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25 전쟁영웅 백선엽(白善燁) 장군에게 듣는다

6.25 전쟁영웅 백선엽(白善燁장군에게 듣는다


국군 최초로 대장 진급한 백선엽 장군; 1953.1.31, 32


올해는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와 같은 전쟁의 참화가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6.25가 남긴 교훈을 깊이 새기기 위해 6.25 참전 영웅 백선엽 장군님의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백 장군님은 올해로 100세를 맞이하였습니다백 장군님은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70년이 지난 그 날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과 참혹한 전투상황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때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우리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으로부터 무엇을 느끼고 배워야 하며 무엇을 소중히 지켜나가야 하는지오직 구국 충정의 일념으로 한평생을 살아오신 노 장군으로부터 전쟁의 교훈그리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들어보았습니다장군님을 직접 찾아뵙고 귀한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나 코로나 사태로 제한이 되어 서면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질문북한군의 6월 25일 기습남침 당일우리 군의 대비태세는 어떠하였습니까또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받았을 시 최전방 사단장으로서 어떤 절박한 심정을 느끼셨는지요?


답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공교롭게도 그 당시 나는 6.25발발 열흘 전에 시흥의 육군보병학교 고급장교 보수교육 파견 입교 명령을 받고 선임 11연대장 최경록 대령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선 부대를 떠나 신당동 우리 집에서 출퇴근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날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다가 자고 있었는데, 7시경 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금일 새벽에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는데개성은 일대 혼란 상태로 이미 적에게 점령당한 거 같다라는 것이었습니다밖에는 꽤 굵은 비가 처마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전화를 받던 그 순간가슴이 철렁했지요무엇보다하필 사단장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는 것이 걱정됐습니다. ‘우선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곧 들어간다.’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차량·총포 정비계획이 있어 장비는 집결 상태였고 부대훈련은 일부 부대는 대대훈련까지 들어간 부대도 있었습니다마침그때 전군이 오랜 비상경계태세에 있다가 모처럼 해제가 됐습니다그래서그 주말에는 많은 장병들에게 외출·외박을 시켰어요게다가 답답한 것이내가 사단장 보수교육을 들어가는데 美 군사고문단의 건의로 보병학교에 입교한 지휘관들은 학생 신분으로는 지휘용 짚차를 가져가지 말고각자 시내버스를 이용하라고 지시가 된 겁니다할 수 없이 나는 사단장 지프를 부대에 두고 나와야 했습니다유사시에 사단장이 즉각 움직일 수 없게 된 거죠그래서겨우 용산 삼각지 육본 관사에 살던 1사단 美 수석고문관 로크웰(Lloyd Rockwell) 중령의 지프차를 얻어타고 급히 수색 사단사령부(前 국방대학교 자리)로 갔다가 즉시 파주의 사단 전방지휘소로 갔지요나는 제일 먼저, ‘각자가 파놓은 진지로 돌아가서 방어에 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한가지 해프닝은 나와 함께 파주초등학교의 사단 전방지휘소까지 동행하던 美 수석고문관 그 친구가 오전까지는 같이 머물러 있더니점심 때쯤 되니까 갑자기 내게, ‘지금 美군사고문단 본부로부터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서 떠나야 한다고 하더군요나는 매우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아니미군이 떠난다니…!’ 1945년 해방 직후 美 군정 때부터 늘 우리 국군과 같이 옆에 있던 미군이 떠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군요사실, 1946년 초 창군 시작부터 신생 국군에게 미군이 모든 물자·장비를 다 지원해 왔던 상황에서 그들이 떠난다는 것은 이제 국군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 더욱 절망적인 생각이 든거지요할 수 없이 美 고문관들과 눈물로 작별을 했습니다그러더니그다음 날 26일 저녁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더군요美 군사고문단이 철수 방침을 취소했다는 겁니다아무튼그런 충격과 혼란의 연속이었지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나는 그 해 6.25 남침 두 달 전인 4월 말에 1사단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사단의 38도 선상 방어계획이 너무 허술하다고 판단하여즉각 임진강과 파평산의 지리적 이점을 살린 사단 방어계획 개편안’(*참고 현재 제1보병사단 역사관에 당시 사단 방어계획 요도 사본이 전시돼 있음)을 육본에 보고한 후 대대적인 진지 공사에 착수해서 6월 초순 무렵 개략적인 진지 작업을 마친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았지요그 진지 덕분에서울이 이미 함락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것도 모른 채 앞에서 싸우던 우리 1사단은 그래도 3일간이나 문산-봉일천 축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그 후사단은 모든 장비와 중화기를 다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져 나룻배로 한강을 도하해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70년 전 이 땅의 6·25전쟁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죠그 당시에 이미 38도 선상에 대한 정보판단을 통해 북한군이 언젠가는 남침할 것이라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상급부대는 긴장하지 않았습니다한마디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을 망각한 결과였지요.


