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 인생의 첫 멘토

내 인생의 첫 멘토

조 은 별

이야기 그림 작가

Binghamton 대학, Art History 전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학교에서 이 시를 배울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겨우 중학생이니 의미를 짐작하는 것조차 힘들었지요. 그저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말을 받아쓰고 잘 외워서 시험에 좋은 점수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모른 채 외우기만 잘해도 점수는 비교적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늘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과학상상화 그리기>. 과학상상화 그리기가 숙제로 나오면 그날은 인터넷 검색창이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과학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상상화는 무엇인지. 지난해 우승한 그림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검색하다 보면 정작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었죠. 그래서 국어점수는 좋아도 미술점수는 실기점수는 늘 ‘아름답다(美)’로 끝나곤 했습니다. 


엄마는 간혹 아름다운 점수를 받아오는 저에게 미술(美術)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점수를 받아왔다며 놀리곤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창의적이지 못한 미술은 잘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늘 미술 시간에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아버지가 미국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고등학교를 미국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처음 미국에 정착한 곳은 뉴욕주의 롱아일랜드 제리코 지역이었고, 저는 제리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리코는 성경의 여리고를 말하는데,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학교도 유대교 명절에는 함께 휴일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9월 학기부터 시작이었는데, 제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시기는 2월이었습니다. 학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 수업이 진행되는 중에 갑작스럽게 수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 수업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영어로 수업을 하기도 어렵고, 수업의 형태가 다른 것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등교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미술 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


수업에서 미술 시간을 확인한 날부터 2~3일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에서처럼 선생님께 혼이 나면 어떡하지, 그림을 못 그린다며 처음 보는 친구들 앞에서 면박을 주면 부끄러워서 어떡하나…. 걱정이 너무 많아서 하루 전에는 잠을 설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벌써 9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 밤의 긴장이 가끔 생각나곤 합니다. 








제리코 고등학교 첫 번째 미술

수업 그림– 자화상(목탄,연필)


학교에서의 첫 미술 시간은 ’사진을 보고 얼굴을 그리기‘ 였습니다. 다들 휴대전화 안에 찍힌 본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해본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목탄과 연필, 지우개만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니 커다란 종이가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그때 미술 선생님이 저에게 ’그저 보이는 대로 그려 보라‘고 하면서 연필을 쥐여 주었습니다.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손바닥만 한 사진 속의 얼굴을 큰 화폭에 가득 그리는 것은 조금 어렵긴 했지만,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면 된다고 하시니 그 말대로 했습니다. 저를 격려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는 말 한마디였습니다. 그렇게 첫 수업이 지나고, 한주 후에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밑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목탄으로 색을 입히는데 선생님이 뒤에 오시더니 감탄사를 연발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동양에서 온 작은 소녀를 격려하시는구나 생각했는데, 잠시 후에 다른 선생님들을 모시고 와서 ’우리 학교에 그림 그리는 천재‘가 들어왔다고 칭찬이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친구들도 제 그림을 보고 칭찬과 격려를 하며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선생님은 제가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칭찬을 거듭하셨고, 제가 그린 그림을 미술대회에 출품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17년의 인생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얼떨떨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한국에서 배웠던 것처럼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yes’를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공연히 창피만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컸습니다. 


그렇게 그림을 가져가고 한 달쯤 후,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제 그림이 뉴욕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대회에서 2등 상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골드는 아깝게 놓쳤고, 실버 키를 받았다며 축하를 받으면서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겨우 이런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고?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며 저는 자존감이 아주 낮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미술 시간은 이제 고역이 아니었죠. 미술 시간에서 받은 칭찬의 힘으로 다른 수업시간에도 조금씩 당당해졌으니까요. 집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고 미술 선생님과 작별을 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저에게 뉴욕의 유명한 디자인 대학을 가면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셨습니다. 저도 그림 그리는데 흥미가 생겨서 부모님께 상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제게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네가 그린 그림은 있는걸 그저 보고 그린 것뿐인데, 창의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아니니? 천재적인 아이들이 오는 디자인 학교에 가서 힘만 들지 않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고, 다시 또 자존감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하며 저는 디자인 대학은 가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시면서 엄마한테 꼭 이 이야기를 전하라고 하며 단호하게 얘기하셨습니다. 


‘누구나 보고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똑같이 보이게 그리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손바닥만 한 사진을 보고 큰 화폭에 똑같이 보이게 그리는 것 자체가 창의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했더니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엄마도 한국식 미술교육을 받아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창작해야만 그것이 창의력이라고 생각했다며, 한국에서 미술 선생님께 미술점수를 잘 못 받아서 너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앞으로는 그런 편견 없이 대하겠다고 하며, 무엇을 하건 너를 지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과 연관된 일을 하고 싶어서 일찌감치 학과도 결정했습니다. 저는 뉴욕주립대학에서 ‘art history’를 전공했고, 힘들고 어려운 학문이지만 행복하게 공부했습니다. 







빙햄턴 대학 교정에서, 한국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을 기획했습니다. 개인의 이야기가 모여서 사회의 이야기가 되고, 사회의 이야기가 모이면 나라의 역사라고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기억하고 보존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물여섯의 저는 ‘이야기 그림 작가’가 되었습니다. 









빙햄튼 뉴욕주립대학 졸업식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한국에서 미술 시간에 혼이 나던 학생이 미국에서의 첫 미술수업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되었을까요. 저는 변한 것이 없는데,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능을 눈여겨보는 선생님이 계셔서 저의 숨어있던 가능성을 발견해준 것은 아닐까요. 한국의 학교에서는 모든 것을 잘해야 우등생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하나의 장점만 있어도 그 장점이 저를 우수한 사람으로 대접해주고, 그렇게 대접받으니 다른 과목이나 분야에서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자존감을 키워주는 선생님이 많이 계셨네요.


11월에 있을 전시를 앞두고 그림 작업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만약 그때 미국에서 처음 만난 미술 선생님이 저의 내면에 흐르는 ‘그림에 대한 창의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거의 10년 만에 우연히 김춘수님의 <꽃>을 읽다가 갑자기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꽃’이라 불러주셨기에 아니 ‘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기에 제가 이렇게 멋진 ‘꽃’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오늘은 선생님께 감사의 메일을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