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다부동 전투, 왜관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찾아서

최상진
수필가, 본 협회 편집위원

끊어진 왜관 호국의 다리, 무심한 낙동강

천주교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이라 하여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동안 참전비를 취재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UN군 용사들의 희생을 되새기는 묵념의 시간을 갖지 못해 죄송스런 맘 그지없었는데 이번 한미우호협회 “영원한 친구들” 편집위원 워크숍을 통해 황진하 회장, 박휘락 편집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편집위원들이 이 곳 왜관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예방하고 진정어린 감사와 애도의 묵념을 전달 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지난 호에는 한국전쟁에서 북한군과 최초의 전투를 벌인 미 제 24사단의 ‘스미스 특임대’의 활약상과 희생을 소개하였다. 시간적으로 정리하면 오산 미시령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1950년 7월 5일, 마지막 교두보로 일컬어진 다부동 전투의 개시는 8월 1일로 전쟁 발발 37일 만에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전 국토의 90%가 점령되었고, 대한민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풍전등화의 시점에서 당시 8군 사령관인 월턴 H 워커 장군은 최후의 마지노선인 마산-남지-왜관-영천-포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 라인)을 설정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Stand or Die”, 즉 더 이상 한 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한국 수호를 위한 필승의 각오를 심어주었다. 8월 1일 워커는 전군을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시키고 8월 4일 새벽 호국의 다리라고 불리 우는 왜관철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량을 폭파한 후 생사의 배수지진을 설정한다.

결론적으로 8월 1일부터 9월 24일 까지 55일간 치러진 다부동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크고 치열한 전투로 국군과 유엔군 10,000여명, 북한군 17,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되는 민족상잔의 대참사였다. 왜관을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은 1950년 8월 초부터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성공 후 북한군이 퇴각할 때까지 다부동을 지켜봐 왔고 겨레의 아픔과 우리민족의 슬픈 역사를 알고 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라

우리가 한 때 눈물을 머금고 목이 터져라 불렀던 ‘전우여 잘자라’는 유호가 노랫말을 쓰고 박시춘이 작곡한 군가 같은 가요로 낙동강을 피로 물들인 유엔군, 국군, 경찰, 학도병 등 온 국민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퇴각하는 적을 쫒아 낙동강을 넘는 전우를 기리는 한이 맺힌 노래이다. 남조선 해방의 기치아래 70년 전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당사자 북한은 죄의식 없이 핵무기로 재무장하고 호시탐탐 야욕을 불사르고 있는데 무심한 낙동강은 아무런 말이 없이 흘러만 간다. 위령성월을 맞아 끊어진 다리, 실낱 같이 이어 놓은 호국의 다리, 왜관철교를 바라보며 죽음으로 대한민국을 지켜준 구국 영웅들에게 잊지 않겠노라고, 나라를 잘 지키겠노라고 맹세한다.

오산 죽미령에서 왜관 다부동까지 미군 수난의 30

천안전투에서 산화한 미 제 34연대장 Robert R Marin 대령
7월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패배한 미군은 안성, 평택 전투에서도 후퇴를 거듭했다. 미 제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주축인 34연대의 연대장을 마틴(Robert R Matin)대령으로 교체하며 천안수호를 명령했다.
마틴 대령은 2차 세계대전시 서 유럽 전선 제 44사단에서 딘 사령관으로부터 용감성과 과단성을 높이 평가받아 한국전으로 급히 차출된 인물이었다.
당시 북한군의 주력무기인 T-34 전차의 위력은 경무장의 1개 대대도 감당하기 힘든 최신예 무기였고 대응화력을 갖추지 못한 미군의 2.36인치 로켓포와 수류탄으로 상대했다.

크리스틴슨(Jerry C. Christenson)상사의 증언에 의하면 ‘7월 8일 천안 방어선은 무너지고 새벽 6시부터 800발의 대전차 지뢰의 매설에도 불구하고 T-34 전차는 유유히 시내로 돌진해 왔고 전차의 파괴가 선결이라 판단한 마틴 연대장은 크리스틴슨을 탄약수로 본인은 사수가 되어 북한 전차를 향해 로켓포를 정조준 했다. 거의 동시발사 된 포탄은 적의 전차는 깨뜨리지 못한 채 마틴 대령의 육신은 두 동강이 났고 크리스틴슨 상사의 한쪽 눈이 튀어나왔다.’ 2차 대전의 영웅 마틴 대령은 제 34 연대장으로 부임 하루 만에 장열이 산화한 한국전쟁의 첫 번째 지휘관이 되었고 크리스틴슨 상사 또한 후송 치료 후 사망하였다.