질문 절대 우세의 북한군 공격으로 국군의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져 한강방어선이 무너지고 수도 서울도 함락되어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대한민국이 적화될 수 있는 위기의 절망감 속에서 구원의 손길은 무엇이었습니까?


답변개전 초에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세 번 있었는데제일 처음은 28일 오전 11~12시경 우리 1사단이 봉일천 마지막 방어선에서 적과 싸우고 있을 때미군 전투기가 나타나더니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나는 이제는 살았다기회가 있을 수 있다.’라는 희망이 솟았습니다그런데 뜻하지 않게 미군 전투기가 우리 아군 쪽에 폭탄을 던졌어요. ‘이거 우군이 사상자가 나오면 야단인데!’ 하고 굉장히 걱정했지요하지만우리가 폭탄 맞는 것은 둘째치고우리가 내심 기대했던 미군이 드디어 참전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뻤지요그래서 나는 연대장들과 참모들에게 여러분이제 미군이 참전한 건 사실인데이건 아주 굿 사인(Good Sign)이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다음 날 29일 아침내가 시흥 보병학교에 겨우 도착했을 때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의 부관 메이 중위를 만났는데그 친구 말이 오늘 VIP가 전선 시찰을 온다면서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이 한국으로 날아온다고 해요그러면서, ‘미국은 계속 한국을 지원할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시라는 그의 말에 좀 안심이 되었죠그러더니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비행장에 내린 맥아더 장군이 한강 전선을 둘러보기 위해 시흥을 지나 영등포 쪽으로 올라갔다고 하더군요나중에 들으니까그때 통역을 맡았던 김종갑 장군이 전하는 말이 맥아더 사령관이 철수하는 하사관에게 물었대요. “싸울 의지가 있느냐고요그러자그 하사관은 탄약만 있으면 싸우겠다는 굳은 전의를 밝히자 이를 확인한 맥아더 장군이 감탄하면서 한국군이 패잔병들 답지 않은 것에 놀라워했다고 그래요그 때 미군은 저항하면서 후퇴하는 이른바 지연전 전술을 우리 국군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세 번째가 오산 북방에서 만난 美 스미스 부대입니다. 7월 초우리 1사단이 수원 동북방 풍덕천에서 매복작전으로 북한군 제 3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후 수원을 거쳐 내려가고 있는데오산 북쪽에 미군이 있었습니다지금 생각하니 그 게 美 스미스 대대인 모양이었습니다처음으로 본 미군이어서 매우 반가웠지요우리는 후퇴해서 내려오는데 거기서 진지를 펴고 있는 미군 포병 하사관을 만나 얘기해 보니 나는 포병으로서 15년을 근무했는데 정확히 사격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더군요그래서 나는, ‘제발 건투하기 바란다’ 하고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갔지요비록그 부대가 그때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직접 느끼게 해 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질문미군의 한국전쟁 투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금강방어선이 무너지고 대전마저 함락되고 결국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최후 결전을 벌이게 되었지요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적화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구국의 희망을 안겨다 준 전투는 무엇입니까이때 미군과의 전투 협조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답변: 많은 전투를 치렀지마는 아무래도 다부동 전투가 더욱 의미가 특별하지요이 전투가 왜 의미가 있냐 하면사실 그 이전그러니까 1950년 7월 말까지는 우리 국군이 계속 지연전으로 낙동강까지 후퇴만 거듭하다가 여기 다부동에 도착하면서 갑자기 방어전으로 전환하게 된 거거든요낙동강으로 몰리면서 전황이 더욱 불안해지자미군이 한국군을 일본으로 데려가 재편성해서 전투를 치른다는 얘기도 많이 나돌았고 제주도로 옮겨가 최후 항전을 벌일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지요자칫 대한민국이 없어질 뻔한 위기로 그만큼 절박했습니다당시 워커 美 8군사령관은 “Stand or die!”, “2의 던커크(Dunkirk)는 없다고 외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했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사실 그 지명 자체로만 본다면, 1950년 8월 하순국군 1사단 11연대와 미군 2개 연대(25사 27연대2사 23연대)가 함께 대구 북방 약 20㎞의 경북 칠곡군 다부동의 천평계곡(Bowling Alley)에서 북한군의 집중공세를 막아낸 ‘6·25전쟁 최초의 한미연합전투입니다.


