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독자칼럼] 판문점에서 스쳐간 엇갈린 운명의 두 포로-윤상용


판문점에서 스쳐간 엇갈린 운명의 두 포로




윤상용 KODEF 전문위원


 3년에 걸친 625 전쟁이 1953년 7월 27일자로 휴전하게 된 지 열흘 뒤인 8월 6일, UN군과 공산진영은 전쟁의 마지막 마무리에 들어갔다. ‘빅 스위치(Big Switch)’로 명명된 작전이 실시되면서 UN측은 75,825명의 포로(북한군 70,183명, 중공군 5,640명)를 석방하는 대신 공산측은 12,773명의 UN군 포로(국군 7,862명, 미군 3,597명, 영국군 945명, 터키군 229명, 필리핀군 40명, 캐나다군 30명, 콜롬비아군 22명, 호주군 21명, 프랑스군 12명, 남아공군 8명, 그리스군 2명, 네덜란드군 2명, 벨기에/뉴질랜드/일본인 1명)를 석방해 교환했다. 작전 개시로부터 한 달여 뒤인 9월 4일, UN측과 공산측은 마지막까지 풀어주지 않고 있던 최고위급 포로 두 사람을 1:1로 교환하기로 했다. 이 포로교환이 성사되자 공산진영에서는 수척해진 얼굴을 한 백발의 노장을 데리고 나왔고, UN측은 그와 대비되는 젊은 북한군 장교를 데리고 나와 마주 세웠다.


  공산군이 석방한 인물은 1950년 7월 21일, 대전에서 실종됐던 미 제 24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1899~1981) 미 육군 소장이었고, 맞은편의 북한군 장교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13사단장인 홍용진(洪鏞鎭, 1916~1999) 소장을 쏘고 자기 발로 미군에 투항했던 리학구(李學九, 1922~1963) 총좌[1]였다. 이들은 모두 개전하던 해인 1950년에 포로가 되어 휴전이 성사된 1953년까지 내내 포로생활을 했으며, 휴전이 성사되면서 마지막으로 각각 포로수용소의 문을 나섰다. 두 사람 모두 3년 만에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는 기분은 남달랐겠지만, 고국으로 돌아갈 이들이 앞으로 처하게 될 운명은 크게 엇갈려 있었다. 

 

 대전역에 도착해 이동 중인 찰스 스미스 중령 휘하의 임시 구성 부대인 '스미스 특임대(Task Force Smith)'. (출처: US Army)


  윌리엄 딘 소장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교(University of California @ Berkley)에서 ROTC 과정을 통해 1922년 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딘은 대위에 불과했지만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곧 중령으로 가(假)진급했으며, 1942년에는 대령 계급장을 달았다. 그는 전형적인 야전형 ‘파이터’였다. 훗날 딘 장군은 1955년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장성 중에서는 오로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ley, 1893~1981) 원수, 그리고 조세프 스틸웰(Joseph W. Stilwell, 1883~1946) 중장 세 사람 만이 수여받은 전투보병우수기장(Combat Infantryman Badge)을 받았다. 그는 1943년에 준장 진급과 함께 미 제 44사단장이 되어 프랑스에 발을 내딛었으며, 종전하던 해인 1945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44사단은 1945년 5월 독일 본토 내로 진격해 란데크(Landeck)를 점령했으며, 종전까지 인스브루크(Innsbruck)에 도달해 에리히 브란덴베르거(Erich Brandenberger, 1892~1955) 중장이 지휘하는 독일국방군 제 19군의 항복을 받았다.

