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반도 정세의 과거 회귀와 위기의 한국 안보

한반도 정세의 과거 회귀와 위기의 한국 안보

이용준

전외교부차관보, 북핵담당대사

본 협회 편집위원



 중국과의 500년 주종관계와 36년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1948년 완전한 독립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은 건국 직후 국내적으로 많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으나, 6.25 전쟁을 계기로 국제정치적 좌표가 명확히 재설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과거 서구 열강과의 관계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한국은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과 한미동맹 결성을 계기로 당시 세계 역사의 주류였던 해양세력, 선진 문명 세계, 서방 진영,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합류하여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하는 국가발전의 길을 열어갔고, 1990년대 초 공산권의 몰락으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시장경제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그 진영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한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은 더욱 격상되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국격 상승은 남북한 사이의 역학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와 중국 국력의 급신장과 북한의 핵무장으로 인해 그간 한국이 누려왔던 최적의 환경들은 사라지고 한반도 역사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과거의 속방을 대하듯 고압적 태도로 한국을 대하기 시작했고, 핵무장 이후 한반도의 패권자를 자임하는 북한은 한국에게 굴종을 요구하면서 북한 방식의 한반도 현상타파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중국의 성장과 중화주의의 부활


 중국은 1980년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성장을 도모할 때부터 강대국으로의 재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국의 야심이 너무 일찍 노출될 경우 미국의 견제가 심해질 가능성을 우려한 덩샤오핑은 중국의 국력이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적어도 100년간 도광양회(韜光養晦) 정책을 유지하라는 교시를 후계자들에게 남겼다. 도광양회는 ‘검광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의미로서, 삼국지에서 유비가 야망을 숨긴 채 조조 진영의 빈객으로 엎드려 지내던 시절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후계자들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고무된 나머지 불과 10년도 안 지난 시점부터 도광양회의 교시를 어기고 강대국화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2013년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중화주의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아시아에서, 나아가 범세계적으로 미국을 대체하는 패권 국가로 부상하려는 노골적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중화주의는 아시아에서 중국이 패권자로 군림하면서 주변국들을 지배하던 과거 시대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중화 제국주의의 부활을 의미한다.


중국이 이를 성취하기 위해 제기하고 있는 대표적 현안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다. 중국은 남중국해가 명나라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해였다고 주장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남중국해의 거대한 수역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2016년 이 같은 중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이에 불복하면서 군사적 수단을 통한 이 지역의 강점을 추구하고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는 중국이 추구하는 제1도련선 구상의 남쪽 부분에 해당되는 현안이며, 제1도련선 문제는 한국의 안보와도 직결된 사안이다. 제1 도련선은 중국이 1980년대 초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연결하여 설정한 해상방어선으로서, 2025년까지 이 지역에서 미국 군사력을 몰아내겠다는 것이 목표다. 이어서 일본, 사이판, 괌, 인도네시아를 연결하는 제2 도련선을 2050년경까지 장악하여 그 서쪽 해역을 중국의 내해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전략이다. 결국, 한국, 대만, 동남아를 포함한 서태평양 전체를 중국의 위성국화 하겠다는 구상이다. 중국의 위성국이 될 경우 어떤 일을 겪어야 할지는 최근의 홍콩사태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중국이 제1 도련선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 장악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최우선적 대상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최초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한다. 과거 중국의 일부였고 다시 중국 품으로 되돌아올 것이니 미국이 한국에 대해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한국에 대한 중국의 시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경각심을 필요로 하는 사항이다.


중국의 이러한 노골적 패권장악 야심으로 인해 미·중 양국 간 패권경쟁이 표면화되고 있고, 그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치열한 무역 전쟁이 전개되고 있다. 무역 전쟁으로 판가름이 안 나면 군사적 충돌로 갈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분쟁이다. 그 패권경쟁에서 한국은 중립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어느 모로 봐도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보다는 그 적국인 중국으로 기울어진 모양새다. 한국은 박근혜 정부 이래로 미·중 간의 주요 쟁점현안들에 있어서 거의 항상 중국의 편에 섰고 그러한 경향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한층 심화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이러한 한국의 태도가 한미동맹과 양립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앞으로 최소 10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큰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되면 중립도 양다리 걸치기도 모호성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할 ‘진실의 시간’이 다가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의 핵무장과 대남 우위의 복원


 한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러한 국제정세 지각변경은 같은 시기에 남북한 관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해방 후 30년간 지켜온 한반도의 주도권을 1970년대 후반에 한국에게 빼앗긴 이래 북한은 지난 40년간 이를 되찾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경제력이 한국에 비해 크게 뒤지는 북한이 대남 우위 회복을 위해 선택한 수단은 핵무장이었다. 1979년 영변에서 비밀핵시설 건설을 시작한 이래 북한은 모든 난관을 감수하고 모든 가용한 외교적 술수를 동원하면서 거의 40년간이나 핵무장을 위해 일로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말 핵무장의 완성을 공식 선언하면서 한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우위의 탈환을 자축했다. 


