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독자칼럼]차별의 벽을 넘은 에이스 -2차 세계대전 유일의 동양계 ‘에이스’, 프레드 오-윤상용


차별의 벽을 넘은 에이스 -2차 세계대전 유일의 동양계 ‘에이스’, 프레드 오

윤상용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현재까지 인류가 겪은 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은 제2차 세 계대전이다. 사상자의 규모나 참전 국가, 전장의 범위 면에서 2차 세계대전을 넘어서는 전쟁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이 전쟁은 항공기가 전장의 ‘무기’로 본격적인 등장을 한 첫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까지 간단한 정찰이나 소규모 폭격 임무가 항공기의 주요 임무였다면, 2차 세계대전의 항공기는 공중전과 폭격, 정찰뿐 아니라 지상전력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까지 소화하면서 그 역할이 비약적으로 확장됐다. 이런 연유로 2차 세계대전 중 조종사의 역할 역시 커졌으며, 수많은 조종사들이 ‘하늘 위’라는 새롭게 열린 전장 위에서 싸우고 또 산화해갔다. 통계로 볼 때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연합군/추축군을 통틀어 월 3.3%의 조종사가 전사했고, 2년 후에는 격추기록이 낮은 조종사의 절반이 전사했다. 격추기록이 높은 조종사들도 끝까지 살아남은 조종사는 1/4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사율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더 높아져 종전 시기 조종사의 전사율은 1944년 봄에 비교하면 25% 이상 증가했다. 전쟁중 격추된 총 항공기 수는 76,875대에 달하며, 그 중 4만 대 이상이 완파되거나 수리가 불가능하게 파손됐다.

  2차 세계대전 중 이런 혹독한 ‘하늘’의 전장에서 “에이스 (Ace)”의 반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이 한 명 있다. 심지어 그는 대전 중 에이스에 오른 미 육군항공대(USAAF: US Army Air Force)의 유일한 동양인이며, 대전 초부터 활약해 총 6대의 적기를 격추하고 17대의 지상 주기(駐機) 중인 전투기를 격파했다. 에이스란 통상 적기 5대 이상을 격추할 경우에 부여되는 호칭이며, 미군내의 격추왕인 리처드 봉(Richard I. Bong, 1920~1945) 소령의 격추 기록도 40대가량임을 볼 때 그의 기록은 꽤나 눈부시다. 물론 40대의 격추기록은 독일의 격추 왕인 에리히 하트만(Erich Hartmann, 1922~1993) 소령의 352대나 일본의 이와모토 테츠오(岩本徹三, 1916~1955) 중위의 87대1), 소련의 아르세니 바실리예비치 보로셰이킨 (Arseniy Vasilievich Vorozheikin, 1912~2001) 대위의 46대에 비한다면 적어 보이지만, 이는 일정한 야전 근무기간을 충족하거나 전공을 달성하면 후방으로 이동시켜 후진 조종사 양성에 투입한 미군의 인사운용 시스템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의 이름은 프레드 오(Fred Ohr, 1919~2015). 아직 미국사회에서 한국계 이민자의 위상이 낮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의 벽이 높던 1940년대에 조종사가 되는 것으로 모자라 “에이스” 반열까지 오른 그의 기록은 매우 빈약하며, 그의 이야기 역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41년 촬영된 프레드 오 대위의 모습. 병사로 입대했다가 1942년 조종후보생 과정으로 소위가 된 그는 제 52 전투비행단 2전투비행대대 소속으로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활약했다. (출처: US Army)