 

  딘 소장은 자신이 지휘하던 제 44사단이 1945년 11월에 해체되자 잠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곧 미 제 24군단장이던 존 하지(John R. Hodge, 1893~1963) 중장이 주한미육군사령관(USAFIK: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사령관에 보직되자 그의 부사령관으로 발령받아 한반도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미 정부는 ‘한국이 자립할 준비가 될 때까지’ 관리하기로 하면서 주한미육군사령부를 육군 군정청(USAMGIK: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으로 전환했다. 군정청은 우여곡절 끝에 1948년 7월 20일에 대선을 실시했으며, 8월 15일자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하고 곧 미 군정청은 해산했다. 딘 소장은 한국에 주둔 중이던 미 제 7사단장이 됐지만 사단이 얼마 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札幌)로 이동하자 요코하마(横浜)의 미 제 8군사령부(EUSA: Eighth US Army) 참모장 자리로 잠시 이동했다가 다시 일본 규슈(九州) 고쿠라(小倉)에 주둔 중이던 미 제 24사단 사단장에 보직됐다.

 

대전에 도착 후 월튼 워커 중장과 대화 중인 윌리엄 딘 소장. 1950년 7월 7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대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하자 미 정부는 우선 가장 가까운 일본에 주둔 중인 8군 예하 24사단을 파견하고자 했으나, 그나마 이 24사단도 한 곳에 모여있던 것이 아니라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 당장 파견이 어려웠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판단한 딘 소장은 우선 선발대로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 1916~2004) 중령이 지휘하는 ‘스미스(Smith) 특임대를 한국으로 보낸 후 본인 자신도 1950년 7월 3일에 대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세계를 상대해 승리했다’는 자부심에 도취해 있던 미군은 전쟁 후 급격한 감군작업을 거치면서 예전의 그 군대가 아니었고, 소규모 부대를 축차로 투입한 것 역시 실책이었다. 스미스 부대는 죽미령 고개에서 북한군에게 격파 당했고, 이에 당황한 딘 소장은 북한군의 전진이라도 지연시킬 목적으로 34연대를 투입했지만 34연대 역시 평택에서 북한군과 붙자마자 패했다. 딘 소장은 연대장인 제이 로블레스(Jay B. Lovless, 1901~?) 대령에게 최대한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라고 명령했는데, 로블레스 대령은 지연은 커녕 교전에 들어가자마자 퇴각해버렸기 때문에 딘 소장은 대노해 로블레스를 연대장에서 해임했다. 7월 8일 오전에는 미8군 사령관인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중장이 대전에서 수비 중이던 딘 소장과 만나 ‘8군 예하 4개 사단 전 병력이 오고 있다”고 알렸으며, 맥아더 원수 역시 미 합참에 요청해 본토에서 미 제 2보병사단, 미 제 82공정사단 예하 연대전투단 등 다수의 부대가 증원으로 출발했다고 전했다. 맥아더는 이미 이 시점에 ‘전쟁을 종결시킬 계획’으로 적을 최대한 길게 선형으로 늘어뜨린 후 서해안을 우회하여 인천을 쳐 북한군의 주력인 선두 부대와 후속부대를 끊어버린다는 묘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딘 역시 이 계획에 대해 간략하게 들었으나, 문제는 그 작전이 실행될 때까지 얼마나, 또 어디까지 방어해야 하는지 기약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딘 장군이 19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격파한 북한군의 T-34/85 전차. 해당 전차는 대전시에서 한동안 전시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시킨 상태다. (출처: US Army)


