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한미동맹
박휘락
국민대 교수, 본 협회 편집위원장
미국이 없었다면?
역사는 가정할 수 없고, 가정해봐야 소용없다. 그러나 6·25전쟁 70주기를 맞으면서 우리 한번 가정해보자. 1950년 6·25전쟁에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한국은 분명히 공산화되었다.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운 채 파죽지세로 한국을 유린하였고, 우리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 못한 채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만에 정부가 서울을 떠났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미군의 첫 파견부대인 스미스(Charles Smith) 부대가 7월 5일 오산에서 북한군과 교전할 때까지 열흘 만에 오산까지 진출한 것이다. 미군이 참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한 이후에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어서, 현 경상남도 정도 크기의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을 계획하여 철수를 보장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할 정도였다.
그때 공산화되었으면 우리의 삶은 현재 북한 주민의 삶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는 베트남의 사례를 들면서 공산주의로라도 통일이 되었다면 변신하여 달라졌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쿠바 등 공산주의를 고수한 국가의 실태를 비교하고, 북한 3대 세습이 진행되었을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북한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남한 국민으로서 받아야 하는 차별도 상당했을 것이다. 우리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상당수는 숙청을 당하여 우리는 태어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가정을 해보자. 6·25전쟁 후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조약을 맺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공산화되지 않은 채 버틸 수 있었을까? 6·25전쟁에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공산화되었으리라는 것만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국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은 무척 크다.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재기할 수 없는 상태였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속적인 원조를 받아서 금방 공격력을 보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에 4·19혁명 등으로 한국이 불안해졌을 때 북한이 재침을 검토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북한은 어떻게든 남한을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국과 소련은 성공의 가능성만 높다면 지원했을 것이다. 전쟁 후 남한 사회가 보여준 혼란상을 감안하면 북한은 남한의 내부분열을 획책하기만 해도 공산화시킬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가정해보면 우리는 6·25전쟁 때 미국이 우리를 도와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한미동맹을 통하여 그동안 전쟁을 억제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새삼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군의 희생과 지원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주기 위하여 미군이 감수한 희생도 적지 않았다. 많을 때는 30만 명이 넘는 미군이 한국이 주둔하면서 한국을 방어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사한 인원이 36,754명이고, 부상자가 10만이 넘었으며, 실종자도 8,000명에 이르렀다. 전쟁의 와중에 워커(Walton Walker) 제8군사령관이 순직하였고, 제24사단장이었던 딘(William Dean) 소장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밴플리트(James Van Fleet) 미 8군사령관의 외아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명인사 자녀들이 6.25전쟁에서 사망하였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적혀 있듯이 “전혀 알지 못한 나라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이들은 응하여 희생한 것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휴전으로 종료되지 않았다. 한국의 재건과 한국군의 발전에 결정적인 지원을 제공하였다. 휴전 이후 한국은 10개 사단을 유지하였는데, 이 사단들이 제대로 된 능력을 구비하도록 지원한 것은 미국이었다. 예를 들면, 1953년 7월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 미 의회는 긴급하게 군사원조 7,000만 달러를 가결하였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발표하였다. 1960연대 초반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총 원조는 1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미군의 원조로 한국군은 성장하고, 이로써 북한의 전쟁을 억제해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미관계
대다수의 국민들은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미국의 지도를 수용하여 나라를 발전시켰고, 미군을 만날 때마다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동맹국인 미국이 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한국도 “전혀 알지 못한 나라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호응하여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여 5만 명(1967년 48,839명, 1968년 49,869명, 1969년 49,755명) 정도의 한국군이 1964~1973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에 파견되어 미군과 함께 싸웠다. 이로 인하여 한미동맹은 “혈맹”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군은 미국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구비하는 데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70년대에 한국은 ‘특별방위세’까지 신설하여 자주국방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였고, ‘율곡계획’이라는 명칭으로 자주국방에 필요한 무기 및 장비를 획득하기 위한 집중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미국도 상당한 액수의 무상원조와 무기구입을 위한 해외무기판매(FMS: Foreign Military Sales)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한국군의 자주국방 노력을 지원하였다. 이로써 한국군은 한국 방위에 대한 미군의 부담을 상당할 정도로 덜어주게 되었고, 미군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부대를 전진배치시킴으로써 주둔 비용이 부담이 된다고 하자 한국은 기꺼이 호응하였다. 경제 규모에 상응하여 한국은 1991년 1억 5,000만 달러를 방위비분담으로 지급하였고, 그 이후 경제 사정이 좋아짐에 따라 2004년까지 매년 10~20% 정도 증액시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 결과 2005년부터는 물가상승률 정도로만 증액시켜도 되는 안정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한미 양국 군이 긴밀한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의 입장을 잘 조절했기 때문이다.
