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유해발굴단

유해발굴단

 

정소성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소설가, 본 협회 편집위원




아침에 부대 막사로 출근했더니 대대장 실로 제1중대장 김 대위가 들어왔다. 

“보고드릴 말이 있어서 일찍 들렸습니다. 대대장님!”

“무슨 보곤가? ”

“열 번 이상 부대를 방문하여 6·25 때 잃은 아들을 찾아 달라는 노인이 있습니다.”

“....”

나는 너무나 뜻밖의 내용이라 무슨 대꾸를 금방 할 수 없었다.

“아들 둘을 조국에 바친 분이시구만…. 그래 두 아들의 유족 상황은 어떠한가?”

“맏며느리는 남편의 시신을 찾는다고 전쟁 중 집을 나간 후 사망통지서가 왔고, 둘째 아들의 부인은 지금 아들과 함께 시부모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 나이는 63세입니다.”

“이 송갑식이 절대로 농사만 짓는 농사꾼이 아니구마. 송갑식이라카는 이름 들어보지도 못했능교?”

“실례지만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송갑식이, 정조대왕 때부터 3백 명 한양 경공장 중 한명이던 규 자 호 자 경공장의 이래뵈도 그 어른의 직계 십대 손입니더. 정조대왕 때 한양에 경공장 3백명 지방에 외공장 5천명이 있었는데, 우리 규 자 호 자 할배는 경공장 중에서도 왕비와 정경부인들만 애용하던 팔찌 목걸이만 만들었습니더.”

“....”

이야기가 너무나 뜻밖으로 흘러 이 넋 나간 듯한 노인의 입을 쳐다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목걸이...우리 맏아들 꺼...우리 며느리 꺼...우리 둘째 아들 꺼...꼭 같은 거...”

노인은 헛소리 같은 말만을 단절적으로 표현할 뿐 구체적인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노인은 똑같은 목걸이 세 개를 만들어 맏아들과 맏며느리, 그리고 형을 찾아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목에 걸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 민원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육군 내에 전몰장병 유해발굴단 같은 기구는 없었다. 따라서 누구 하나 전몰장병의 유해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군인은 전쟁에 나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쟁 때 우리와 함께 싸운 미군의 경우는 우리와 정반대였다.

그들은 단 한 구의 유해라도 찾아내기 위해 주한 미군 전체가, 온 국민이, 정부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모습에 자극을 받은 육군의 일각에서는 우리도 6.25 전몰장병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단안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김대위가 이 노인을 아홉 번이나 돌려보내고 열 번째 나에게 데리고 온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대대장님, 노인이 대대장님에게 전해달라면서 부탁 말을 남겼습니다.” 

“무슨 말이오?”“자기가 사는 산정 2리로 꼭 한번 금명간 찾아와 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드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대대원들의 사기와 전투력 향상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했다. 평화 시의 군 관리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나의 대령 진급은 대대장 근무실적 평가에 의해서 판가름 날 것이다.

그 노인의 민원은 까마득히 머리에서 멀어졌다. 그런 괴상스런 노인도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 어렴풋이 그를 기억할 뿐이었다. 

한주가 가고 월요일이 되었다.

노인의 집은 부대에서 지프로 삼십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흠집투성이가 된 작업대가 한편으로 놓여져 있고, 그것 위에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갖가지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작업대를 비롯하여 모든 연장들, 그리고 방 분위기가 아주 고풍스러웠다.

“먹고 살려고 농장도 만들구마...”

우리는 농장이 들어선 방에서 여기저기 가구들에 걸터앉아 자리를 잡았다.

노인이 전번에 그가 부대에 왔을 때 부대자루에서 슬쩍 보여 주었던 낡아빠진 대학노트를 가지고 왔다. 

그는 막걸리를 한 차례 마시고는, 

“이 공책... 내 아들의 뼈가 묻히 있을만한 땅을 적어 놓은 거구마...특히 큰놈이 전사했다고 통보가 온 영천 보현산 지구를 상세히 적어놨구마...”

“....”

나와 김대위 안중위는 기가 차서 무슨 말인들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깨달음이 우리의 뇌리를 때린 것이다. 

군인은 어떤 기막힌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 군인은 오직 적을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한다. 

얼마 전 가까이 지내던 배 중령이 권총 자살을 했는데, 나는 그의 자살 이유를 누구에게든 말하지 못했다. 나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하지만, 나의 확신은 어디까지나 나의 심증에 불과한 것이다.

검은 상복을 입고 하염없이 울어대는 배중령의 부인에게 무슨 이야기든지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배 중령과 나는 2년 전 동기생 일차 대령 진급 5명에서 누락되었고, 올해 2차 진급에서 또 누락되었다. 

누구보다 확고한 조국애로 무장되어 있고, 누구보다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상부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미망인에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동기생인 배중령의 뼛가루를 국립묘지에 묻던 날 대령 진급의 희망을 포기하였다. 대령이건 중령이건 장교묘역에 묻히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장군묘역으로 못갈 바엔 조바심낼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달랬던 것이다.