하지만일반적으로 다부동 전투라 하면 8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에 걸쳐 국군 1사단이 대구 북방의 328고지-수암산-유학산-다부동을 연한 방어선에서 8사단 10연대 병력과 미군 증원병력을 받아서 남침한 북한군 3개 사단을 극적으로 막아낸 일련의 방어 전투를 말합니다다부동에서 아군은 3,400여 명(국군 약 2,000미군 약 1,300경찰 약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이곳을 지켰습니다반면에 북한군은 약 1만 2천여 명이 사살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물러났지요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낙동강 전선의 최후 교두보를 지켰고종국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했지요그런 만큼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당시 국군 1사단은 다수가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습니다개전 초 많은 병력 손실로 부족한 1사단 병력을 채우기 위해 7월 초 수원에서 사단 재편성 시 당시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5사단 병력을 대거 합쳐서 연대별 편성을 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낙동강 전선에 와서는 신병으로 충원된 병력의 대부분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죠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인 셈입니다그때는 지금 같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부동 격전이 지난 뒤 한번 고지를 올라가 보았는데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너무 많은 주검들이 풍겨내는 냄새 때문이었지요사실나는 사단장이라 전투 최일선까지 일일이 나가 보지 못했지만 부하들로부터 참으로 눈물겨운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그때 같이 싸웠던 일선 중대장 중에 광복군 출신으로 김국주 대위가 전해 준 얘기가 생각납니다.-‘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재일동포 부대원이었다공격을 시도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총에 맞았다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나를 보면서 중대장님먼저 갑니다면서 쓰러졌다웃는 얼굴이었다조국을 지키기 위해 대한해협을 넘어온 재일동포 청년의 마지막 웃음은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부하도 내게 비참한 전투 현장을 말해 줬어요.-‘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질 않았다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다부동전투시 콜린스 美육참총장과 워커

8군사령관에게 전황 보고

다부동 전투 승리 직후

대구 동촌비행장 금호강가에서


각 연대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게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한번은 대구의 육본 고급부관실에서 1사단이 일보를 제때에 제출하지 않아 이를 규명하기 위해 다부동 현장확인 차 중령을 반장으로 한 조사반이 사단에 나왔습니다나는 ’1사단 때문에 종합이 안 된다고 행정규정을 따지는 그들에게 바로 15연대가 싸우는 전투 현장으로 가 보게 했습니다해당 작전지역 대대장은 직접 가서 보시지요라고만 하고 묵묵히 조사반을 270고지로 안내하였다고 합니다그런데고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시체 썩은 냄새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육본 실무자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돌아갔고그 후로는 육본에서 우리 1사단에 일보를 제출하라는 독촉을 하지 않더군요.


8월 하순 다부동 천평 계곡(Bowling Alley) 일대에서 보여준 마이켈리스 美 27연대장과 프리만 美 23연대장의 전투지휘와 협조는 매우 탁월했습니다미군은 명령에 따라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전차와 포병으로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고 우리 국군을 지원해 주었습니다한 번은 우리 국군의 일시 퇴각으로 화를 내기도 했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습니다그때 대령이었던 두 연대장은 후에 모두 대장으로 승진해서마이켈리스는 1971년에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다시 만났고프리만은 그 후 지평리전투의 영웅으로 전공을 세우고 유럽의 NATO사령관으로 다시 만난 인연이 있지요마이켈리스 대장이 훗날 한국으로 부임해 왔을 때 다부동 전투를 회상한 글이 있습니다.- ’당시 미군 지휘관들은 한국군 부대의 전투능력과 지휘관의 능력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있었다왜냐하면언제 한국군 부대와 연합해 싸우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이런 관찰 끝에 우리는 한국군 1사단과 제너럴 백(Paik)의 전술능력전투정신을 믿은 것이었다제너럴 백(Paik)을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내가 다부동 골짜기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질문장군님의 다부동 전투는 익히 잘 알려진 얘기지만 이렇게 직접 말씀을 들으니 더욱 생생하고 가슴이 찡합니다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을 돌파하고 북진을 시작했을 때그리고 38선을 돌파하여 북한 땅으로 들어섰을 때미군과 경쟁하여 먼저 평양에 입성하였을 때의 기분은 어떠하였나요우리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였을 때 당시 평양의 분위기는 어떠하였는지요?


