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잊을 수 없는 파인 부인(Mrs Pine) - 박무승

- Unforgettable Mrs Pine -

– 박무승 / 본 협회 회원, 전자랜드 고문

 

6·25전쟁 동안 미군수송부대 통역으로 종군하면서 알게 된 미군 장교 샤봇( Chabot) 대령의 권유와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되는 1953년 봄이었다. 미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 수업료와 체류비를 포함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하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나 준비도 없이 이국만리 타국으로 간다는 게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니 미국 유학 초기 나의 모든 행동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면 나는 바보천치였다. 창피한 순간들이었다. 캔자스주 엠포리아( Emporia)라는 아담한 작은 도시에 위치한 대학 기숙사에 입주했다. 식사는 여학생 기숙사 지하실에 있는 식당(cafeteria)에서 셀프서비스를 하게 되었다. 모든 게 생소하고 어설펐다. 나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치 보며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영어 해독력이 부족하니 강의실에서도 교수님의 지도를 엉뚱하게 처리하는 실수를 되풀이했다. 그래도 학점은 차곡차곡 챙겼다.

 

그럭저럭 한 학기가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모든 학생들은 가정으로 돌아가고 교정은 텅 비었다. 기숙사에는 갈 데 올 데 없는 외국 학생만 몇 명 남았다. 카페테리아도 문을 닫았다. 식사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나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을 돈 여유가 없어 간이식당에 가서 핫도그나 햄버거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주위가 조용해지니 더욱 외롭고 고향 생각이 났다. 향수병(Home-Sick)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3개월이나 이어지는 여름방학은 지루했고 외로웠다.


드디어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외국인 학생문제를 담당하는 스웨인 (Swain) 박사가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강의가 끝나자 오후에 스웨인 박사 사무실에 찾아갔다. 스웨인 박사는 항상 그랬듯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래, 이제 미국에 와서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요즘 캠퍼스 생활 재미있어?”라고 묻는다. 의자에 앉으라고 하시면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숙녀 한 분께 인사드리라고 하신다. 그 숙녀는 하얀 머리에 은색 안경테를 끼고 있었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며 제법 육중한 몸매를 가진 그 숙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안경 너머로 나를 훑어보는 듯하더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도 공손히 인사드렸다.

스웨인 박사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이 숙녀분은 파인 부인(Mrs Pine)이야. 이 근처에 있는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시는 분이야. “스웨인 박사가 다시 활짝 웃으시면서,”좀 짧게 말하자면, 이 숙녀분이 이 대학 근처에 혼자 사시는데 외국 학생을 하숙시키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를 추천하고

싶은 거야. 어때, 기숙사 생활에서 벗어나 가정집에 살아 보는 것도 좋지 않아?“

 

 나는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스웨인 박사는 파인 부인과 몇 마디 상의하는 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래, 너에게도 좋은 기회이니까 당장 파인 부인과 함께 가서 기거할 방을 살펴보고 짐을 옮길 준비를 해라. 나는 스웨인 박사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파인 부인을 따라 길을 나섰다. 파인 부인은 연로하신 탓인지 걸음이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으셨다. 대학 캠퍼스에서 십여 블록 떨어진 곳이란다. 젊은 학생 걸음으로는 10분 정도 거리라고 하신다.

 

캔자스주의 가을 날씨는 아직 걷기에는 무더웠다. 파인 부인과 함께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는 걷는 사람이 없고 자동차만이 휙휙 달리고 있었다. 때로는 달리는 자동차 창문을 열고 “Hi!”라고 소리치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파인 부인을 알기 때문에 저렇게 인사한다고 한다. 어느 운전자는 차를 옆에 대고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셔드리겠다고 한다. 참 친절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느낌도 들었다.

 

제법 따가운 가을 햇볕을 쬐며 30여 분 걸었다. 파인 부인은 나에게 한국전쟁 동안 어떻게 지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국 유학을 오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하셨다. 서투른 영어로 주섬주섬 6·25전쟁의 비참한 이야기 그리고 전쟁 중에 종군통역을 하면서 알게 된 미군 장교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오게 된 경위를 말씀드렸다. 천천히 걷던 파인 부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전쟁이란 비극이야!”라고 소리치신다. 그러면서 의외의 이야기를 하신다. 자기 남편이 세계 1차대전 때 유럽에 지원병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이가 20대 중반이었으며 결혼 초기였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혼자서 산다고 하신다. 나는 가슴이 찡함을 느꼈지만 무어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파인 부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안 안내를 하셨다. 단층집으로 응접실에 방 두 개 그리고 화장실 부엌을 갖춘 아담한 집이었다. 내가 쓸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식사는 대학 구내식당을 이용하기로 했지만 파인 부인은 때때로 함께 식사도 하자고 하신다. 때로는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요리해서 같이 먹어 보자고 하신다. 나도 한식을 요리해서 먹고 싶었지만, 그 당시 그 작은 도시에는 한식을 요리할 재료는 없었다.