‘자주’의 성급한 요구
그러나 한국이 발전해감과 동시에 한미동맹 관계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자주’라는 단어에 국민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의하여 한국의 여중생 2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자주는 ‘반미’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정책에서도 “동북아시아 균형자론”이라면서 미국과 중국을 균등하게 보고자 하는 시각이 적용되었다. 중국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주한미군이 자신과 동맹국인 한국의 방어를 위하여 배치하려는 사드(THAAD) 요격미사일에 관한 결정을 3년 정도 지체하기도 했다. 이전의 한미동맹과 전혀 다른 방향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자주’ 자체가 목적이 된 느낌도 없지 않다. 북한의 핵 위협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한미연합사령관을 한국군이 담당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자주라는 감정이 국가안보보다 앞서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군에게 분명한 책임을 줘서 북핵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도록 해야 할 상황에서 자주를 핑계로 오히려 책임을 면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만하게 처리되어 왔던 방위비분담 문제도 자주라는 핑계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깎일 각오를 하면서 엄청난 금액을 제시함으로써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북한의 핵무기 공격을 자제시키려면 미국의 핵우산 제공 약속이 중요한데, 자주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미국의 약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는 별로 강구되고 있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면 현재의 한국에게 한미동맹은 국가의 생존을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사안이다. 미국의 핵우산 없이는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 또는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우산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한국에 대하여 핵 공격을 감행해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국은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모겐소(Hans J. Morgenthau)가 언급했듯이 북핵 위협에 굴복하거나 북한의 핵 공격을 받아서 초토화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다시 미국이 없다면?
이제는 미래 상황을 두고 가정을 해보자.
우선, 북한이 다시 공격할 때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한국도 나름대로 군사력을 증강한 바가 있기 때문에 북한이 재래식 공격만을 고수한다면 어느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미 “불법적인”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민족애 등을 감안하여 핵무기를 끝내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관상용으로 두고자 천신만고를 거쳐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과의 전쟁에서 질 가능성이 높고, 결국 남한은 공산화될 것이다. 또한 재래식 무기로만 전쟁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군인과 국민들이 사망을 하게 될 것이고,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로 우리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될 것이다. 북한이 주한미군과 핵우산 철폐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만 없어진다면 바로 침략하여 남한을 공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상태에서 한미동맹이 종료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미동맹의 조약 자체는 폐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유사시 미국이 한국을 방어해주지 않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한미동맹은 사실상 소멸되는 수준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는 천 년 동안 그들의 속국이었다고 말했듯이 중국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영향력을 한국에 확대하고자 할 것이다. 한국이 균형외교를 추진한 이후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관리들은 이미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은 어떻게 할까? 한국의 일방적 압박을 지금처럼 참고 있을까? 중국의 위협을 한반도에서 막아내야 한다면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6·25전쟁 때의 가정을 지금 적용해 봐도 한미동맹이 없는 우리나라의 미래는 전혀 밝지 않다. 얼마 전까지는 미군의 참전이 우리나라를 구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소중하게 관리했고, 그래서 현재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미군이 없어도, 한미동맹이 없어도 한국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나 한미동맹이 없어질 경우 한국은 공산화를 수용하거나 핵무기에 의하여 초토화되는 선택지밖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
나가며
6.25 70주기를 맞아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 간도 은혜를 잊으면 곤란하듯이 우리는 미국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북한의 핵 위협으로 인하여 6·25전쟁과 유사한 정도로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 절실해진 상황이다. 자주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국가안보를 위한 만전지계로써 한미동맹을 인식해야 한다.
정부도 그러해야 하지만 한국군부터 한미동맹의 실질적 강화에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국군 스스로 북핵 위협을 방어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현 한미연합사령부 체제를 변화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방위비분담 문제가 원만하게 타결되도록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한미동맹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포함한 모든 전쟁을 억제하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에 대한 국민들의 건전한 인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안도 강구해야할 것이다. 한미동맹 없는 한국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6·25전쟁과 한미동맹
박휘락
국민대 교수, 본 협회 편집위원장
미국이 없었다면?