답변낙동강 방어선이 안정을 찾게 된 9월 초순나는 美 8군의 연락을 받고 대구에서 어떤 미군 소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그는 나에게 당신이 제너럴 백(Paik)이냐고 물으면서 자신을 美 1군단장 밀번(Frank Milburn) 소장이라고 소개하더군요그는 2차 세계대전시 美 21군단장으로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상륙하여 용맹을 떨친 역전의 용장이었습니다그의 말은 곧 우리 1사단이 美 1기병사단美 24사단과 함께 자신의 美 1군단 지휘 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그 무렵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무언가 큰 변화가 올 거라고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9월 13, 1사단은 국군 2군단에서 美 1군단으로 배속 변경되었습니다한국군 사단이 미군 군단에 배속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지요.


9월 15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때맞추어 미 1군단 지휘 아래 반격작전으로 적진을 돌파하여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다른 미군 사단은 바로 서울로 진격했지만 우리 1사단은 후방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뒤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수도 서울을 우리도 같이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참 아쉬웠지만 명령대로 가야했지요그렇게 10월에 들어서니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3사단이 1일 날 벌써 38선을 돌파해서 북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우리 1사단은 여전히 청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사단 장병들도 사기가 떨어지고 나도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10월 5대전 충남도청에 있던 군단 지휘소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새로운 작명이 떨어졌는데 미 1군단이 서부 축선을 따라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라는 것이었습니다헌데사단별 작전기동로를 보니까 미 1기병사단은 주공으로 경의선 국도를 따라 진격하고미 24사단은 조공으로 구화리-시변리 축선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가는데우리 1사단은 엉뚱하게 해주-재령을 거쳐 진남포 남쪽으로 빠지게 그려져 있었습니다순간 아찔한 기분이었죠.


나는 여기서 밀리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직접 밀번 미 1군단장을 만나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평양공격에 국군이 빠진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우리 1사단이 선두에 서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밀번 군단장은 나의 당돌한 질문과 요구를 듣고 좀 당황하면서 ‘1사단에 차량이 몇 대나 있느냐고 해요. ‘한 150대 가량된다고 하니까, ‘미군 사단은 차량이 1,000대가 넘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공격 선두에 설 수 없으니 제너럴 백(Paik)의 심정은 이해 가나 양해해 달라고 하네요나는 물러서지 않고 군단장에게 다시 한번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비록 차량은 적어도 우리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걸어서라도 평양에 먼저 들어갈 자신이 있다평양은 나의 고향이다거기 지리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이번 진격 루트가 과거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격한 기동로와 유사하다평양 진격의 선봉에 서도록 해달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기동로 구상까지 그에게 설명했습니다내 말을 진지하게 듣던 밀번 군단장은 결국 결심을 바꾸어 미 24사단의 책임 구역과 맞바꾸도록 지시했습니다그렇게 이미 하달된 작전계획을 전격적으로 변경케 함으로써국군 1사단이 미 제 1기병사단과 치열한 평양 입성 선두 경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적국의 수도공략을 코앞에 두고그것도 이미 다 결정된 미군 사단의 자리를 배속된 타국의 군대에 내어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이 사실은 알게 된 사단 장병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평양탈환 직후 밀번 美 1군단장에게 전황 보고