북한은 당초 의도했던 바대로 핵무장을 통해 ‘북한 주도의 통일’ 달성을 위한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로써 한국이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통일문제를 주도하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70년대 후반 이후 지난 40년간 한국의 대북한 우위를 당연한 상수로 생각하고 살아온 한국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한국이 주도하는 북한 흡수통일이 아닌,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큰 ‘연방제 통일’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우려의 대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대처 양상


 이처럼 국력이 급신장한 중국과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위세가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이들의 고압적 자세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가중되는 시점에, 이에 강력히 대처해야 할 한국 정부는 그와 상반되는 정책들을 채택함으로써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첫째는 자발적인 대중국 굴종 외교의 문제다. 현재 한국 정부는 특정 정책 수준의 친중 정책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이 6.25 전쟁 이래 현재까지 속해 온 소속진영을 통째로 바꾸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이 속한 진영을 해양세력, 친미 진영,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대륙세력, 친중 진영, 전체주의/공산주의 진영으로 아예 전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노골적 친중국 편향 외교는 미·중 간에 전개되고 있는 사활을 건 패권경쟁의 와중에도 변화의 조짐이 없어 한·미 동맹의 장래에 큰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둘째는 과도한 대북한 유화정책의 문제다. 2017년 핵무장 완성으로 정치적, 군사적 대남 우위를 회복했다고 자부하는 북한은 한국에 대한 고압적, 위협적 태도를 점차 강화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에 의연하게 대응하기는커녕 북한의 대남 우월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지극히 유화적이고 순응적인 대북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른 한·미 간 대북정책 이견은 심각한 한미동맹 균열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남은 희망적 요소들


한국이 처한 이러한 어려운 국제적 여건 속에서 그나마 한국에게 숨 돌릴 여유와 희망을 주는 요소가 두 가지 있다. 그 첫째는 악화일로의 미·중 패권경쟁이고, 둘째는 북한이 핵무장 이후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난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해 중국을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국제정치 학계에서는 중국이 조만간 미국을 추월하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고, 빠르면 2025년경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추월하리라는 예측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예측은 많이 변하고 있다. 미국의 노골적 견제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대폭 하락하여 미국을 추격하는 데 훨씬 오랜 세월이 소요되리라는 예측과 더불어, 미국을 영원히 추월하지 못하리라는 전망도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워싱턴 정가에서는 중국이 미국 경제를 영원히 추월할 수 없도록 중국과의 모든 경제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고도로 자본주의화 된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숙주인 미국 및 그 동맹국들과 거래할 수 없게 된다면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은 자체적으로 거대한 내수시장을 갖고 있고 중국의 원조를 받는 많은 군소 개도국들과 무역을 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만으로 현재와 같은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중국은 종래와 같이 한국을 고압적으로 압박하고 강요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데 한계성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고강도 패권경쟁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양국 사이에서 하나의 균형추가 될 수도 있는 한국을 친중 또는 중립 상태로 묶어둘 필요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동아시아에서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 베트남 등 많은 나라를 우호세력으로 확보하고 있으나, 중국 편에 설 나라는 현재로서는 러시아, 북한, 라오스, 캄보디아, 이란, 파키스탄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최근 가시화되고 있는 중국 정부의 대한국 사드 제재해제 움직임은 중국이 처한 이러한 어려운 상황이 반영된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에게 큰 안보적 위협으로 등장한 핵무장 북한은 유엔 제재에 따른 심각한 경제문제와 이에 따른 체제 동요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공세적 대남정책을 취하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대남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후 남북연방제 등을 통해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수십 년 전부터 계획해 왔고, 이제 가장 어려운 고비인 핵무장까지 완성했다. 그러나 핵무장 성공에 따른 유엔의 제재조치로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에 도달해, 정치적 불안정과 체제위기가 확산될 위험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유엔 안보리가 2017년 말까지 채택한 10건의 대북한 제재결의는 북한산 광산물, 수산물, 섬유류의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있고, 석유류 공급을 제한하고 있으며, 인도적 목적 외의 원조와 투자도 금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최근 북한의 대외수출은 90% 이상 감소했고, 외환보유고가 곧 고갈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이러한 경제위기에 더하여 천재지변에 따른 식량난까지 가중됨에 따라 북한은 대남 군사적 압박이나 연방제 통일 추진 등 공세적 대남 전략을 적극 구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제재해제 협상에 실패한 북한은 당면한 경제난에서 벗어나고자 고압적인 대남 비난, 위협 등을 통해 한국 정부의 대북 경제지원을 거듭 촉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간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유엔 안보리의 제재조치와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제재, 미국 정부의 반대 등으로 인해 이에 호응하지 못했다. 최근 정부의 대북라인 전면교체는 이런 장애들을 정면 돌파해 금단의 벽을 넘어보려는 의지가 내포된 것으로 보여,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