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군인 중의 군인, 보병 중의 보병 한국전쟁의 덕장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군인 중의 군인, 보병 중의 보병  한국전쟁의 덕장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최상진

수필가, 본 협회 편집위원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This is a letter of to an army wife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아들 지미가 동료들을 대변해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출격 전 어머니 헬렌에게 보냈다.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자원해서 전투 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 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기수)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지미 올림" 


아버지 밴 플리트는 한국전에서 지상군을 총괄 지휘하는 현직 8군 사령관이며 아들이 참전할 때부터 애간장을 태운 어머니 헬렌에게는 결혼 10년 만에 얻은 외동아들이었다. 또 지미는 2년 전 Lewis와 결혼하여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있었다.


밴 프리트 장군과 아들 지미는 한국전쟁의 발발 소식을 휴가차 떠난 아프리카 케냐에서 듣는다. 그는 세계 1, 2차 대전의 영웅으로 엘리트 군인 가문의 후예답게 한국에 가서 한 번 더 싸워야 하겠다고 다짐했고 아들 지미도 ‘아버지가 가신다면 저도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지미는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잘 생기고 멋진 남자로 이름이 나있었으며 성적도 우수하고 자기의 관심사에는 몰입하는 타입으로 특히 항공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그는 육사를 졸업 후 공군을 지원해 공군조종사가 되었고 한국전에는 B-29 폭격기조종 임무를 부여받았다. 




밴 플리트 장군, 아버지와 아들



1952년 3월 19일, 지미는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의 60세(환갑) 생일날 아버지 숙소를 찾았다. 그는 이미 그리스 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어 굳이 전쟁터에 나설 이유가 없었는데 자원해서 참전한 것이다. 지미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아버지와 사냥하던 추억, 회갑 때 커다란 케이크를 자르고 어깨동무하며 느낀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간직하며 4월 4일 오전 1시 5분 출격한다. 폭격지점은 평양 부근의 순천. 순천은 신의주와 만포진, 중강진을 건너온 중국군의 병력과 물자가 집결하는 곳으로 중국군의 최고 병참기지였다. 25세의 지미는 한국에 도착 후 군산 공군기지에서 3차례의 동반 폭격훈련을 받고 첫 단독출격의 명령을 받았다. 순천의 방어는 어느 지역보다 철저했다. 대공포가 즐비하고 소련 미그 전투기가 미 폭격기의 접근을 막았다. 그 날따라 안개가 짙게 내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야밤, 임무 수행이 여의치 않아 고도를 높여 새로운 표적을 찾아야겠다는 연락을 끝으로 더 이상 지미의 교신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때 시각은 03시 30분, 지미 밴 플리트 Jr 중위는 예정시간에 귀대하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아군 지역 밖인 적지에서 수색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임스 A 밴프리트 대위 흉상

(오산 공군기지)


밴 플리트 사령관의 고심은 컸고 고뇌는 더 깊어갔다. 비록 강건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한국전 지상군 최고 사령관이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아픔은 너무나 컷다. 고향에서 아들의, 남편의 무사귀환만을 기도하는 어머니 헬렌과 아내 루이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公私(공사)가 철저했던 밴 프리트 장군은 중요한 결단을 내려 지미의 수색중단을 정식으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요청한다. 그의 아들만이 한국전에서 실종된 것이 아니었기에 특별한 대우를 원치 않았고 지미가 한국전에서 희생당한 14만명 이상의 사상자와 같이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았다. 그는 비통한 마음으로 실종 병사들의 가족에게 부활절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 하고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2년 후인 1954년 3월 31일 제임스 A 밴 플리트 대위는 사망으로 처리되었다.


밴 플리트는 후일 지미가 근무하던 군산 덕구 비행장을 찾아 아들의 사물함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아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국땅에서 남의 귀한 자식들을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으로서 자식을 잃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한국군 장교들의 질은 예측할 수 없어, 국군 현대화에 앞장서다.


1949년 7월부터 남한의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은 “북한군이 6월 27일 서울을 최초로 점령한 후 한국군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하여, 10만 명의 병력이 2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많은 병사들은 옷만 갈아입으면 갑자기 민간인으로 변했고 피난민 대열에 합류했다. 처음부터 한국군의 전투능력은 천차만별이었고 예측이 불가했다. 특히 장교단을 양성할 시간이 부족했고 한국군 장교들의 질은 많이 떨어진다.”라고 회고했다. 믿고 싶지 않은 당시의 현실을 날카로운 종군기자들은 미국이 한국군을 뒤늦게 훈련시키고 알량한 군장비(무기)를 제공해 주었으며 더더욱 갈팡질팡하는 외교정책으로 1949년 미군 철수를 감행함으로써 자승자박의 화를 자초하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전쟁 초기 맥아더 장군도 리지웨이 장군도 월턴 워커 장군도 군대의 형성과 교육, 훈련의 필요성은 절실했으나 시간적, 물리적 여건을 마련하지 못했다. 밴 프리트 장군은 부임 후 한국군 수뇌부와 동부전선의 한국군 부대를 시찰하여 한국군의 강인한 투지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4월 22일 밤 공산군의 춘계공세로 한국군 제6사단이 대패하고 5월 16일 팽덕회에 의해 국군 3군단이 와해되자 기강확립 차원에서 3군단을 해체하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한국군 장교 및 하사관단의 리더십 계발을 강하게 주문하였다. 그  또한 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파악하고 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 한국군 재건을 위해 교육총감부와 각종 군사학교를 설치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고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 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4년제 정규과정을 도모하였다. 지역별 모병을 실시하고 미 군사고문단의 장교들로 하여금 체계화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군의 취약점인 장교들의 리더십 교육을 위해 ‘52년 한국군 보병장교 150명과 포병장교 100명을 미 보병학교 및 포병학교에 연수토록 조치하였다. 