그러나 대대장인 나에 대한 부하들의 충성심은 여전했다. 이것이 군에서 군소 지휘관을 하는 긍지인지도 모른다. 전시가 아니라서 그렇지 전투 시라면 전 부대원들은 적 궤멸을 위한 공격과 더불어 나의 생명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윤 중령, 축하하네. 유해발굴단장으로 전보 발령이 내려왔네.”

“네?...”

“이번에 육본에서 6.25 유해발굴단을 새로 발족시켰어. 벌써부터 논의가 되어오던 사안이었지. 드디어 결실을 본 거야. 그 초대 단장으로 윤중령이 발탁된거야. ”

“축하?...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축하한다니 우선 감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핏 생각해도 그것은 축하할 일이 못 되었다. 보병대대를 지휘하던 일선 대대장을 육군 방계 사업 부대로 보낸다는 것은 분명한 좌천이었다.

연대장은 나의 군사대학 동기생이었으나, 그가 대령이 되고 나서 그리고 더욱 나의 직속 상관이 되고 나서 두 사람 사이의 말투부터 달라졌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당해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대령과 중령이 한 계급 차이지만, 그 역할이 너무나 달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휘관이다. 그것이 군이다. 군의 생리이다. 진급하지 못하는 군 지휘관은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것이다.

절망감 속에서 온종일 나의 집무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점심 먹으로도 나가지 않고 부관에게 배달하라고 했다.

나는 캐비넷으로 가서 권총에 손을 댔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군의 생리에 너무나 철저했던 죄밖에 더 있었나. 그러나 지금 나에게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은 없지 않은가. 나는 권총에서 손을 뗐다. 유해발굴단...으음...

“우리에게는 삼백만 원이 넘는 종신 연금이 있어요. 너무 좌절하시지 마세요. 내가 뭐라도 할게요.”

절망에 떨어졌으나 내면을 숨기고 있던 남편의 심중을 알아차린 아내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남자로서의 꿈이 사라지는 지금, 적은 금액의 연금으로 연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배중령의 죽음은 바로 나의 것이었다.

“대대장님, 육십만 대군 중에서, 십개 군단과 50여 개 사단병 중에서, 온 국민이 열화처럼 원하는 일을 대대장님께서 처음으로 뽑혀 책임을 맡으셨다는 사실에 대해 대대장님을 보필하는 저희들로서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김대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전시라면 온 몸을 던져 저의 몸이 산화하는 한이 있어도 대대장님을 지킬 것입니다.”

국방부는 우리 조직에게 179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발굴단은 발굴반과 감식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부분이 유해발굴반이고, 감식반에는 DNA전문가 다섯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어서 인력부족 상태이다.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방부는 각 사단별로 발굴반을 조직하여, 우리 유해발굴반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했다.

김대위는 3개월간 몸무게가 5킬로 빠져 버렸다.

“김대위, 무리하지 마시오. 우리의 전투는 장기전이요.”

“중대장으로서 한 사람의 사병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긴 휴전선 전장은 아니잖소!”

“우리의 전선은 전국 모든 산하에 퍼져 있습니다. 전투지구가 너무 넓습니다. 그러니 더 힘이 듭니다. 두 개 중대를 잃고 오직 한 개 중대밖에 지휘하지 못하시는 대대장님을 위해 목숨 바쳐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김대위...”

그의 어깨를 잡은 나는 두 눈이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6.25 전쟁으로 인한 남한 측 사망자는 대략 50만 명으로 계산되고 있고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80만 명 선이다. 이중 군 사망자는 13만8천 명이고 실종자 2만여 명으로 대략 16만 명으로 본다. 학도병 2000명, 청년단을 포함한 경찰관 3800명도 포함된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3개월 후부터 발굴반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유해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국군 16만 명과 미군 5만 8천 명이 묻혀 있을 것이기에 땅만 파면 유해가 쏟아질 줄 알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연적인 변형, 즉 홍수와 사태 그리고 강줄기의 변형으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어려운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는 2년 정도 일을 해보고, 나름대로의 통계수치 같은 것을 세울 수 있었다. 하루에 평균 한 두 개의 유해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려면 백 번 이상 발굴작업을 시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백 번이라 함은 물론 우리 발굴단을 비롯하여 전군 모든 사단에서 시행하는 발굴작업을 망라해서 하는 말이다. 발굴 첫해 34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꽤 여러 해가 흐른 지금 대략 3,000여 구의 유해를 발견했다. 

하지만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불과 46구에 지나지 않는다.

최첨단 과학적 방법이라 하여 유가족의 DNA 검사용 혈액표본을 6700개 수집해 놨지만, 유해 신원 확인 46구 중에서 20구만이 이 방범으로 확인되었을 뿐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군의 존엄과 위신을 내리깎는 한 가지 내용을 밝혀야겠다.

오늘까지 3천여 구의 유해를 발견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어떤 첨단과학적 방법보다도 송 노인이 남긴 그 낡은 대학노트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우리는 한국전쟁사에 의존하고 현지인들과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지만, 정말 막막할 때가 더 많다. 

그럴 경우, 언제부터인가 김대위는 그 대학노트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송노인, 정말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휴전하고 56년간 남한 땅 온천지를 쏘다녔다는 이야기인데...그것이 정말 가능했을까...”