포로가 된 미 24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
한국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으로부터 선봉의 임무를 부여받은 군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 24사단은 1950년 7월 2일, 예하 제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임대)를 한반도로 긴급 전개하면서 6.25 한국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사단이었다. 그러나 준비된 막강한 북한군을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는 전승국 일원으로 평화 무드에 젖은 군대의 전투의지가 부족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일본 지형과 도로, 교량의 문제점 등으로 보유하고 있는 경량화 된 탱크와 허약한 대전차 무기는 북한의 소련제 신형 전차를 막을 수 없었다.

사단은 전쟁초기 적의 노도 같은 남침을 지연시키고 아군의 진영을 가다듬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는 평가는 얻었지만 7월 5일 스미스부대의 죽미령 전투에서 참패를 시작으로 낙동강 교두보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불운의 보병사단이 되고 만다. 천안전투에서 연대장을 잃은 34연대를 포함한 24사단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금강 및 대전전투에도 투입이 되었는데 2천명의 인원손실과 대부분의 장비를 잃었다. 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전투에서 운전병과 단 둘이 지프로 적의 탱크를 추격, 박격포로 파괴시키는 용맹한 사단장의 위용을 과시했으나 철수과정에서 실종되어 근 한 달 전북 무주 산속을 헤매다가 8월 25일 포로가 된 최초의 미군 장군이 되었다.

다부동 전투와 절체절명의 대한민국

미국의 오판과 달리 북한군의 준비는 철저했고 신형무기로 무장한 공격력은 막강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 현실로 되었고 전쟁준비가 채 끝나지 않은 미군에게는 중과부족의 헛된 죽음과 치욕스런 불명예가 쌓여갔다. 당시 임시 수도는 대구였다.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과 국회, 미 8군 사령부, 국방부, 그리고 육군본부 등이 모두 대구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부산은 유엔군과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하나 남은 항구로 10%로 축소된 국토의 마지막 보루였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6ㆍ25 징비록’에서 왜 다부동인가를 말한다. ‘8월 초반의 공세에서 북한군은 먼저 두 곳을 노리고 공격을 펼쳤다. 대구와 마산이었다. -중략-

낙동강은 적군의 입장에서 건너기 쉬운 강은 아니었다. 강의 양안(兩岸) 지형이 물을 건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월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곳이 많다. 수심도 평균 1.5m 이상이고, 강폭 또한 400~800m에 달했다. 지키는 사람, 즉 방자(防者)의 입장에서는 천혜의 방어선이라고 봐도 좋았다.’ 50년 8월3일 밀려오는 적 전차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왜관 철교를 폭파한다. 대응무기가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난민의 희생을 감수하는 고육지책이었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km 지점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약간 후방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 북한 인민군 4개 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리게 되는데 양자가 모두 마지막 전투가 되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격전지가 되었다. 55일간 구국의 혈투로 이어진 다부동 전투에서 관찰되는 사항은 첫째 국군이나 유엔군 특히 미군의 경우 향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미군의 능력을 발휘하는 전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둘째 국군도 이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춰 전쟁의 일부를 담당하고 전쟁영웅의 출현이 기대되며 셋째 한국전쟁이 자유와 평화 수호를 위한 한미동맹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고산 전투의 미군 학살과 한국전쟁 최대 융단폭격
자고산은 낙동강을 넘어 현 칠곡군청 인근의 300m 야산이다. 8월 15일 아침 자고산 303고지 전투에서 한국군 지원부대를 기다리던 미1기병사단 미군들은 낙동강을 도하하여 접근해오는 북한군을 한국군으로 오인, 방심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 미군 반격에 포로들을 앞세워 낙동강 건너로 복귀를 시도하려던 북한군은 군화 끈으로 그들의 손을 묶고 303고지 아래로 끌려가 모두 무차별적으로 살해하였는데 이 때 45명의 포로 중 40명이 학살됐다. 이 처참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맨링(당시 18세) 미군병사는 노병이 되어 한국을 찾아 당시 비참했던 현장을 증언했고, 바로 이 자리에 칠곡군과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회장 이현시)가 추모비를 세워 매년 8월17일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칠곡 신문방송 )