  딘 소장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힘들다고 판단되자 금강까지 퇴각한 후 방어선을 쳤고, 조치원에서 한 차례 북한군과 교전을 치렀지만 이들을 저지하기엔 중과부적이었으므로 금강 이남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딘은 미 제 19, 21, 34연대로 대전을 막았지만 결국 북한군이 대전 시내까지 밀고 들어오자 미군 전력은 모두 흩어졌다. 이에 딘 소장은 전속부관, 한국인 통역 한 명과 함께 새로 지급된 3.5인치 바주카를 직접 메고 시내를 돌아다녔으며, 북한군의 T-34를 한 대 격파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라고 판단하고 탈출했다. 대전에서 생존 병력을 긁어모은 그는 트럭에 나눠 태운 후 출발했는데, 정작 맨 뒤에서 따라가던 딘 장군 자신과 전속부관은 갈림길 앞에 도달했을 때 북한군의 총격을 받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그는 위험하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해 계속 달렸지만 이는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아군과 합류하지 못한 그는 36일간 홀로 산속을 떠돌았으며, 식량이나 치료약 없이 헤매면서 키 180cm에 체중 95kg에 달했던 그의 체중이 59kg로 줄었다. 그는 8월 25일에 한 한국인이 아군 진영으로 안내하겠다는 말을 믿고 따라 나섰다가 북한군에게 넘겨졌다. 딘은 속았다는 것을 안 순간 적들이 자신을 죽이게끔 유도했지만, 늙고 초췌한 노병은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어 그대로 사로잡힌 뒤 인근 경찰서 유치장에 던져졌다. 북한군은 그가 미군 장성임을 몰라 수원으로 끌고 가 간단한 치료와 식사를 제공했으며, 서울로 다시 이송해 미군포로 수용소에 수감했다. 딘 장군은 자신의 신분을 계속 감추려 했지만 하필 전쟁 전 미 군정청에서 일했던 한국인 하나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신원이 발각됐다. 그가 고위급 포로라는 것이 밝혀지자 북한은 그를 평양으로 이송했고, UN군이 평양에 폭격을 실시하자 그를 평양 북방의 순안으로 옮겼다. 북한은 그 곳에서 매일같이 딘으로부터 고급 정보를 털어내기 위해 취조했고, UN의 한국 지원을 비판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종용했지만 그는 끝까지 버텼으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초기 계획에 대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회고에 따르면 ‘어느 순간 내 자신이 무너질 것이 우려되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은 그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다 영양실조로 건강마저 악화되자 그를 사실상 내팽개쳤다.

1950년 경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윌리엄 딘 소장의 사진.

 (출처: US Army/UC Berkley ROTC) 


  미군은 딘 소장이 대전에서 실종된 이후 계속 그를 찾았으나 몇 개월 동안 흔적이 보이지 않자 어디선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던 중 1950년 10월, UN군이 평양에 입성하면서 ‘리규현’이라는 이름의 북한군 병사를 사로잡았는데, 그는 자신이 포로로 잡혀온 딘 장군과 한 달 정도 함께 지내면서 통역을 했다는 언급을 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미군 당국은 이것이 혼선을 위한 위보일 가능성으로 봐 딘의 생존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1951년 12월 18일, 벨기에의 일간지인 르 소이어(Le Soir)지의 취재를 위해 호주의 언론인인 윌프레드 버쳇(Wilfred Burchett, 1911~1983)이 평양을 방문해 미군 포로들과 인터뷰를 실시했다. 사실 북한이 버쳇의 인터뷰를 허용한 이유는 그가 정치적으로 반 제국주의 논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미국과 호주에 부정적 입장을 보여 1970년대까지 호주에서 추방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 언론인인 그는 포로 인터뷰 중 딘 장군을 확인하자 곧장 이를 전세계에 보도했고, 그 이후로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이 지속적으로 딘 장군과 인터뷰를 위해 찾아왔으므로 북한은 그를 이 때부터 지금까지와 달리 후하게 대했다. 훗날 딘 장군은 자서전인 <딘 장군의 이야기(General Dean’s Story)>에서도 ‘버쳇의 방문 이후부터 휴전이 성사될 때까지 비교적 편히 지냈다’고 밝혔다.

