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제휴를 외교의 기조로 하고, 2)안전보장 면에 있어서는 미국에 의존해서 스스로의 방위력은 최소한도로 하고 경제외교를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의 안보 문제는 오직 미국에 의존하는 한편, 군사적 예산은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출하고 일본의 경제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요시다가 수상이던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해 미국은 동맹국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미국은 1950년 6월, 강화 임무를 가지고 방일한 존 포스트 덜레스를 통한 일본과의 회담에서 일본을 재무장하여 군사적 지원을 받고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요시다는 덜레스의 요구를 거절하고, 맥아더의 양측의 의견에 대한 타협안을 수용함으로써 재군비를 회피하였다. 이후 일본은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발전에 국가역량을 집중 할 수 있었다.

한편 전후 일본의 위정자들은 국익에 바탕을 둔 외교정책을 결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철저히 자국의 헌법(평화헌법)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일관된 정책을 잘 추구하고 있다. 일국의 헌법은 국가통치의 가장 근간이 되는 법으로 국가이익, 즉 국가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지켜야 할 법칙 또는 행동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미국의 극동정책과 대일점령정책의 일환으로 제정 되었다. 따라서 전후 일본의 외교정책은 미국의 시대상황적 안보정세에 따른 극동 정책의 변화와 평화헌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미소 양극체제를 중심으로 한 냉전기를 거쳐 소련 및 동구권이 붕괴된 냉전 종언에 이르기까지 냉전초기에는 한반도 전쟁으로 시작한 재군비의 출발로부터 냉전의 종료 전까지 소련의 ‘해양요새전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전략의 일환인 ‘해양전략’의 전초기지 역할로서, 냉전 후에는 새로운 전략 환경의 변화에 따른 대처로서 일본의 방위정책과 방위전략이 그때그때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전후(戰後) 오직 자국의 국익을 위해 미국을 선택했고, 70여 년간을 일관되게 대미외교를 국가외교의 기축(基軸)으로 하여 적극적인 대미외교를 전개하면서 미일동맹 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4. 미일동맹과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의 함의

1945년 2차 대전이 종료함에 따라 반세기 이상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놓여있었던 한일 양국은 거의 유사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세계는 미소 양대 강국이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냉전체제로 진입하였고 그리고 양국은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을 동맹국으로 하는 매우 훌륭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미일안보체제가 출발하였고, 1960년 1월 19일 양국 간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신 조약에 의거하여 미일 안보동맹체제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미일동맹체제는 냉전시대 일본의 최대 안보위협인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안보를 지켜내고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1등 공신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동맹은 휴전 직후 1953년에 10월 1일, 미 워싱톤에서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조인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 34호로 정식으로 발효된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미동맹체제가 출발하게 되었으며, 한미동맹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생존과 번영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이처럼 한일양국은 미국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 질서에 편입하게 되면서 한국은 한‧미동맹체제를, 일본은 미일동맹 체제를 각각 구축하게 되었고,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양국은 자연스럽게 우호협력체제를 만들어 감으로써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가 형성되었다.

미일동맹체제는 한미동맹과 우리안보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순기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가 세계지역의 안전보장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즉 미일안보동맹에 의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주일미군은 한국은 물론 세계지역의 분쟁발생지역에 신속히 투입할 수 있도록 일본의 군사전략적 요충지역(오키나와, 요코스카, 사세보 등)에 3해병기동군(III MEF) 전력을 비롯하여 해, 공군 최첨단 전력들이 배치되어 운용된다. 또한 주일미군사령부가 위치하는 요코다(橫田)를 비롯하여 요코스카, 사세보, 후텐마, 가데나 등에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가 있어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태세도 갖추고 있다. 유엔사후방기지회원국(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 9개국)들은 자국의 선박 및 항공기를 이곳에 파견할 수 있다. 유사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주일미군의 존재는 한반도 전쟁의 위협을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일본에 주둔하는 미 7함대의 활동은 아태지역 해상로의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평시 역내 국가들의 안전한 해상무역활동의 기반을 조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5. 결 언
     – 국익을 위한 한국의 전략적 선택-한미동맹 강화와 지소미아 중단 재고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중차대한 한미일 삼각한보협력체제가 우리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붕괴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는 곧 많은 애국 지식인들에게는 국가의 존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위정자들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국익을 위해서는 신중한 판단과 결정을 했다. 한때 우리의 위정자들도 어려운 시기에 신중한 판단과 올바른 결정을 한 바 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튼튼한 안보를 유지하는 가운데 국가의 위상과 국력이 신장하였다. 바로 슈퍼 강대국 미국을 우리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선택하고 동맹유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강하고 믿음직한 동맹국과 우방국을 스스로 저버리고 신 애치슨라인을 스스로 그어가며, 한미동맹을 깨뜨려가고 있지 않은가? 미국과 일본은 과거에도 중요했고 현재도 변함없이 우리 안보와 번영, 생존에 매우 중요한 우방국들이다.

국가안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활적(critical)인 국익이다. 우리는 오늘의 어려운 안보위기상황 하에서 보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 명치유신 이후 100년간 근세 일본을 세계 최고의 강대부국으로 성장시켰고, 2차 대전 패전이후 불구대천의 미국을 가장 친한 우방으로 선택하여 대미외교를 국가전략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냉전이후 주적 소련이 사라진 후에도 자국의 헌법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국익을 위해 더욱 미일동맹을 강화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보장해 나가는 일본의 선택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설사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여 비핵화를 달성하고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구축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중국,러시아 등의 안보위협에 계속 대처하고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공존을 위해 한미동맹을 계속 유지하고 강화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지소미아 중단결정은 사활적인 국익차원에서 반드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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