자고산 전투에서는 8월 16일 일본 요꼬다(橫田)와 가데나(嘉手納)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 왜관 서북 지역에 400~900㎏형 폭탄 약 900톤을 투하하였다. 이와 같은 융단폭격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폭격으로 낙동강 대안에 있던 북한군 화력 지원부대는 궤멸되고, 탄약 등 각종 보급품과 유선이 모두 절단되어 북한의 전쟁 승리 확신 의지가 상실되었다.

– 328 고지전투, 북한군 서울사단(별칭)을 궤멸시키다
다부동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고지전으로 328고지 전투를 꼽는다. 328고지전은 1950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일원에서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북한군 제3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6월28일 국군 제 15연대는 미 공군의 네이팜탄 지원사격, B-29 융단폭격, 미군 105미리 곡사포 지원사격하에 서울 함락의 주력부대로 서울사단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북한군 제 3사단과 싸워 15회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북한군 3사단을 격퇴시킨다. 양보할 수 없는 핵심거점 확보를 위한 국군의 전투력과 미 공군의 공중폭격이 본격 가동됨을 보여주는 전투였다.

시산혈하(屍山血河), 유학산 전투
고지전의 특징은 공격 포인트에 있다. 당연히 높은 곳에서 내려 보고 공격하는 것이 시야도 넓고 적의 동향을 잘 살필 수 있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유학산 일대는 해발 800m 이상의 분수령 능선이 동서로 4km 이상 뻗어있는 험준한 고지이며 대구의 공격의 적지로 피아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최대의 요충지이다. 8월 13일부터 국군 제 1사단은 북한군 제 15, 13, 1사단과의 치열한 공방 끝에 8월 23일 최종적으로 유학산을 탈환하였다. 아군 2,300명이 전사하고 적군 5,690명이 사살된 다부동 최대의 격전지로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만들었다. 유학산 전투에서 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위기를 맞아 “만약 사단장이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쏘고 너희들이 명령 없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들을 쏘겠다.”며, 임전무퇴 정신으로 사단을 격려하여 국군의 위용을 높였다.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 한미 연합작전 볼링장 전투
마이켈리스 대령(John H. Michaelis)이 지휘하는 미 제27연대는 워커 사령관이 그 용맹을 높이 평가하는 미 8군 예비대로서 소방대라 불릴 정도로 위급한 전선의 파국을 막은 부대이다. 미 제27연대는 18일 M-26 탱크 1개 중대와 포병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다부동을 거쳐 북상하여 448고지와 256고지의 북단을 점령하고 금화, 천평리 일대에서 적과 대치하였다. 8월 18일에서 23일까지 미 제27연대는 적 탱크 14대와 자주포 4대를 파괴하는 등 적 1천여 명을 살상·격퇴한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으로 쌍방 간에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섬광을 발하며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공이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 전투(Bowling Alley)라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1주일 동안 한미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적을 퇴각시켰다.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후일 4성 장군으로 승진,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미 8군사령관을 역임했다.

다부동 전투의 종결과 북진의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다
연이어 가산산성 전투 등으로 북한국의 예봉이 꺾이는가 할 즈음인 9월 4일 동명·기천 일대에서 북한군이 총공세를 펼쳐 유엔군은 또다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9월 6일 국군 제8사단이 방어하던 영천이 점령됨으로써 국군의 작전지역이 동서로 양분되고, ‘대구-안강-포항’으로 연결되는 국군의 유일한 동서 횡단로가 차단되어 대구와 경주가 동시에 위협받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미 인천상륙작전은 준비가 완료된 시점이라 유엔군은 극도로 긴장된 상태로 미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될 것에 대비하여 설치하였던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선)으로의 철수까지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9월 10일 이후 영천에서 북한군을 격퇴한 것을 계기로 낙동강 전선이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고 9월15일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과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반격에 나선다. 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후퇴를 시도하였으나 상당 병력은 남쪽에 남게 되었다. 9월 24일의 전세(戰勢) 전환에 따라서 미 제8군사령부도 부산에서 대구로 다시 자리를 옮기고 북진의 새로운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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