  프레드 오의 부친인 유완주씨는 1900년대 초 가난한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프레드 오의 부모는 먼저 알래스카 주에서 연어 낚시업을 하다가 오리건 (Oregon) 주로 이동 해 벌목장에서 일했으 며, 1919년 7월 19일,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아들 프레드 오를 낳았다. 이때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그의 부 모는 정식으로 미국 국민이 되었다. 이 때 미 이민국에서 이름을 등록하던 그의 부친은 그 의 이름을 묻는 이민국 직원의 질문에 당황해 “오…”라고 탄식을 내뱉 았다. 그러자 이민국 직원은 “OH”라고 성씨를 적었는데, 영어가 서툰 그는 해명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감탄사인 “오”가 성씨가 되버리면 곤란할 것이라 생각해 뒤에 “R”을 하나 더 적 어 “OHR”을 성씨로 등록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유씨 일가는 오씨 가족이 되어 버렸다. 미 국인이 된 이 “오씨” 가족은 아이다호(Idaho) 주 보이시(Boise) 외곽으로 이주해 정착한 뒤 양파 농장을 경영했다. 프레드 오는 그 덕에 유년시절을 아이다호 주의 농장에서 보냈는데, 그는 “항상 야채를 재배했고, 우리가 먹을 것이 아닌 것은 모조리 다 내다 팔거나 겨울에 먹기 위해 저장했다”고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그는 항상 가족이 항상 가난했지만 자유롭고 행복한 어 린시절을 보냈다. 

미 제 6공군 15 전투비행단 52 비행대대장 시절 작전 브리핑 중인 프레드 오 소령. 그는 2차세계대전 중 미군에서 비행대대장을 지낸 유일한 동양인이다. (출처: American Air Museum in Britain) 

  프레드 오는 아이 다호에서 고교를 졸업 한 뒤인 1938년, 아이다호 주 방위군에 병사로 입대했다. 이 해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가 처음 유럽 정복의 야욕을 나타내기 시작 한 해였으며, 사실상 2 차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프레드 오는 “미국이 곧 전쟁에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리됐다간 (고등학교 를 갓 졸업했으므로) 곧 징집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징집이 됐다간 1차 세계대전 때처럼 보병으로 징집되어 유럽 어딘가의 참호에 던져져 죽 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전쟁 터지기 전까지 잘해야 한 2년 이나 다니게 될 것 같다는 느낌도 왔다.”라고 주 방위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이에 따라 그는 일단 주 방위군에 군적을 걸어 놓아 미군이 참전 하게 되더라도 1차로 징집되어 ‘총알받이’가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프레드의 이력을 살펴본 주 방위군은 그가 농장에서 오래 생활한 것을 보고 기병부대로 배치했다. 말을 잘 다룰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에게 군마 관리를 맡겼던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농장 에서 말들과 함께 지내며 군마의 말발굽을 다듬는 일을 했다. 그는 이렇게 이 시기를 회상했다. “하루 종일 그 곳에서 지내자니 몸에서 심하게 냄새가 배였다. 얼마나 심했던지 부대에서 말을 관리하던 병사들은 다른 부대원들과 따로 식사 하게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일병으로 진급했고, 곧 무전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기계를 다루는데 능숙했던 그는 곧 부대 내무전반 전체를 관리하게 되면서 병장까지 진급했다. 

  그때 그의 인생을 바꾼 전기가 찾아왔다. 1941년, 같은 무전반에 소속되어 있던 리언 크리스티언슨(Leon Christianson)이라는 동료 가 육군항공단(US Army Air Corps)2)의 조종사 교육과정에 지원하러 가면서 프레드에게 동행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조종사에 지원할 생각이 없던 프레드는 아무 생각없이 그를 따라 나섰고, 친구가 면접을 보는 동안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그때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발생 했다. “기다리는 동안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는 데, 갑자기 누가 ‘병장!’이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 잡지 너머로 보니 대령 한 분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의자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대령은 다시 ‘다음!’이라고 외쳤고, 난 순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듣고 싶어졌다. 그 대령은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옆에 있던 육군 항공위원회에서 나온 대위를 보면서 말했다. ‘우린 이 친구를 조종사로 만들걸세!’…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나를 조종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세상사가 항상 그렇듯, 정작 함께 온 친구는 조종사 선발에서 탈락하고 프레드만 육군 항공단 비행학교 입대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입대 후 엄청 난 기량을 보였으며, 비행학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하게 됐다.  

