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해체, 평화공존전략이 가져다 줄 위험성

오종택
전 한국대학생포럼 회장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같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중략)…….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秋日抒情(1940.7)>

 

많은 사람들이 한미동맹이 해체를 앞두고 있다고 바라본다. 그 배경에 쉽게 잊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이다. 바로 전체주의 국가들의 동맹을 잊고 나의 동맹을 해체하는 모습들이다. 그 대가는 전 세계적인 전란이었다.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은 바로 평화공존전략의 희생양이 된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다루고 있다. 소개하고자 하는 사실은 아래와 같다.

  1. 2차 대전은 나치와 소련 간의 동맹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점(폴란드 침공).
  2. 네빌 체임벌린처럼 동맹을 해체하면서까지 독재국가와의 평화공존을 부르짖는 과정은 본연 독재에 대한 묵인과 방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
  3. 그 대가로 수십만 명의 청춘들이 총탄에 찢기고 더운 피가 길거리에서, 들판에서, 하늘에서 흩뿌려진다는 점.

마찬가지로 한미동맹의 해체는 모두가 느끼는 현상이다. 동맹의 약화를 원하는 쪽이 있고 이를 우려하는 쪽도 분명히 나뉜 갈래가 그 현상이다. 이 나뉜 갈래 끝 양쪽에서는 학식과 덕력을 갖추었다는 어른들이 서로 싸우기 바쁘다. 그리고 청춘들은 무기력하게 그들의 정치와 그들의 토론이 만든 미래에 몸을 내맡긴다. 그렇다면 한미동맹이 오늘날 보여주는 무기력함은 청춘들이 쌍수들어 환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기존 세대보다 불안을 앞서 느끼는 젊은이들은 한미동맹의 약화로 도리어 한반도에 이미 전운이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파시즘의 정의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나치나 소련이나 근본은 같다. 나치들은 스스로를 ‘국가사회주의’라고 설명하였다. 히틀러는 1941년 2월, 대중연설에서 ‘국가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대인이 가진 통념과 다르다. 이들은 동일하게 인간의 자유 본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권력이 통제하고자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들의 정책과 정체성은 자연히 경제침체와 공공부채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절대 자유시장경제보다 윤리적으로나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없다. 결국 분배실패와 국가실패에서 온 불만과 불안은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 국수주의와 가공된 외부의 적을 향한 대외침략으로 말이다. 그것은 건국하자마자 침략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나치와 소련의 모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미동맹이 맞대고 있는 현대 중국과 북한의 그 모습과도 같다.

이처럼 나치와 소련이 이러한 배경에서 침략을 위한 적당한 동맹을 맺었던 것처럼 중국과 북한이 적당한 동맹을 맺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자국의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야만이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체제들이다. 그에 따라 침략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서로 좋은 동반자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육지 건너와 바다 건너에 이러한 상반된 체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를 누리고자하면 응당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어야한다. 여론은 스스로를 지키는 힘에 긍정적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오늘의 젊은이들은 청춘을 침식한다고 하는 징병제도도 기꺼이 감수하고 국방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386세대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평화공존전략을 줄기차게 추구한다. 그 결과 북한과 중국 사이의 동맹이 가진 위험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한미동맹 해체를 외치고 있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 안보를 해체한다는 자기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인륜과 평화를 서로 머릿속에 잇지 못하는 도덕적 모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평화구상이 가진 도덕적 모순은 소련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활동한 철학자 아인 랜드(Ayn Rand)가 잘 짚고 있다. 그는 또한 그들의 평화구상이 세계대전 같은 ‘전쟁의 뿌리’임을 지적한다.

“오늘날 평화운동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본질을 들여다보자. 그들은 사랑과 우리 인류의 생존을 고려해보자면서…(중략)…모든 방위력은 국가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킨다면서 버려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은 인류의 이름으로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류(類)의 평화운동들은 독재체제들에 반발하지 않는다. 이 운동의 소속된 사람들의 정치관은 전체주의의 모든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으며, 복지만능의 국가주의에서 사회주의에서 파시즘에서 공산주의까지 아우른다.

이 논리는 그들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무력으로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한 국가의 정부가 자신들의 시민에게 무력으로 억압적인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들이 잘 무장한 전체주의 정부 앞에서는 우리의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무력을 쓰는 그들의 유형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상, 아인 랜드, “전쟁의 뿌리”>

한미동맹의 약화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국가에서 반인륜에 침묵하는 쪽의 목소리가 강해진 것이다. 시민의 인권 사유재산에 대한 약탈과 파괴, 노동교화소와 고문실 등을 자행하는 독재정권들의 문제에 침묵하고 그들과 공존하겠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은 바로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반인륜적인 것들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70년의 약속이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미국의 헌법적 정신이 근거다. 미국은 정부가 절대로 그런 짓을 자행하지 않겠다는 헌법을 만든 유일한 우방이기 때문이다. 약해진 한미동맹을 우려하는 것은 대다수 독재와 더욱 가까워지는 우리 국가의 모습이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철학자 아인 랜드는 이들을 짚었다. 전체주의 정부에게 무력을 쓰는 것을 거부하나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무력을 쓰는 유형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 ‘평화공존’이나 ‘평화운동’의 사상적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것은 “전쟁의 뿌리(The Roots of War)”다.

독재국가에게 평화공존 정책을 제시한 이상 그들 독재국가는 모든 종류의 독재적 지배를 위한 시간을 번다. 그래서 한미동맹 해체를 가져오는 그들의 평화공존전략은 독재국가와 공범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결국엔 그 모순이 전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나 그 추악한 모순의 대가는 젊은 세대가 진다.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으로 말이다.

선배와 어른들이 이런 비극을 막는데 실패한 게 오늘의 현실이다. 청년들은 하나 둘 씩 그런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미동맹의 위기를 청년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 전란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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