역사는 가정할 수 없고, 가정해봐야 소용없다. 그러나 6·25전쟁 70주기를 맞으면서 우리 한번 가정해보자. 1950년 6·25전쟁에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한국은 분명히 공산화되었다.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운 채 파죽지세로 한국을 유린하였고, 우리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 못한 채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만에 정부가 서울을 떠났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미군의 첫 파견부대인 스미스(Charles Smith) 부대가 7월 5일 오산에서 북한군과 교전할 때까지 열흘 만에 오산까지 진출한 것이다. 미군이 참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한 이후에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어서, 현 경상남도 정도 크기의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을 계획하여 철수를 보장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할 정도였다.
그때 공산화되었으면 우리의 삶은 현재 북한 주민의 삶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는 베트남의 사례를 들면서 공산주의로라도 통일이 되었다면 변신하여 달라졌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쿠바 등 공산주의를 고수한 국가의 실태를 비교하고, 북한 3대 세습이 진행되었을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북한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남한 국민으로서 받아야 하는 차별도 상당했을 것이다. 우리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상당수는 숙청을 당하여 우리는 태어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가정을 해보자. 6·25전쟁 후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조약을 맺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공산화되지 않은 채 버틸 수 있었을까? 6·25전쟁에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공산화되었으리라는 것만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국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은 무척 크다.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재기할 수 없는 상태였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속적인 원조를 받아서 금방 공격력을 보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에 4·19혁명 등으로 한국이 불안해졌을 때 북한이 재침을 검토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북한은 어떻게든 남한을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국과 소련은 성공의 가능성만 높다면 지원했을 것이다. 전쟁 후 남한 사회가 보여준 혼란상을 감안하면 북한은 남한의 내부분열을 획책하기만 해도 공산화시킬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가정해보면 우리는 6·25전쟁 때 미국이 우리를 도와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한미동맹을 통하여 그동안 전쟁을 억제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새삼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군의 희생과 지원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주기 위하여 미군이 감수한 희생도 적지 않았다. 많을 때는 30만 명이 넘는 미군이 한국이 주둔하면서 한국을 방어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사한 인원이 36,754명이고, 부상자가 10만이 넘었으며, 실종자도 8,000명에 이르렀다. 전쟁의 와중에 워커(Walton Walker) 제8군사령관이 순직하였고, 제24사단장이었던 딘(William Dean) 소장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밴플리트(James Van Fleet) 미 8군사령관의 외아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명인사 자녀들이 6.25전쟁에서 사망하였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적혀 있듯이 “전혀 알지 못한 나라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이들은 응하여 희생한 것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휴전으로 종료되지 않았다. 한국의 재건과 한국군의 발전에 결정적인 지원을 제공하였다. 휴전 이후 한국은 10개 사단을 유지하였는데, 이 사단들이 제대로 된 능력을 구비하도록 지원한 것은 미국이었다. 예를 들면, 1953년 7월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 미 의회는 긴급하게 군사원조 7,000만 달러를 가결하였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발표하였다. 1960연대 초반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총 원조는 1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미군의 원조로 한국군은 성장하고, 이로써 북한의 전쟁을 억제해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미관계
대다수의 국민들은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미국의 지도를 수용하여 나라를 발전시켰고, 미군을 만날 때마다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동맹국인 미국이 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한국도 “전혀 알지 못한 나라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호응하여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여 5만 명(1967년 48,839명, 1968년 49,869명, 1969년 49,755명) 정도의 한국군이 1964~1973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에 파견되어 미군과 함께 싸웠다. 이로 인하여 한미동맹은 “혈맹”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군은 미국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구비하는 데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70년대에 한국은 ‘특별방위세’까지 신설하여 자주국방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였고, ‘율곡계획’이라는 명칭으로 자주국방에 필요한 무기 및 장비를 획득하기 위한 집중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미국도 상당한 액수의 무상원조와 무기구입을 위한 해외무기판매(FMS: Foreign Military Sales)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한국군의 자주국방 노력을 지원하였다. 이로써 한국군은 한국 방위에 대한 미군의 부담을 상당할 정도로 덜어주게 되었고, 미군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부대를 전진배치시킴으로써 주둔 비용이 부담이 된다고 하자 한국은 기꺼이 호응하였다. 경제 규모에 상응하여 한국은 1991년 1억 5,000만 달러를 방위비분담으로 지급하였고, 그 이후 경제 사정이 좋아짐에 따라 2004년까지 매년 10~20% 정도 증액시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 결과 2005년부터는 물가상승률 정도로만 증액시켜도 되는 안정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한미 양국 군이 긴밀한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의 입장을 잘 조절했기 때문이다.
