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초기전투와 미군의 값진 희생

오산 죽미령 초전기념 평화공원 개장을 환영하며

최상진
수필가, 본 협회 편집위원

폴과 요셉

폴(Paul)과 요셉(Joseph)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규수의 미 육군 캠프인 캠프 우드에서 만났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두 사람은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젊음의 의욕이 넘치는 가운데 훈련 중 이었지만 승리자의 일원으로 꿈같은 이국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6일째인 1950년 6월30일 출동명령이 발동되고 7월1일 이다츠께 공항에서 4대의 더글러스 C-54 수송기에 분승한 그들은 스미스 특임부대의 일원으로 8시45분 부산에 도착한 후 오후 8시경 기차로 대전을 거쳐 오산북쪽 죽미령 언덕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나의 친구 Paul에게

– 중략 –

7월5일 오전 8시 피할 수 없는 전장의 불꽃이 타올랐어.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철수명령을 받았고

나는 폴이 있던 언덕으로 단숨에 달려갔지.

포화 속으로 탈출구를 찾으며 언덕을 올랐을 때

참호 속에서 웃고 있는 폴을 발견했지.

말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우리는

마지막 남은 필립모리스 담배 하나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피웠지.

진지에서 적들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참호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산마루 보이는 적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할 때

폴은 적의 포탄에 머리와 가슴을 맞았지

끔찍한 고통 속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전우, 그 죽음을 지키는 나

신이시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운 시련의 고통을 주려 하십니까?

친구의 눈물과 죽어가는 몸부림을 보며 가장 소중한 벗을…

친구의 창백한 얼굴엔 죽음의 가면이 드리워져 있었어.

나의 소중한 벗이 들이쉬는 마지막 숨소리를 들었네.

– 중 략 –

폴, 내 소중한 친구야

너를 위하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신이 나를 데려가는 그 날까지 영원히 너를 위해 기도할 뿐…

7월5일 첫 전투에서 전사한 소중한 친구 폴을 생각하며…

– 1995년 6월 Joseph A. Langone

초전(初戰), 오산 죽미령 전투

적의 진전을 지연하라!

극동사령부(사령관 맥아더)의 작전명령 1호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강화하여 지연전 수행부대를 북쪽으로 전진시키고 현재 서울에서 수원으로 남하하고 있는 적과 대치상황을 유지하면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킬 것.” 이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이 주도한 유엔의 의사결정 과정은 전광석화 같았으나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남하하는 북한군의 파죽지세 공세를 막을 수 없었다. 유엔 안보리는 불과 7일 동안 1차 결의안으로 ‘북한군의 침략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수 할 것’을 요구하였고 2차로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유엔의 이름으로 모든 지원을 제공 한다’는 결의안을 가결시켰지만 이미 서울은 함락되었고 대전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유엔군 파견의 합법적 절차를 거친 유엔은 1950년 7월5일 지연특공대로 미 제 8군 제 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와 제 52야전 포병대대가 주축이 된 540명의 스미스 특임부대를 선정하였다.

‘7월 5일 오전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 모습이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임부대는 오후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27여 명이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 해설 인용)

죽미령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이 첫 격돌한 전투였고 상황은 군사력 10 대 1, T-34 전차포와 105mm 곡사포의 대결로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꽃다운 나이의 조셉도 생전 생각하지도 못한 이국땅 낯선 곳 죽미령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죽미령 전투에서 미군은 죽음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미군이 지킨 6시간 15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위치에 있는 유엔 참전국들도 전쟁에 대한 파괴와 염증은 패전국과 마찬가지였다. 유엔이 결성되었지만 집단안전보장 체제 가동을 위한 합의와 결정, 또 자국 군대 파견의 절차과정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반면 전쟁 당사자인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과의 교전을 원치 않았으며 만약 미국의 참전한다 하더라도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장내려는 속셈인 만큼 전략은 오직하나 속전속결 이었다.

일본의 맥아더 사령관은 6월29일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한 후 지상군파견을 결심하였다. 미군은 죽미령 전투를 통해 상대에게 미군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전쟁의 성격과 상대의 강약을 파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급조된 스미스 특임부대 만으로 대처한 북한과의 초전 죽미령 전투는 패전으로 끝났고 후속부대인 미 제 24사단 제 34연대가 구축한 오산의 후방 평택-안성 저지선마저 북한군의 파죽지세 공세에 밀려 천안 남쪽 공주 지역까지 철수한 미군은 7월8일 금강 유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반면 미군참전으로 남진속도가 늦춰진 북한군은 미 공군의 공습으로 전력은 다소 약화되었지만 대대적 낙동강 공세를 준비하고 미군은 주력부대의 이동과 공군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전선이 다소 안정된 가운데 수도 서울 탈환을 위한 9.15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소중한 시간을 더욱 소중한 목숨으로 지연시킨 죽미령 전투의 6시간 15분은 비록 패전이기는 하나 한국을 구사일생 방어해준 골든타임 이었다.