  그는 1942년 5월,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가한 지 반년 후 실전에 배치됐다. 그가 정식 조종사가 되어 전장터로 나왔을 땐 이미 그가 조종 사가 되기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미국은 이미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 2차 세계대전에 정식으로 참전 한 뒤였기 때문이다. 프레드 소위는 태평양 전 역에 배치되기를 희망했으나 육군항공단은 그가 전투 중 생포라도 당할 경우 일본군에게 살 해당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며 그를 태평양 지역으로 보내지 않았다. 사실 이는 표면 상의 이유였고, 실제로는 미국이 일본계 이민자나 일본계 미국인 이중국적자들이 ‘제 5열(fifth Column)’ 역할을 해 일본과 내통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 문에 이들을 태평양 전선에 배치하지 않았다. 이 당시 11만 명 가까운 일본계 미국인이 격 리 캠프에 수용됐으며, 그 중 일부는 미국에 대 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얻고자 육 군에 자원입대 해 재미 일본인으로 구성한 제 442연대전투단(RCT: Regimental Combat Team)과 100대대가 창설됐지만 이들 또한 태평양이 아닌 유럽 전선에만 투입됐다. 사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정서적으로 한편이라 보기 어렵지만 개전 초 미 정부는 어쨌든 조선 역시 일본의 일부로 보았고, 이 시기에 입대한 김영옥 중위 같은 이 또한 100대대에 배치되어 종전 때까지 유럽 전선에서만 싸우기도 했다.

재미 일본계로 구성한 미 제 442 연대전투단(RCT)의 모습.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에 협력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고 강제 격리가 되자, 이들은 미국의 오해를 풀겠다는 일념으로 자원부대를 편성했다. 442 연대전투단은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부대표창을 수상한 부대이기도 하다. 재미교포인 김영옥 대령 역시 100대대를 거쳐 442 연대전투단에서 활약했다. (출처: US Army)


  프레드 오 소위는 영국으로 가 보수교육을 받은 뒤 “아메리칸 비글스(American Beagles)” 라는 별칭의 제 52 전투비행단 2전투비행대대에 배속되어 북아프리카로 배치됐다. 그의 첫 임 무는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융커(Junker) 88 쌍발 폭격기를 제거하는 임무였으며, 그에게는 최초 영국제 전투기인 스핏파이어(Spitfire) 가 주어졌다. 그는 곧 북아프리카에서 첫 격추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독일 공군의 쌍발 폭격기를 격추한 뒤 추가로 적기를 더 격추를 하고자 기수를 돌렸지만, 이미 다른 적기는 모두 흩어져 달아난 뒤였다. 연합군은 곧 북아프리카 에서 추축군을 일소한 뒤 이탈리아로 이동했으 며, 프레드 역시 2전투비행대대와 함께 메디나 (Medina)에 주둔했다. 이 곳에서 그는 주기종 을 P-51 무스탕(Mustang)으로 교체했으며, 무 스탕의 성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술회 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독일군을 상대 하는 동안 루프트바페의 주 기종인 메샤슈미츠 (Messerschmitt) BF-109 전투기 다섯 대를 격추했다. 그렇게 그는 다섯 번째 적기를 격추하는 순간 “에이스” 반열에 올랐다. 그는 어느 날 루마니아에서 B-24 폭격기의 호위임무를 수행하던 중 동료 조종사 하나가 편대 비행 중 방향을 착각하여 반대 방향으로 가자 그를 구하기 위해 기수를 돌렸다. 때마침 홀로 반대방향으로 비행 하는 미군기를 보고 낙오한 적기로 판단한 독일 군의 ME-109 한 대가 이 기체를 격추하려 했으나, 이 때 프레드 오 대위가 따라붙어 BF-109를 격추했을 뿐 아니라 길 잃은 동료까지 기지로 유도하여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은성훈장을 수상했다.