1950년 10월 말평양탈환기념

이승만 대통령 평양방문 환영대회

그리하여 결국, 1사단에 배속된 고사포단의 차량과 전차까지 지원을 받아 밤낮없이 평양을 향해 강행군 진격한 끝에 우리 1사단은 차량이나 장비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던 미 제1기병사단과의 시이소오 경쟁에서 간발의 차이로 10월 19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이는 대한민국의 땅의 대도시를 타국이 아니라 자국이 먼저 점령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지요뿐만 아니라평양 강서가 고향이었던 나는 유서 깊은 평양의 문화재들이 파괴되지 않도록 사전에 포격을 금지 시키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평양 시가전을 지휘했습니다그 때 평양 대동강 다리를 건너 처음 입성하면서 내 마음에 밀려오는 감회란 참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지요고향을 등지고 혈혈단신 월남했던 일개 청년 장교가 5년 만에 장군으로 1만 5천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여 다시 고향을 탈환하러 진군하게 될 줄이야…내 생애 최고의 날이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질문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올해 6.25 70주년을 맞아 후배 군인들에게 또는 우리 국민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변: 30년 전나는 회고록 軍과 나’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나의 회고는 승리의 기록이라기보다 전쟁의 기록이다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승리하기 위한 교훈이 되기보다는이 땅에서 더 이상의 전쟁을 방지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6·25전쟁이 나던 그해세 살이던 내 큰 딸이 이제 73세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그나마 큰딸은 그 날의 희미한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다른 아이들은 전쟁을 잘 알지 못합니다전쟁을 잊은 세대에게는 먼 나라의 역사 이야기처럼만 들립니다그러나이 땅이 다시 전쟁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오직 富國强兵(부국강병)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지요전쟁의 교훈을 망각지 말고 바로 어제의 일처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그래서크든 작든 나라를 위해 내가 봉사할 수 있는 위치에서 부지런하게 일하는 국민 각자가 되어야 합니다특히국가의 녹을 받고 사는 공직자들은 나라의 公僕(공복)이라는 자세를 잃지 말고 부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이어져 왔습니다다행히 6·25전쟁 이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놀라운 번영을 일구어내었습니다하지만현재 우리가 당면한 국내외적 안보와 외교·정치·경제 상황은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할 수 없는 매우 불안한 현실입니다이러한 시기에 우리 군과 온 국민이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가 쌓아놓은 번영은 하루아침에 사라질지도 모릅니다각계각층의 리더들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고 우리 민족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자각하여 올바로 이끌어 가야만 합니다.

질문마지막으로한미동맹은 6·25전쟁을 통해 피로 맺은 혈맹입니다우리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한미동맹의 중요성 내지는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답변어느새 2020올해로 이 땅에 6·25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언 70년이 되었네요그러고 보니내 나이가 만 100세…이런 날이 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100년 돌이켜 보면 꿈같은 세월이었지요평양의 강서 고분 언덕에서 동네 아이들과 마냥 뛰놀던 코흘리개 시절이 새삼 떠오릅니다지금까지 나의 삶이 오로지 군과 국가와 함께해 왔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하고 내가 걸어온 길에 부족하나마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진정 다시 산다 해도 후회 없는 한평생이었습니다.


특히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관계는 미군이었지요지난 해방 이후 75년간 한미동맹(韓美同盟)의 역사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동서 혈맹의 역사입니다서양인과 동양인이 이렇게 대등한 우방으로서 오랜 세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 온 사례는 한미동맹이 유일하다고 봅니다현재 사드 배치방위비 분담금 등 여러 갈등이 있지마는정책 결정권자들은 항상 지나온 날들을 평가해 보고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앞으로의 100년을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우리와 가까운 일본이 과거 20세기 초 아시아에서 국력이 팽창해 갈 때독일과 함께 가겠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태평양 전쟁에 뛰어들면서 결국 거대한 일본군이 80년 만에 패망한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그간 살아오면서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것은 6·25전쟁 기간 중 수많은 전우의 고귀한 희생과 그 유가족들의 아픔입니다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며우리 대한민국이 번영을 누릴 수 있었지요그런 의미에서 6·25전쟁의 진정한 영웅은 바로 앞서간 전우들입니다이제 나도 머지않아 그분들과 하늘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거기에서도 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먼저 가신 님들의 명복을 빌며 남아계신 모든 유가족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뜻을 드리는 바입니다감사합니다.


70년 전의 6.25의 참혹한 전쟁 상황 속에서 생사를 가름하는 숱한 전투를 치르며 몸소 체험하신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들려주신 말씀들 한마디 한마디가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들이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의 교훈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특히 대한민국을 구하고 반격의 발판이 된 다부동 전투의 승전이야기는 참으로 통쾌하고 감명 깊었습니다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영원히 지켜나가기 위해 장군님이 들려주신 귀중한 말씀들을 영원히 깊이 새겨나가겠습니다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