미군에 투항 후 후송 중인 13사단 참모장 리학구 총좌. (출처: Public Domain)


  1953년 9월, 625전쟁의 휴전이 성사되면서 딘 장군은 풀려나게 됐다. 그는 판문점으로 이동해 앞서 다부동 남쪽 삼산동에서 항복한 북한 제 13사단 참모장 리학구 총좌와 포로 교환됐다. 리학구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면서 북한군의 선두와 후속부대가 완전히 차단되자 사단장이던 홍용진 소장에게 퇴각을 건의했지만 묵살당하자 사단장의 팔에 총을 쏜 후 탈영했다. 그는 새벽녘에 삼산동까지 내려왔으며, 대로변에 잠들어 있는 미 제 8기병연대 병사 한 명을 발견해 그를 흔들어 깨워 항복했다. 그는 투항 후 UN군 취조에 적극 협조했으며, 심지어 훗날 북한의 불법남침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 중 하나인 ‘작전명령 제1호’까지 제공했다. 그가 UN측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이유는 그보다 앞서 귀순한 정봉욱(鄭鳳旭, 1924~2018) 중좌의 선례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봉욱 중좌 역시 13사단 소속이었으나 1950년 8월 21일, 사단이 돈좌된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는 사단장과 말다툼을 하다가 당번병 하나와 UN군에 투항했고, 이후 본인 의사에 따라 국군 중령으로 임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UN군이 리학구의 귀순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UN측이 사로잡은 공산군 최고 계급자였고, UN 측은 혹시 모를 장성급 포로교환 가능성을 위해 그를 ‘카드’로 갖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여러 차례 귀순 의사를 밝혔음에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UN측이 그를 최상위 계급자에 걸맞게 대우를 해줬다는 사실이지만, 그는 거제도 포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계급 때문에 친공(親共) 진영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고 있는 윌리엄 딘 소장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1953년 9월, 두 사람은 서로를 스치고 지나가 각각의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반대였다. 딘 장군은 스스로의 공적을 평가하면서 “지휘관으로써 내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나무로 된 훈장조차라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거듭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고 강조했으며, “한국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의 조국은 포로가 되기 직전까지 그가 보여준 분투, 그리고 포로생활 동안 겪은 고초를 똑똑히 지켜봤으며, 그의 모든 노력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영웅의 귀환을 환영하는 카 퍼레이드 행렬과 함께했고, 포로생활 동안 자신에게 수여된 줄도 몰랐던 훈장들이 수여됐다. 그 중에는 명예대훈장(Medal of Honor)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1951년 1월 9일, 그가 직접 대전에서 바주카를 들고 적 전차를 잡은 영웅적 행적을 기려 트루먼 대통령이 수여해 아내인 밀드레드 딘(Mildred Dean) 여사가 대리로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리학구의 운명은 처절했다. 사실 사단장을 쏘고 적전 도주한데다 적에게 협조적이던 이를 다시 송환 시켰으니 처음부터 좋은 말로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귀국 후 이적행위자로 처벌받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을 지 모르나, 귀국 후 좌천당해 실의에 빠져 살던 그는 결국 196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투항 후 미군 헌병의 에스코트로 이동 중인 리학구 총좌. 그는 북한군 13사단과 마주 대치 중이던 미 제 1기병사단 8기병연대 1대대 B중대에 투항했다.

 (출처: Public Domain)


  두 사람이 처한 운명은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크게 달랐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선택도 비슷하면서도 크게 달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과 조국이 이들을 대한 방식은 분명히 반대였다는 사실이다. 중국 전국시대 말, 진(晉)의 지백(智伯)이 조양자(趙襄子)에게 패해 멸망 당하자 지백을 섬겼던 예양(豫讓)은 산속으로 도망쳐 복수를 결심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양자에게 사로 잡힌다. 이제는 다 죽고 없어진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굳이 왜 이런 짓을 하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어쩌면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알아주는 조국과 알아주지 않는 조국을 만났을 때부터 운명이 갈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1] 625 당시에 설치되어 있던 인민군 계급으로, 한국군의 대령~준장 사이에 해당한다. 원래 인민군 계급은 소좌-중좌-대좌-총좌-소장 순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총좌가 없어진 대신 소좌-중좌-상좌-대좌로 변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