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영웅 추모식을 다녀와서

최상진
수필가, 본 협회 편집위원

굳세어라 금순아

지금은 가보지도 못하고 또 언젠가는 가 볼 수 있을 장진호전투의 흔적을 찾아 10월 27일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개최된 제 4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행사에 본회 채연석 사무국장님과 참석의 기회를 얻었다. 숨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를 통해 우리는 전쟁으로 인한 일가친척으로 가슴 아픈 생이별의 애환을 알았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자유를 찾아 살아야겠다는 처절함과, 피난민을 살려야겠다는 미군의 희생적 헌신으로 이룩된 기적의 흥남철수를 알게 되었다. 흥남부두에 산더미 같이 쌓아둔 각종 무기와 전쟁물자를 폭파하는 불기둥으로 마감되는 철수작전의 전편은 2차 세계대전시 스탈리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전사의 2대 동계전투로 지칭되며, 오키나와 전투,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와 더불어 미 해병대 역사상 3대 전투로 손꼽히는 장진호 전투로 한국전쟁 중 미군의 희생이 가장 컸던 치열한 전투였다.

왜 우리는 이러한 행사를 하는가

이 행사는 대한민국 보훈처의 산하단체인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장진호 전투참전 전투영웅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고 다짐하는 의식이다.

A noble sacrifice, Remember in the name of the Republic of Korea
-고귀한 희생,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

초대의 글에서 장진호 전투를 다음과 같이 요약 설명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 해병 제 1사단 1만 5천여 명이 함경남도 개마공원의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에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서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중궁군은 함흥지역 진출이 2주간이나 지연되었고,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포함한 국군 및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미 육군 제7사단 2개 대대와 영국 해병 제41 코만도 부대, 한국 카투사(미 제 2사단 소속) 등이 참가하였으며, 미 육군 제 3사단이 후방방어를 지원하였고 한국 해병대 제5대대도 철수작전 지원을 위해 장진호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세계 2대 동계전투, 미 해병대 3대 전투, 6.25전쟁 3대 전투로 기록되는 장진호 전투에서는 아군 4천500명이 전사하고 7천500명이 부상당했다.”

2016년부터 시작된 이 장진호전투 추모행사에는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 및 가족이 매년 초대되었는데 금년에도 참전 생존영웅 ‘밀턴 메이스 워커(Milton Mayes Walker)’씨 등 6명의 참전용사와 다수의 가족이 참석하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미군 참전사에서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 버지니아주 펜타코에 위치한 미 해병 박물관에 조각된 방한판초를 입고 엄동설한에 퇴각하는 병사들의 동상과 영화 “Retreat Hell”(후퇴! 천만의 말씀!!)에서, 각종 서적에서 이 전투를 강조하고 있다. 1984년 6,000명의 회원으로 결성된 장진호전투의 생존자 기념모임 “Chosin Few”는 지금도 세계 52개 지역에서 생존자와 그 가족들에게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의 역사적 사실들

당시 상황을 요약하면,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후 10월20일 평양을 탈환하고 11월24일에는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한편 미군이 38선을 넘어오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호언을 해오던 중국 공산당은 항미원조(抗美援助)의 기치아래 1950년 10월 4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고,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이름을 바꿔 김일성에게 참전통보를 하였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평양탈환 시점인 10월 19일 부터 압록강을 도강하기 시작하였고 장진호 전투의 주력부대인 중공군 제 9병단은 11월 7일 평북 중강진 대안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장진호 깊숙한 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5개월 후인 11월은 미군 대 중공군의 전투로 전쟁의 성격이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즉 아시아 극동의 일 개 우방, 대한민국의 피침은 소련을 배후로 한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집단과 자유 민주주의의 진영인 미국과 유엔의 전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념과 사상의 확대는 추종집단과 그 집단이 가지는 영토의 확대로 세력을 넓혀 왔다. 이미 밝혀진 일이지만 6.25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기획하고 미국과 정면대결을 망설인 스탈린이 모택동을 대리인으로 하여 시작된 전쟁이다. 당시 중국(중국 공산당)은 북한과의 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로 표현할 정도의 이념공유 동지자로서 침공의 일원이 되었다. 장진호 전투는 관점에 따라 승, 패를 해석할 수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여러 가지의 기록과 많은 반성의 여지를 남긴 전투였다.

첫째, 역사상 미국과 중국이 격돌한 최초의 전쟁

미국이나 중국 모두 자국의 이득이 없이 동맹의 명분으로 참전하였고 특히 중국의 경우 국공내전의 마지막 수순에 국력을 쏟아야 하는 상태로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과는 국력이나 군사력 모두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둘째, 세계 최강의 미군이 포위섬멸 위기에 빠지다

미국은 자만했다. 1950년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자고 장병들을 격려했고 또 가능성이 있는 진격을 감행했다. 자만은 상대를 경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중공군의 참전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고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국군 7사단 7연대가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서 통일의 염원으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을 때 중공군은 이미 장림산맥 일대에 매복해 있었고 그 규모도 유엔군이 추산한 3만 5천명의 열 배를 능가하는 숫자였다. 11월 말 서부전선 군우리에서 미 제 2사단은 사단의 상징인 인디안 태형을 방불케 하는 참혹한 공격을 당해 괴멸의 상태가 되었고 미 해병 제 1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를 점령하고 서부전선의 미 8군과 연계한다는 전략으로 개마고원 장진호에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망을 구축하고 있는 미군이 70년 전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허술한 첩보, 정보망을 운영했을까? 후세 전쟁사가 들은 당시 상황을 적의 정교한 포위섬멸작전에 걸려던 전후무후 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셋째,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2대 동계전투, 교훈과 실전의 차이