 프레드 오 소령이 2차대전 중 소속되어 있던 미 제 52전투비행단 2전투비행대대 “아메리칸 비글스(American Beagles)” 부대 마크. (출처: US Joint Base San Antonio)


  프레드 오는 2대대에 소속되어 유럽 전역에서 활약하며 진급을 거듭했고, 전쟁 말엽이 됐을 무렵에는 소령까지 진급해 2전투비행대대 대대장에 임명됐다. 사실 “에이스” 타이틀까지 쥔 조종사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가 대대장에 앉은 것은 여러개 의 “벽”을 깨부순 결과였다. 우선 그는 장교 위주인 육군항공단에 이병으로 입대한 병사 출신 조종사였고, 인종적으로도 소외받던 황인종이 었으며, 심지어 출신 민족마저 아직 미국 내에서 위상이 매우 낮던 한국계였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틀어 미국 내 “동양인 에이스” 자체가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로도 짐작 가능하지만, 공군은 특히 사실상 새로 창군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병과였기 때문에 아시아계가 진출하기 어려운 미지의 집단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한 미군은 그를 지휘관으로 인정하여 전투비행대대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 스스로도 당시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공군에서 근무하는 동안 다소간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한 배에 탄 운명임을 인지했고, 임무를 위해 출격하면 모두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 밖에 남지 않았다. …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생각 하나였다."


프레드 오의 애기(愛機)였던 P-51 무스탕(Musting)과 영국산 스핏파이어(Spitfire) Mk.IIA 전투기. (출처: Ronnie MacDonalds/Wikimedia Commons)


  그는 종전까지 공중전으로 6대의 적기를 격추했고, 지상 주기된 적기 17대까지 격파하면서 총 23대의 적기를 제거했다. 그는 전쟁 발발 직전 이병으로 입대해 소령까지 진급했으며, 그 사이에 우수비행십자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2회, 은성훈장(Silver Star) 2회, 동성훈장(Bronze Star), 항공 훈장(Air Medal) 19회를 비롯해 다양한 훈포장을 수상했다. 그 는 유럽 전역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11월에 전역을 선택했으며, 미국 본토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찾았다. 전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버클리교(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를 졸업한 그는 시카고 인근의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대학교의 치의학 대학 원으로 진학했으며, 곧 아내인 에스더(Esther) 와 만나 결혼한 뒤 시카고 정착하여 이후 53년 동안 치과의사로 살았다. 그는 아내 에스더와 62년간 결혼생활을 한 후 2008년에 사별했으며, 아들 로저(Roger)마저 2014년에 사망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된 그는 두 딸 곁에서 지내기위해 록포드(Rockford) 근처로 이사해 만년을 보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자신이 겪은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생전 그는 그 기억 자체가 괴롭다는 언급을 하면서 “그 시기를 떠올리자면 너무 많은 생각으로 복잡해진다… 전쟁 중에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 다. 하지만 그 사실을 후회하냐는 질문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조국애와 정의감으로 군문에 발을 들였지만 그 시대는 아직 인종차별이 만연했고, 동양계에겐 유리천장으로 사회 진출이 제한적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에 막혀 갈등이 많았을 때였다. 하지만 프레드 오 뿐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으로 처음 육군 대령까지 진급한 김영옥 대령, 그리고 해군정보국 요원으로 출발해 미국가안보국(NSA) 초기 창설 멤버가 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 안수산 여사처럼 수많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헌신하며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었다. 이들이 미국내 한국계 이민 사회의 위상을 높인 것이 한미관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프레드 오는 2014년 참전용사의 날 (Veterans Day) 행사에서 95세를 맞은 자신의 인생 소회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 나이가 95세를 맞으면서 완전히 삶을 한 바퀴를 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처음에 나는 조국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온전한 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인생이라는 여행을 한 기분이다.” 프레드 오는 이듬해인 2015년 9월 6일, 9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