한편 한국정부의 10개 사단 추가 창설 안과 한국군 해병대 증편 등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미국의 많은 도움을 주선해 주었다. 1954년 7월 28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밴 플리트 장군의 국군 정예화와 현대화의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칭송하고 아시아 최강의 반공 군대를 만들 것을 약속한다.


대기만성의 덕장 밴 플리트


 백선엽 장군 회고에 의하면 밴 프리트 장군은 맥아더나 워커, 리지웨이와 달리 인간적인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항상 주머니에 초콜릿이나 과일 등 간식을 가지고 다니며 상대방에게 권하는 친절을 보였고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군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여 식사자리를 자주 만들곤 했다. 


그는 1892년 3월 19일 미국 뉴저지주 코이테스빌에서 태어나서 1911년 아버지의 권유로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부터 약 130년 전  밴 플리트 장군의 탄생 후 반세기에 걸쳐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사상대립에 의한 국지전과 내전으로 군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 영웅이 탄생하고 군인 출신 정치가가 등장하는 이른바 전쟁의 세기였다. 졸업 당시 밴 플리트는 별이 쏟아지는 동기생 대열에 서지 못했다. 후일 5성 장군(원수)으로 제34대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미국 합동참모본부 초대의장 오마 넬슨 브래들리가 동기생이었고 한국전 당시 전임 8군사령관 이었던 리지웨이는 웨스트포인트 2년 후배였다. 


아이젠하워와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그는 1944년 6월 D-day 제8보병연대를 이끌고 유타 해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그런데도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샬의 오해(동명이인의 알콜 중독자와의 혼돈)로 승진이 보류되었다. 아이젠하워는 바로 수정건의를 올렸다. 평소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지 않는 밴 플리트에게는 고마운 동기생이었다. 마샬은 편견이 사라지면서 별을 단 3군단장으로 고속 승진하게 된다.


두 번째는 아이젠하워가 1952년 12월 미 제34대 대통령 당선자로 전시현장을 방문했다. 이미 미국의 여론은 한국전쟁이 이득보다 손실이 많은 잊혀져가는 전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보일 때였다. 아이젠하워는 공식 석상에서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의 근무지를 물었고 전방에서 후방근무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모두가 아들의 안전을 위한 대통령의 특별청탁으로 간주하고 의아해했다. 더욱 아들 지미가 실종된 상태에 있는 밴 플리트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아이젠하워는 조용히 말한다. “내 아들이 전투에서 사망한다면 슬프지만 가문의 명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존이 포로가 된다면 적은 내 아들을 두고 흥정을 할 것이며 나아가 국가이익에 반하는 잘못된 결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태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저의 건의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동기생 상관의 건의는 받아들여졌고 두 사람은 현재 자기의 위치에서 올바른 판단으로 최선을 다함으로써 서로의 우정을 지켜나갔다.


밴 플리트가 부임할 당시 한국 전황은 중공군의 5차 공세 즉 춘계 1차 공세가 감행되던 시점이었다. 일단 지평리 전투에서 승기를 잃은 중공군이지만 약체의 한국군을 집중공격, 연합군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서울 재탈환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어 피아의 희생은 더 늘어났다.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했다.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전술로 포병의 탄약 통제 보급률을 5배로 늘려 거의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함으로 적의 공격을 초토화하는 것이다. 중공군 제5차 공세가 저지되고 유엔군이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자, 밴 플리트는 그 전공을 인정받아 1951년 7월 31일 자로 드디어 대장으로 승진한다. 


그는 군인으로 정치를 하지는 않았다. 오직 승리만을 위한 우직한 신념으로 1951년 중반에는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는 맹조의 발톱 작전을 기획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휴전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역의 길을 택한다. 동기생이 대장의 신분이 되었을 때 연대장 대령으로 병사를 훈련시키던 밴 플리트는 내면의 굳은 신념으로 스스로를 지켜 육군 4성 장군의 대장의 반열에 오른 대기만성의 장군이 되었고 1953년 3월 31일, 38년의 찬란한 군인의 길을 마감한다.


장군께서는 군인 중의 군인이시며, 보병 중의 보병이십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절대 반대, 고집스러운 신념은 한미방위조약 체결이란 영구보험을 탄생시켰다. 그는 이 대통령을 존중했고 형님처럼 잘 모셨다. 그는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고국으로 돌아오는 우남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운구 행사를 주관했다. 


6.25 70주년을 맞은 아침, 비록 가까운 전적비를 찾지는 못하였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을까? 


밴 플리트 장군은 은퇴 후 고향 플로리다로 가서 작은 목장을 경영하며 그의 집무실을 “한국의 방”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한국은 나의 고향,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라고 평소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가 일구어 놓은 대한민국 국군, 육군사관학교, 육사도서관, 코리아 소사이어티, 고아원과 고아들,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는 한미재단, 제주도 감귤까지 전쟁의 승리는 물론, 한민족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기에 고마움이 더 한 것이다.


밴 플리트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자랑스러워했고 1988년 올림픽 개막식에 꼭 참석하고자 했다. 그해 나이 96세, 장거리 비행이 위험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며 안타까움을 삼켜야 했다. 그는 100세를 맞는 1992년 3월 19일 생일축하 기념식에서 그를 따르던 옛 부하들이 남긴 헌사의 제목은 “장군께서는 군인 중의 군인이시며, 보병 중의 보병이십니다”였다. 위대한 군인에게 보내는 큰 박수였다. 장군은 같은 해 9월 23일 꿈 꾸듯 세상을 하직했고 손님들에게는 아이스크림이 대접 되었다.


※ 관련 칼럼은 https://kafs.or.kr(한미우호협회, 영원한 친구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