우리는 어려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이 함경남도 청천강 유역의 개마고원 일대 중강진이라고 배웠다. 이곳이 바로 그 곳이다. 10월 말이면 눈이 내리고 11월 평균 기온은 영하 12도, 최저기온은 영하 30도, 시속 60km의 강풍이 불면 체감온도는 영하 35-40도까지 내려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기상조건이 된다. 이 조건은 적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늘의 형벌이었다. 윤활유와 기름으로 운영되는 모든 무기체계는 얼어서 무기력해 졌고 작동이 되어도 정밀도가 떨어졌다. 동상과 동사자가 속출했고 총상으로 전사한 병력보다 동사자가 더 많았다는 추산과 중공군이 미군과 대등한 기동력을 가졌다면 미군은 몰살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가 겪은 동계전투의 교훈은 적용되지 않았고 경험과 훈련으로 준비되지 않은 군대는 똑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넷째, 전사에 빛날 성공적인 철수작전

손자병법의 36계는 주위상(走爲上;도망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싸움에 전략상 후퇴도 필요하다. 손자가 정리한 병법이지만 미군은 6.25전쟁 중 36계를 많이 활용하였다. 작전상 후퇴에는 후퇴의 법칙이 적용된다. 적과의 마찰을 최소화하여 병력손실을 최대한 줄이고, 아군의 무기와 전략물자를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퇴각에 필요한 전투만 행하되 민간의 안위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이 패주(敗走)와 전략적 철수와의 차이점이다. 상상을 해보자. 영하 30도 안팎의 혹독한 추위에서 10배의 적군에 포위되어 2만의 병력과 6백만 톤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무탈하게 이동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장진호 후동리, 유동리에서 흥남까지는 약 126km, 주위는 1,000­2,000m의 고산지대로 통로는 고작 우마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기복이 심한 협곡의 오솔길뿐이었다. 11월 27일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됨과 동시 불가의 벽을 파악한 사령부는 곧바로 30일 철수명령이 내린다. 유명한 전투에는 항상 명장의 슬기와 지휘가 존재하듯dl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은 전략물자를 모두 버리고 수송기로 병력을 철수하라는 상부의 권유를 거절하고 부하들과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용기와 결기를 보여 주었다.
“Retreat Hell, We a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

빛나는 흥남 철수 작전

장진강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흥남철수가 2차 세계대전의 덩케르크(Dunkrik) 철수와 비교될 수 없는 사실은 10만명의 민간 피난민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피난민들은 장진호에서부터 살인적 추위와 기아를 이겨가며 자유를 찾아 미군을 쫒아왔다. 군대와 피난민의 운명이 국운과 같이하는 어려운 선택을 맞았다. 전시에는 군의 선택은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작전상 후퇴하는 군대는 재기를 위해 군대만의 대피를 먼저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흥남철수의 빛나는 공적은 자유를 지키는 전쟁, 국민을 지키는 전쟁이 무엇인가를 전 인류에게 보여준 것에 있다. 이 어려운 결정을 내린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소장, 끊임없는 설득으로 피난민 선승을 허락받은 국군 제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사 현봉학 박사, 25만 톤의 군수물자를 바다에 던지고 14,000명의 피난민을 실은 메드리스 빅토리아호 이야기 등등은 전설 같은 기록이지만 그 속에 내재된 전쟁 휴머니즘은 흥남철수를 성공리에 이끈 신의 선물이었다. 이 10만 명의 피난민 속에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고 그들 중 한사람인 김치5가 작년 제3회 추모행사에 초대되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묵념을 드리다

애국가가 연주되고 미국 국가 ‘The Star Sprangled Banner’가 울려 퍼질 때 헨리 J. 쉐이퍼 미 해병대 병장(예)은 의족과 의수로 국가에 대한 경례를 바치면서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까지 6.25 한국전쟁의 미군 참전비를 취재하면서 이토록 감동적인 현장을 접하기는 처음이었다. 장진호 전투 69주년을 맞아 90대의 노병, 전쟁영웅들이 그들의 목숨을 바친 이국땅 대한민국에서 산화한 동료와 수많은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드린다. 국가의 안위가 지금처럼 흔들린 적이 없는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되새기며 은혜를 준 구국의 영웅들에게 진정어린 존경과 감사드린다. 우리는 모르는 사실과 잊혀 진 사실로 우리에게 닥아 올 재앙을 외면하고 눈감아버린다. 안일한 평화공세와 무개념적 대응이 위기를 자초하고 자멸의 함정으로 빠져들게 한다.
66년이 지난 2016년 국가보훈행사로 처음 치러진 이 행사가 만시지탄의 안타까움도 있지만 순수한 애국정신으로 계속되기를 바라며 무겁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행사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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