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광성보와 신미양요

광성보와 신미양요

서 상 욱



 강화도는 황해에서 서울과 경기도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로의 입구이자, 서울에서 황해로 나가는 수로의 출구이기도 하다. 이 섬의 역사를 제대로 느끼려면 깊은 호흡이 필요하다. 고려와 조선이 정치적 중심을 개성과 한양으로 정한 이후 강화도는 외침과 무관하지 않았다. 강화도는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으면 저항의 중심이었으나, 바다를 통한 외침이 있으면 첫 번째 공격의 대상이었다. 몇 차례 반복된 들숨과 날숨은 우리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강화도의 곳곳에 남은 역사의 흔적은 물론 북단에서 바라보는 분단된 북녘의 지금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16세기 말~17세기 초, 아시아의 통화팽창은 세계적인 상업화와 화폐화에서 기인했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이미 세계는 하나의 사회경제체제를 이룩했고, 상업화에 대한 불만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100~200년 전, 상품시장권이 확산되지 않았을 때의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던 소박한 생활을 그리워했다. 17세기 초에 편찬한 어떤 중국의 지방지에서는 홍치(弘治)시대(1488~1505)의 안정적인 도덕적, 경제적 생활과 가정(嘉靖)시대(1522~1566)의 사회적 혼란과 와해가 진행된 현상을 비교했다. 전자에서는 주택과 농지가 충분했기 때문에 도적도 사라졌다. 후자에 이르면, 재산의 주인이 자주 바뀌었고, 물가가 불안했으며, 빈부의 차이가 커지자 시장은 복잡하고 혼란해졌다. 


17세기 후기로 진입하자, 정황은 더욱 악화됐다. 아시아 백성의 대부분이 파산하고, 극히 일부의 부호들만 재산을 배경으로 호사를 누리며 어려운 사람들을 부려먹었다. 천지간에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한탄이 만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청제국이라는 우산에 가려진 조선은 스스로 문을 닫으면서 이러한 세계 경제 체제에서 소외됐다. 조선이라는 이 무풍지대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1840, 1856)으로 유럽이 중국을 분할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중국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일본에 주목했다. 1854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후원했다. 이후의 러일전쟁(1904, 2~1905, 9)에서 일본이 지출한 군비 19억 8천만 엔 가운데 12억 엔은 미국과 영국이 제공했다. 1858년, 일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등과 차례로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로주 혼다 마사요시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지시를 받고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고메이 천황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천황은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양위까지 거론했다. 일본의 개방을 반대한 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아니라 천황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쇄국과 개방에 대한 갈등이 아니라 개방 이후의 정치체제개혁이 과제였다.


 조선도 개방의 압력을 받았다. 중국을 통해 서양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기독교의 전파로 더 확실한 실체를 파악했다. 병인양요(1866)는 기독교 탄압에 대한 명분을 앞세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서 이들을 격퇴했다. 병인양요 이전인 동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난동을 펼치자 평안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몰살했다. 집권자인 대원군은 중국과 일본도 물리치지 못한 외세를 격파한 기세를 앞세워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양이(鎖國攘夷)를 천명했다.


 이듬해인 1867년에 일본에서는 막부가 일왕의 조정에 권력을 이관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져 메이지 시대가 열린다. 일본에서 교두보를 다진 미국은 조선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신미양요(1871)를 일으킨다. 일본이 완전히 문호를 개방한 반면에 조선은 이 두 양요를 겪으면서 외부와의 문호를 완전히 차단한다. 일본이 천황과 막부 사이의 오랜 갈등을 이용하여 정치체제를 개혁하는 동안 조선은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체제유지에 주력했다. 그 와중에서 광성보의 비극이 벌어졌다. 


 오랜 장마가 끝난 8월 중순에 광성보를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성곽이 보이고 성문 위에 안해루(按海樓)가 있다. 안(按)이라는 글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누른다는 강압적인 뜻이고, 둘째는 달랜다는 유화적인 뜻이다. 바다를 진압한다는 뜻이라면 임전무퇴를 의미할 것이고, 바다를 달랜다는 뜻이라면 외교적 교섭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신미년에 광성보를 지키던 수비대장 어재연(魚在淵)의 당혹함을 생각했다. 황해에서 초지진을 지나 광성보로 다가오던 미국함대를 대하는 광성보 수비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정은 결사 항전으로 광성보에서 미국함대를 막으라고 명했다. 광성보는 황해에서 강화도와 육지 사이를 흐르는 물길 가운데 가장 좁고, 가운데 암초가 있어서 선박이 지나기가 어려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간조에는 대형선박이 거슬러 올라오기가 어렵고, 만조에도 암초 덕분에 통과하는 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양쪽에 포를 고정시키면 정확히 타격할 수가 있는 천험의 요새이다. 물의 흐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대형선박을 운행하기조차 어려웠다. 여기까지가 조선 수비군의 대책이었다.


 산마루 왼쪽에는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한 어재연 형제와 무명의 병사들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다섯 개의 무덤이 있는데 어재연 형제와 전사자들의 무덤이다. 장마가 지난 후 무덤가에는 두 그루의 새빨간 백일홍이 무성하게 피어있다. 그들의 죽음을 순국으로 미화할 수만은 없는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핏빛의 백일홍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미군은 이미 광성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포대에 설치한 조선의 대포와 미군의 함포는 사정거리가 크게 달랐다. 


황해에서 강화도로 진입한 미국의 전함은 초지진 부근에서 멈추었다. 조선의 대포로는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미군의 함포는 광성보의 수비시설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전투에 참전한 한 미군은 무력한 이 방어시설을 향해 지나친 포격을 가했다고 후회했다. 어재연 형제를 비롯한 수백 명의 수비군 대부분이 전사하고 일부는 포로가 되어서 함대로 끌려갔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파괴된 일대의 사진 몇 장이 손돌목 돈대 곁에 걸려있다. 


 짐작하건대 어재연의 이름은 역경(易經) 건괘(乾卦) 구사 효의 효사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초구효의 잠룡(潛龍)이 상괘로 진입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다시 연못 속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신기하게도 어재연의 이름에는 그의 운명이 예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시 연못으로 돌아갈 결정권이 없었다.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주도하는 조정은 이미 아편전쟁으로 조각이 나기 시작하는 중국과 개항파의 득세로 혼란에 빠진 일본의 상황을 보고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어재연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철저한 약자의 생존철학이 시대적 과제였다고 생각하는 나는 어재연의 입장이 슬펐다. 이 시설을 재정비한 박정희는 항전으로 순국한 수백 명의 충절을 기리려고 했을까? 아니면 무모한 국가정책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차마 그들의 무덤을 사진에 담지 못하고 새빨갛게 핀 백일홍에게 물었다. 억울한가? 


뒤늦게 제국주의 팽창에 뛰어든 미국은 유럽의 아시아 석권을 견제했다. 나중에 국력을 키워 비유럽국가로 유일하게 열강의 대열에 편입한 일본도 결국은 오판을 하고 말았다. 무모하게 미국과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겠다고 나선 일본도 패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패전을 극복하고 다시 부흥한 것은 그동안의 경험을 자산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혹약재연은 어재연과 조선이 선택해야 할 화두였다. 미국이 완강한 저항 때문에 물러났다고 하여 이 사건은 서양의 소요(騷擾)라는 의미에서 양요(洋擾)라고 불렀다. 이 명명에는 반성의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