특임부대장, 스미스 중령(예비역 준장)

그는 1916년 5월 7일 미국 뉴저지 주 렘버트빌에서 출생하고 1939년 뉴욕의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찰스 비 스미스 중령은 2차 대전 시 일본과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한국전쟁의 구원투수로 오산 죽미령 전투에 투입되었다. 1975년 7월과 1987년 7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오산 죽미령 전투 전몰장병 추도식 및 유엔군 초전 기념식에 참석한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그는 인터뷰에서 “저는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북한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세계평화와 한국의 안보유지에 작은 공헌으로 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계속 치러야 할 대가는 ‘힘과 경제 그리고 헌신’이라는 것을 항상 가슴깊이 새겨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2004년 5월 27일 88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대한민국을 지켜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오산 죽미령 초전기념 공원 개장

오산의 북쪽에 자리 잡은 죽미령(竹美嶺)은 글자 그대로 대나무가 아름다운 고개 마루이다. 오산 평택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교통이 발달되어 평시에는 살기 좋고 인심 좋은 곳이기는 하나 환란 시는 항상 아비규환 전화(戰禍)의 현장이었다.

1955년 7월5일 죽미령 전투 5년 후 미 제 24사단 장병들이 참전용사 540명을 기억하는 540개의 돌을 쌓아 (구)유엔군 초전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1982년 맞은편 둔덕에 (신) 초전 기념비를 건립하고 2013년 유엔군 초전 기념관을 정식 개관하였다. 위도 37도의 평택-안성-원주-삼척線은 한국전쟁 시 3차례 전장(戰場), 즉 1950년 7월의 북한군 남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한군 퇴각, 마지막으로 1951년 중공군 1차 춘계공세의 한계 저지선으로 혹독한 전란을 겪었고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오산, 평택, 안성은 육로교통의 대동맥으로 남해와 서해를 통한 외적의 통로였고 격전지였다.

또한 한반도 5천년 역사에서도 수많은 내전과 피난민들로 고통을 겪은 이 지역은 평화에 대한 갈망이 남다르다. 오산은 미군의 초전지역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과 6.25 전쟁의 올바른 이해와 오산 죽미령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 위해 현재 초전기념관 부지에 약 6만3천 평을 추가 매입하고 182억 원을 들여 ‘오산 죽미령 초전기념 공원’을 조성, 11월 초 개장을 앞두고 있다.

6.25 초기전투와 미군의 고귀한 희생

6.25전쟁 발발에서 천안전투에서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될 때 까지 국군에 대한 기록이나 무용담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해방 후 군정종료와 함께 1949년 6월30일 남한 주재 5만의 미 지상군 전투 병력이 철수했다. 군정 당시에도 소련과 북한은 끊임없이 미군철수를 주장해 왔고 비밀리에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고 만 1년 후 6.25전쟁은 발발하였지만 한국군(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라를 지켜줄 군대도 무기도 없었다. 만일 북한군이 T-34 전차부대와 같이 제공권을 압도할 수 있는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10일 전쟁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끔직한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초기전투에 투입된 미군들은 인간방패로 적의 탱크를 저지하였고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

본지(영원한 친구들)에서는 이미 제 232호(오산 스미스부대 추모비를 다녀와서; 본지 편집위원 김봉주/2019년 9월호), 제 242호(개미고지전투 미군장병 전몰추모비 답사; 본회 사무국장 채연석/2018년 12월호) 통해 미군의 초기전투와 참전비 답사기를 게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우리의 맹방으로 한미동맹의 초석이 된 미군 장병들의 헌신을 기린바 있다.

참전비 참배의 목적은 그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함이다. 준비된 군대와 무기로 남침한 70년 전의 북한과 핵으로 무장한 지금의 북한은 힘의 논리로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 상황은 그 때와 유사하게 전개되고 좌편향의 종북세력은 상대의 평화공세에 동조하여 정신적, 군사적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의 슬픈 역사는 다시 기록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국민과 정치인들은 이 땅에 부국강병과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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