‘자주’의 성급한 요구
그러나 한국이 발전해감과 동시에 한미동맹 관계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자주’라는 단어에 국민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의하여 한국의 여중생 2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자주는 ‘반미’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정책에서도 “동북아시아 균형자론”이라면서 미국과 중국을 균등하게 보고자 하는 시각이 적용되었다. 중국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주한미군이 자신과 동맹국인 한국의 방어를 위하여 배치하려는 사드(THAAD) 요격미사일에 관한 결정을 3년 정도 지체하기도 했다. 이전의 한미동맹과 전혀 다른 방향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자주’ 자체가 목적이 된 느낌도 없지 않다. 북한의 핵 위협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한미연합사령관을 한국군이 담당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자주라는 감정이 국가안보보다 앞서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군에게 분명한 책임을 줘서 북핵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도록 해야 할 상황에서 자주를 핑계로 오히려 책임을 면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만하게 처리되어 왔던 방위비분담 문제도 자주라는 핑계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깎일 각오를 하면서 엄청난 금액을 제시함으로써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북한의 핵무기 공격을 자제시키려면 미국의 핵우산 제공 약속이 중요한데, 자주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미국의 약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는 별로 강구되고 있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면 현재의 한국에게 한미동맹은 국가의 생존을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사안이다. 미국의 핵우산 없이는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 또는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우산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한국에 대하여 핵 공격을 감행해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국은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모겐소(Hans J. Morgenthau)가 언급했듯이 북핵 위협에 굴복하거나 북한의 핵 공격을 받아서 초토화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다시 미국이 없다면?
이제는 미래 상황을 두고 가정을 해보자.
우선, 북한이 다시 공격할 때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한국도 나름대로 군사력을 증강한 바가 있기 때문에 북한이 재래식 공격만을 고수한다면 어느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미 “불법적인”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민족애 등을 감안하여 핵무기를 끝내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관상용으로 두고자 천신만고를 거쳐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과의 전쟁에서 질 가능성이 높고, 결국 남한은 공산화될 것이다. 또한 재래식 무기로만 전쟁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군인과 국민들이 사망을 하게 될 것이고,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로 우리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될 것이다. 북한이 주한미군과 핵우산 철폐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만 없어진다면 바로 침략하여 남한을 공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상태에서 한미동맹이 종료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미동맹의 조약 자체는 폐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유사시 미국이 한국을 방어해주지 않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한미동맹은 사실상 소멸되는 수준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는 천 년 동안 그들의 속국이었다고 말했듯이 중국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영향력을 한국에 확대하고자 할 것이다. 한국이 균형외교를 추진한 이후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관리들은 이미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은 어떻게 할까? 한국의 일방적 압박을 지금처럼 참고 있을까? 중국의 위협을 한반도에서 막아내야 한다면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6·25전쟁 때의 가정을 지금 적용해 봐도 한미동맹이 없는 우리나라의 미래는 전혀 밝지 않다. 얼마 전까지는 미군의 참전이 우리나라를 구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소중하게 관리했고, 그래서 현재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미군이 없어도, 한미동맹이 없어도 한국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나 한미동맹이 없어질 경우 한국은 공산화를 수용하거나 핵무기에 의하여 초토화되는 선택지밖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
나가며
6.25 70주기를 맞아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 간도 은혜를 잊으면 곤란하듯이 우리는 미국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북한의 핵 위협으로 인하여 6·25전쟁과 유사한 정도로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 절실해진 상황이다. 자주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국가안보를 위한 만전지계로써 한미동맹을 인식해야 한다.
정부도 그러해야 하지만 한국군부터 한미동맹의 실질적 강화에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국군 스스로 북핵 위협을 방어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현 한미연합사령부 체제를 변화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방위비분담 문제가 원만하게 타결되도록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한미동맹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포함한 모든 전쟁을 억제하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에 대한 국민들의 건전한 인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안도 강구해야할 것이다. 한미동맹 없는 한국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