 

그때 파인 부인과 함께 걸으면서 나는 불편한 그분을 부축하며 걷지 않았다. 부축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불편한 여성을 부축하고 걸어야 한다는 예의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누구를 부축하며 걸어 본 적이 없었다. 파인 부인은 분명히 부축하고 걷기를 원했을 거다. 나는 당연히 노약한 여성을

부축하며 걸어야 한다는 예의를 모르고 있었다.

 

파인 부인 집에서 1년 반 동안 기거했다. 파인 부인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시면서 나에게 함께 가자고 하신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교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지만 파인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파인 부인은 교회에 나가실 때는 화려한 옷으로 단장하고 꽃무늬가 달린 모자를 쓰고 멋을 뽐내셨다. 때로는 내 앞에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 “내 모습이 어때?”라고 물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파인 부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히려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늙은 여성이 화려한 옷을 입고 꽃무늬가 달린 모자를 쓴다는 게 쑥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파인 부인은 분명 나로부터 어떤 찬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파인 부인은 나의 무덤덤한 표정에 실망하셨을 거다. 지금 그분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분명 “You are so beautiful!” 하며 찬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면 파인 부인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후회를 했다. 파인 부인은 나의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교회에 나간 적이 없는 나는 파인 부인과 함께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갔다. 나란히 앉아 설교를 듣고 기도를 했다. 나는 설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기도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 건 분명했다. 교회에 나간 지 반년쯤 지났을 때 파인 부인은 나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다. 보모 역할도 한다고 하신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교인이 될 만한 자격도 없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파인 부인의 권유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국 세례를 받기로 했다. 파인 부인은 몹시 기뻐하셨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했고 엄숙한 마음으로 절차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순간 파인 부인은 나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셨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파인 부인과 함께 식사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자리에서 파인 부인은 진지한 태도로 나에게 물었다. 앞으로 “파인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어떻냐고 하신다. 파인 부인은 누구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자기 아들이라고 할 때도 있었다. 그분이 “어머니”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의중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도 어머니처럼 존경하고 어머니처럼 모시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데 다른 여성을 어머니라 부르는 게 불효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웃기만 했다.

 

그렇게 파인 부인 집에서 기거한 지 일 년 반이 훌쩍 지나가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파인 부인과 작별해야 할 날이 다가올수록 정다웠던 일, 고마웠던 일 위로 되었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날 파인 부인은 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나는 네가 ‘어머니’라고 불러 주길 바랐어.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해. 그리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라는 말 잊지 말아라.“

 

마지막 헤어지는 인사를 할 때 파인 부인은 나에게 다가서며 ”그래 잘 가라. 나에게 마지막 키스를 해 다오.”라며 뺨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나는 파인 부인을 껴안거나 뺨에 정다운 키스를 하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즐거웠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파인 부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파인 부인은 문밖을 나서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파인 부인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을까? 왜 자주 팔짱을 끼며 여기저기 다니지 못했을까? 왜 헤어질 때 정겨운 껴안음도 못하고 뺨에 키스도 못 했을까? 두고두고 후회하고 반성했다. 뉴욕에서의 나의 생활은 무척 바빴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니 세월 가는 줄 몰랐다. 파인 부인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겠다는 약속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인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나를 떠나보낸 뒤 새로운 한국 학생을 하숙생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쾌활한 성격을 가졌으며 매사에 충실한 학생이라는 소식이었다.

 

파인 부인이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자주 편지를 드리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파인 부인이 말씀하신 영어 속담 생각이 났다. ‘Out of sight, out of mind’

그런데 나는 너무 빨리 파인 부인을 잊어버린 게 아닌가! 그리고 몇 년 후 파인 부인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두 손 모아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영원히 파인 부인을 잊을 수 없다.

아- 파인 부인! 당신은 진정 어머니 못지않은 어머니 역할을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어머니”라고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편안한 영면을 빌어 본다.