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University of Iowa Hospital 기억 호출

University of Iowa Hospital 기억 호출


김양진

 ㈜대성이엔지 전무이사 


University of Iowa Hospital 전경 사진


 필자는 22년 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University of Iowa MBA (Henry B. Tippie School of Management)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30대 중반을 진입하는 시점에 결단을 미루게 되면 나에게 영원히 유학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결국 장도의 여정을 내디뎠다. 그 결단 이면에는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세상살이에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 있게 모든 일에 대처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인생의 모든 패가 결정되지 않은 젊은 시절 호기는 낭만에 가깝다. 어떤 이는 삼십 대 중반이면 인생의 패가 결정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인생을 길게 보기로 생각하였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수하였다. 


그때는 1998년 겨울 눈보라가 심하게 내리치는 12월 23일 아침이었다. 그 전날 12월 22일 저녁, 배가 산만하게 부른 아내를 보며 내일 병원에 가서 출산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약간은 방심을 한 채 저녁 12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는 둥 마는 둥 하였지만 아내가 아침 6시 10분 경 나를 깨우면서 산기가 있다는 말을 하였다. 예상보다 산기가 빨리 찾아왔던 것이었다. 남자인 나에게 그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비상상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30대 중반에 미국이라는 땅에 온 지 갓 4개월 남짓 지난 시점, 아직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나는 어떻게 하든 빨리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이 나의 책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나는 남편으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서둘러서 병원에 갈 생각만 하였다. 아내 출산 물품과 몇 개의 가방 그리고 4세 큰딸(수연)을 깨우고 나갈 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다. 그 날 밖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나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최대한 기민하게 움직이면 큰 문제 없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 아이오와시티(Iowa City)는 밤새 20cm 정도의 폭설이 내렸다. 가족이 있는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아파트형 2층 기숙사에서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나서니 간밤에 눈이 엄청 많이 왔구나, 가는 길이 쉽지는 않고, 시간이 생각보다 좀 더 걸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동시에 갑자기 산기가 빨라지는 아내를 보며 그때부터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바짝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예정보다 좀 시간이 더 걸리는 정도이니 정신만 바짝 차리면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이 좀 더 많은 편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현관을 나서서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Mercury Sable 승용차 문을 열고 아내와 딸을 뒷자리에 태우고 시동을 켠 다음 출발을 하기 위하여 와이퍼를 움직여 시야를 확보하려고 하였는데 와이퍼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 차량 전면 유리에 쌓인 눈을 치우려 보니 너무 어이없게 눈이 단단히 얼어붙어 손으로 쓸어내려도 꼼짝도 하지 않을 만큼 꽁꽁 얼어 있었다. 차량 유리에 쌓인 눈과 얼음의 두께만 해도 대략 5c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엎친 데 덮친다고 하였던가? 촌각을 다투며 빨리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할 상황에서 차량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번쩍 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였던가? 꿩 잡는 것이 매라고 하였던가? 얼음을 깨고 출발한다는 생각 대신, 차량 유리를 통하여 시야 확보를 포기하고, 내가 운전석 옆 창문으로 고개를 빼곡히 내밀어 시야를 확보하여 운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운전을 한 경험이 없었고 위험천만한 운전방법이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이때 나는 순간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의 모습을 보며 이러다 가는 혹시 병원 가는 도중 차 속에서 출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상황은 그 당시로써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상 불허의 상황이었으나, 불안감과 책무감이 교차하며, 어떻게 하든 최악의 상황을 회피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안전하게 출산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여러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운전석 옆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차창 옆으로 내밀고 오른쪽 한 손으로 운전을 하여 4km 떨어진 University of Iowa Hospital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7시 10분이었다. 병원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리어 본능적으로 외쳤다. “Help me! Help me!”. 이런 영어는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때 쓰는 표현인데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때 근처에 있는 어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근처의 간호사를 모시고 나왔다. 간호사는 아내를 보자마자 병원에서 환자 이송용으로 사용하는 이동식 간이침대를 가져와 아내를 태워 눕히고 급히 산부인과로 뛰듯이 밀며 이동하였다. 



필자와 아내(이혜경 전 서울시의원), 두 딸

나와 큰 딸은 그 간호사를 뒤따르며 겨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응급상황인지라, 당시 의사선생님은 간호사와 무언가 의학적 용어를 주고 받더니 곧바로 출산준비를 지시하였다. 단 1분의 여유도 없이, 보호자에게 설명할 기회도 없이, 출산준비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 만큼 출산이 임박한 것이었다. 나와 큰 딸도 출산실에 같이 따라 들어갔다. 나는 한 손으로는 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는 진통을 시작한지 불과 5분도 안되어 둘 째 딸을 출산하였다. 병원에 아무 일 없이 도착하였을 때 어느 정도 안도감은 들었었지만 둘 째 딸을 안으면서 모든 긴장이 한 순간에 풀렸고, 둘 째 딸의 숨가빴던 출산과정도 순조롭게 끝났다. 이 후 약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씨티은행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University of Iowa 대학교 및 소속 Hospital에 어느 정도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가 미국에 나보다 2개월 늦게 입국하여 University of Iowa Hospital에서 출산 전까지 4차례 정도 산모 진찰을 받았다. 그리고 출산 전 과정 및 출산 후 한 차례 더 진찰 의료서비스를 받았다. 이 모든 의료서비스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병원이 나에게 청구한 금액은 $670 이었다. 우리 돈으로 80여만원 되는 돈이었는데 이는 한국에서 출산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비용이 저렴하였다. 물론 당시 나는 학교에서 권장하는 보험에 가입한 상태이었지만 미국에서도 우수한 초대형 의료기관에서 탁월한 의료서비스를 받고 그 정도 비용만 지불한 것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부채의식이 남아 있었다. 또한 학교에서 Teaching Assistant 및 Research Assistant로 3학기 근무하며 받은 혜택에 대해서도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Email을 통하여 University of Iowa Hospital 및 대학이 Corona Virus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기부(Donation)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재정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20여년 전 우리 가족에 훌륭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둘 째 딸이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한 Hospital 및 유학생활 시절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대학교에 각각 일정 금액 기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즉각 시행을 하였다. 

이 기부로서 모든 부채의식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 편으로 짐을 조금 덜었다는 홀가분함 및 선의를 선의로 돌려주었다는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미국 대학의 동문관리 (Alumni Management)는 한국보다 월등히 앞서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학교의 다양한 News를 Email을 통하여 제공하고 동문으로서의 소속감을 잃지 않도록 관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미우호협회지에 미국생활의 경험담을 쓰며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여간해서는 꺼내기 쉽지 않은 미국에서의 기억을 호출(Memories collected)하게 되어 한편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뮤지컬 Cats의 유명한 Memory라는 노래의 가사 중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가사가 있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 추억 다시 살아나게 해주세요.”


Memory 

All alone in the moon light

I can smile at the old days

I was beautiful then.

I remember the time I knew what the happiness was.

Let the memory live again


추억이여, 달빛 아래 혼자서

전 옛날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어요

전 그때 아름다웠어요

기억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던 때가

그 추억, 다시 살아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