“아들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였겠지요. 각 지역마다 노인이 찾아낸 유해의 숫자까지도 적혀 있습니다. 노인의 주안점은 유해의 목에 걸린 푸른색 목걸이였습니다. ”

“뭐가 있나? 김대위 내가 특별지시한 것은 어떻게 되었나? 별무효과라면 나도 내일부터 삽을 들고 산야를 뒤적이겠네.”

“푸른색 목걸이를 한 유해 말입니까?”

“물론이지.”

“기왕에 말씀드린 것 이외에는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형인 필구의 군번을 추적한 결과 그 소속 부대가 금호강의 지류인 자천강 주변에서 적과 백병전을 벌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필구의 시신도 그 현장에서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전사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는 이 자천강 변에서 여러 개의 목걸이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인민군들의 것이라는 판단이 서길래 단장님에게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가장 치열했던 영천 전투 중에서 보현산 전투는 특히 백병전이 많았다구. 김용배 대령(6.25중 국군사단장은 대령계급)의 5사단이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면서 끝내 영천 탈환을 이룩한 것은 대구 사수의 지렛대였어.”

“단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라”

6·25 때 국군 모 사단 모 대대는 청진까지 치고 올라간 최선봉 부대였다. 청진 점령을 눈앞에 두고 후퇴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퇴 길은 함흥에서 막혀 버렸다. 함흥 아래는 벌써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함흥에서 미군 후퇴 선박을 타고 강릉까지 내려와 다시 태백산맥을 넘어 원주를 거쳐 영천으로 왔다. 잠시도 눈 돌릴 사이가 없는 강행군이었다. 8백 명 대원들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치악산 전투에서 대원을 또 백 명 정도 잃었다.

어둠으로 막혀버린 경북 영천시 자천강 변에 소속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의 부대와 비슷한 꼴을 한 부대가 와서 진을 쳤다. 진을 친 것이 아니라, 그냥 와서 모랫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자신들만큼이나 긴 행군을 한 부대인 듯했다. 아니 자신들보다 더한 무기력 상태인 것 같았다.

두 부대는 조용하다 못해 어둠의 장막에 깔려버린 듯 쥐죽은 듯 적막했다.

취사병들만이 어렴풋이 움직이는 듯했다.

마침 비가 쏟아져, 어설프게나마 천막을 치고는 다들 막사 속으로 들어가 꿈쩍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밤중 3시경이었다. 늦게 도착한 부대에서 부대원 한 명이 기왕에 진을 치고 있던 부대의 막사로 왔다. 취사병인 듯 총 대신에 무슨 깡통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동무, 동무, 자나? 무스기 부대디? 우리래 XXX 부댄데 거 고추장이나 된장 좀 남은 거 있지비?”

“아니 이 새끼들, 인민군 놈들 아냐!”

막사의 입구쯤에 자고 있던 국군 병사 한 명이 놈을 향해 M1을 갈겼다. 적병은 즉사했다. 두 막사 진영에서는 전 부대원들이 그제서야 나란히 하고 한밤을 보낸 두 부대가 적군임을 알아차렸다. 총을 쏠 겨를이 없었다. 대검을 빼어들고 그냥 엉겨붙은 것이다. 필사의 살육전이다.

“필구의 전사 장소가 바로 보현산 아래 자천강 변이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진이가 거의 형의 부대가 주둔한 곳 근처까지 접근했다가, 적병에게 사살된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강변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적였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노인이 남긴 비슷한 목걸이를 발견했습니다. 적병의 유해가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라 의심의 여지 없이 인민군의 유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발굴반을 금호강 줄기인 자천강 변으로 급파하여, 한 달가량 전에 되쓸어 묻은 유해들을 재발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삽과 붓을 들고 발굴 현장으로 달려갔다. 삽으로 발굴된 유해는 부수어질까 봐 붓으로 흙과 녹을 떨어낸다. 

군을 떠나기 전에 그 노인의 소원을 풀어주어야만 한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래야만 죽은 배중령을 저승에서 그래도 조금은 떳떳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 용기가 없었던 자의 변명이라도 있어야만 하지 않겠나.

그러나 참으로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강이나 바다에서 잡았다 놓친 고기라 해서 다시 잡기에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결국 그 푸른색 목걸이를 재발굴하지 못하고 군을 제대하고 말았다. 

자천강 유해 재발굴 소문이 퍼져 지역주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 차 발굴에서 노친 유족들 중에는 재발굴 과정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해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울음이 터지고 강변을 뒹굴고 야단이 벌어졌다.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절망을 안고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뿌리면서 군문을 떠났다.

“대대장님, 내일부터는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내일? 할 일이란 없어...”

하지만 나는 내 목에 걸려있는 노인의 녹슨 청동 목걸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넝마 같은 부댓자루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 안에는 야전삽과 낡아빠진 대학노트 몇 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영원한친구들 256호(2020년 7월호 중)


*정소성

서울대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대학 수학(불문학박사)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천년을 내리는 눈><바람의 여인> 등 정소성 문학전집 33권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